왕신(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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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王信
(? ~ ?)

왕신은 원나라 말기의 장군으로, 양주(揚州) 흥화현(興化縣) 사람이며 기주(沂州)에서 활동했던 군벌 왕선의 아들이다.


2. 생애[편집]


왕신은 처음에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를 따라 종군하여 산동(山東) 지역의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찰한첩목아는 거짓으로 항복했던 홍건적의 장수 전풍(田豊)의 꾀임에 넘어가 그를 만나려 했는데, 그는 왕신의 군영을 시찰한 뒤 곧바로 전풍을 만나러 길을 떠났지만 왕신은 찰한첩목아가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지 못했고, 결국 찰한첩목아는 전풍과 암약한 왕사성(王士誠)에게 암살당한다.

찰한첩목아가 죽자 그의 양아들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가 양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대를 지휘하니 왕신 또한 확곽첩목아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확곽첩목아가 익도(益都)[1]를 무너뜨려서 산동의 홍건적을 모두 평정하게 되자 왕신은 기주로 귀환하여 그곳을 지켰다. 원나라 조정에서 홍건적을 토벌한 장수들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할때 왕신은 그의 공을 인정받아 왕선과 함께 나란히 평장정사(平章政事)[2]의 관직을 받았다.

1367년 겨울, 명나라의 태조(太祖) 주원장은 대장군(大將軍) 서달에게 25만 대군을 내주면서 중원(中原)을 향하여 북벌할 것을 명령하였고, 서달은 왕선에게 편지를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니 왕선이 겉으로는 이를 따랐다. 그러나 왕선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비밀리에 왕신을 기주의 동쪽으로 파견하여 거주(莒州)[3], 밀주(密州)[4] 등의 고을들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신이 모병하는 도중에 서달이 왕선의 배신을 알아차리고 기주를 급하게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왕선도 서달에게 붙잡히게 되자 왕신은 모병을 포기하고 확곽첩목아가 있는 산서(山西)로 달아나려 하였다. 왕선은 서달의 강압에 못이겨 왕신에게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왔으나 왕신은 편지를 가져온 사자를 죽이고 그의 형 왕인(王仁)과 함께 산서로 달아났다.

왕신이 달아나자 거주, 해주(海州)[5]는 물론이고 술양(沭陽)[6], 일조(日照), 감유(赣榆)[7], 기수(沂水)[8]의 제현(諸縣)들이 모두 서달에게 투항하게 된다. 한편 왕선의 배신에 이어서 왕신까지 사자를 죽이는 일을 저지르자 매우 분노한 서달은 결국 왕선을 때려죽이고 참수하였으며, 기주의 관료들을 모두 현지 관료에서 명나라의 관료들로 교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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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칭저우시(靑州市) 일대[2] 종1품의 관직으로 오늘날의 부총리에 해당한다.[3] 오늘날의 산둥성 르자오시(日照市) 쥐현(莒縣)[4] 오늘날의 산둥성 주청시(諸城市) 일대[5] 오늘날의 장쑤성(江蘇省) 롄윈강시(連雲港市) 하이저우구(海州區) 일대[6] 오늘날의 장쑤성 쑤첸시(宿遷市) 수양현(沭陽縣)[7] 오늘날의 장쑤성 롄윈강시 간위구(赣榆區)[8] 오늘날의 산둥성 린이시(臨沂市) 이수이현(沂水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