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볼레스와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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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오토 볼레스와비치
Otto Bolesławow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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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00년
사망
1033년
폴란드 대공국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032년 ~ 10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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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어머니: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의 엠닐다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보편교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미에슈코 2세, 디트리크와 함께 폴란드를 삼분했다.


2. 생애[편집]


1000년경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 귀족 도브로미르의 딸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레겔린다, 미에슈코 2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 2명이 있었고, 이복형제로 베즈프림이 있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가 그니에즈노에 방문해 볼레스와프 1세와 함께 그니에즈노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황제는 아기의 대부가 되어주었고, 볼레스와프는 아기의 이름을 오토로 지었다.

1025년 폴란드 왕을 자처한 볼레스와프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미에슈코 2세가 두 형제 베즈프림과 오토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두 사람을 추방했다고 하고, 또다른 연대기에는 두 사람이 숙청을 당할 것을 우려해 국외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오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를 추종했다가 추방되었지만, 베즈프림은 루테니아에 머물렀다고 한다. 1031년,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가 폴란드를 협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콘라트 2세에게 망명한 뒤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폴란드를 공격하라고 종용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콘라트 2세가 루세티아와 미스코를 공략하는 사이, 야로슬라프 1세가 이끄는 루스군은 폴란드 중심부로 밀려들어왔다. 미에슈코는 수도 포즈난을 버리고 도주했고, 미에슈코의 아내 리체차와 자식들은 작센으로 도피했다. 루스군은 포즈난에 입성한 뒤 베즈프림을 권좌에 앉혔다. 베즈프림은 권력을 잡은 직후 폴란드 왕복과 왕관을 콘라트 2세에게 넘기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폴란드 대공을 자처했으나 수많은 인사를 살육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다가 1032년 봄에 피살되었다. . 학자들은 당시 독일에 있던 그가 살인을 의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베즈프림이 살해된 뒤, 당시 보헤미아에 피신했다가 그곳의 공작 올드르지흐에게 체포된 뒤 거세된 후 은거 중이던 미에슈코 2세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풀려나 폴란드로 돌아왔다. 이에 콘라트 2세가 메르제부르크에서 폴란드 원정을 다시 벌이려 하자, 도저히 대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직접 메르제부르크로 가서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그는 형제 미에슈코 2세, 그리고 디트리크[1]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고 콘라트 2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소 폴란드와 마소비아를 받았고, 오토는 실레시아를 접수받았으며, 디트리크는 대폴란드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또다른 학자들은 미에슈코가 포즈난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받고 나머지 지역은 오토와 디트리크에 의해 분할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1033년,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내와 자손에 대해서도 전해지지 않는다. 미에슈코는 오토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물려받고 디트리크를 추방해 폴란드를 통합했다. 그러나 이교도들이 혼란을 틈타 일으킨 반란 진압에 애를 먹다가 1034년 5월 10일 또는 1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외아들 카지미에시 1세가 뒤를 이어 폴란드 대공에 올랐으나, 이교도들의 대반란과 이웃 세력의 침략에 직면해야 했다.

[1] 미에슈코 1세의 세 아들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미에슈코비치, 람베르트 중 한 명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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