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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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1대 국왕
영조 | 英祖


파일:사도 영조.jpg

배우: 송강호
출생
1694년(숙종 20년) 10월 31일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즉위
1724년 10월 16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776년 4월 22일 (향년 81세) [1]
한성부 경희궁 집경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원릉(元陵)[2]
재위기간
조선 왕세제
1721년 11월 15일 ~ 1724년 10월 16일 (2년)
조선 왕세제 | 조선 국왕 대리청정
1721년 12월 4일 ~ 1724년 10월 16일 (2년)
제21대 국왕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 (51년 6개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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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금(昑)
부모
부왕 숙종
모후 인원왕후, 생모 화경숙빈
형제자매
3남 중 2남
배우자
정실 정성왕후, 정순왕후
후궁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숙의 문씨
자녀
2남 7녀 (2남 1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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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진종
차남 장조
장녀 화억옹주
차녀 화순옹주
삼녀 화평옹주
사녀 ?
5녀 ?
6녀 ?
7녀 화협옹주
8녀 ?
9녀 화완옹주
10녀 화유옹주
11녀 화령옹주
12녀 화길옹주

종교
유교 (성리학)

광숙(光叔)

양성헌(養性軒)[1]
봉호
연잉군(延礽君)[2]
전호
효명전(孝明殿)
묘호
영종(英宗) → 영조(英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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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
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
(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
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순경력홍휴
(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純景曆洪休)
중화융도숙장창훈
(中和隆道肅莊彰勳)

시호
조선: 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
(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 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 장순(莊順)
섭정
왕세자 이훤 (1749년 ~ 1762년)
왕세손 이산 (1776년)


1. 개요
2. 작중 행적 / 특징
3. 평가
4. 테마
5.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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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야.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다."

영화 사도에 등장하는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 배우는 송강호.

2. 작중 행적 / 특징[편집]



파일:영조 (아들).jpg


파일:영조 (세손).jpg

세자를 바라보는 영조[4]
세손을 바라보는 영조[5]
아들인 사도세자성군이 되기를 바랐던 군주. 극중 영조는 세자가 어린 시절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시킨다. 영조는 권력 투쟁 와중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으로, 신하들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항상 공부를 강조하고, 즉위할 때 신하들과 약속으로 묵인하고 있던 일부 폐단을 세자가 바꾸려 들자 그걸 왜 멋대로 바꾸냐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어느 날은 역모죄로 잡힌 죄인들을 상대로 친국을 하던 중 죄인들이 대놓고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한 범인이 어찌 숙종 대왕의 아들이냐고 윽박지르자 '아직도 독살 타령이냐'고 투덜거리지만 죄인들이 이어서 "그럼 이인좌가 왜 당신을 못 믿어서 반란을 일으켰겠느냐", "천한 무수리 최씨의 자식이 어떻게 왕이 되냐, 우리 지역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한다" 등의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붓는다. 그 말에 영조는 울분을 간신히 참으며 저놈들의 입을 찢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며 자리를 떠난다.[6]

세제 시절의 혹독한 고생을 견딘 아버지 입장에서는, 항상 자식은 모자란 듯 보인다. 세자가 어린 시절 영조가 직접 쓴 책을 읊으면서 무려 한 구절이나 빼먹자, "놀이는 한때의 맛이요. 학문은 평생의 맛이라고 내가 몇번을 말했느냐! " "저, 저... 눈 껌뻑껌뻑 쳐다보는..."[7] 이라 말하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며 강하게 훈계를 할 정도다. 세자가 어느덧 청년이 되자, 틈만 나면 "양위하겠다."라는 등의 얘기를 꺼낸다. 이는 진짜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세자의 반응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한 테스트였다. 그러다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는데, 세자의 개혁적인 성향이 자신과 안 맞았고[8], 거기에 자신이 이뤄놓은 탕평책을 건드리는 게 싫었는지 신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지적을 해서 기를 죽인다. 궐내에서 일어나던 어른의 사정이 사도세자를 망친 격.


파일:영조 (자결하라).jpg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령하는 영조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 난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야!

영조는 여자문제에서도 심각한 인격적 결함을 드러내는데, 엄연히 첫째 부인이자 중전인 정성왕후가 회갑을 맞았음에도 개인적 감정을 이유로 완전히 무시한다. 또한 일개 나인이었다가 영조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된 문 소원이 영빈에게 대드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문 소원을 체벌하는 대왕대비와 갈등을 일으킨 끝에 홧김에 양위하겠다 소리치고 대왕대비가 얼떨결에 윤허하자 이를 빌미삼아 양위를 강력히 밀어붙인다.

사도세자는 서러움이 북받혀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궁 앞에서 사실상 자해에 가깝게 석고대죄를 하고, 대왕대비는 중대사안에 대한 윤허를 그냥 거둘 명분이 없어 자신의 노화로 인해 잘못 윤허를 내렸다며 고령의 나이에 식음을 전폐하여,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한다.

대왕대비가 죽은 뒤에도 영조는 그 탓을 세자에게 돌리며[9] 위선자 취급을 한다. 세자는 더더욱 엇나가 상중에 무당놀음을 하며 술을 마시고, 영조는 더욱 분노해 신하들 앞에서 귀씻은 물을 뿌려버리며 부자관계는 완전히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후 영조와 세자는 한참을 교류없이 지내지만 대왕대비와 비슷한 시기 사망해 공석이 된 중전을 새로 들인 차라 영조는 다시 문안을 오라고 세자에게 압력을 넣는다. 그러나 세자는 의관을 준비하다 발작을 일으켜 내관을 살해한 후, 화완 옹주를 통해 협박해 영조가 경희궁으로 도망가듯 거처를 옮기는 사건까지 일으킨다.

그러던 와중 영조는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세손(후에 정조)이 자신을 닮아 공부에 힘쓰며 싹수를 보이자 “어찌 그런 아비에게서 이런 아들이 나왔는가? 우리 삼대에는 부전자전이 다 헛소리구나.”라고 크게 기뻐하며, 세자는 데려가지도 않던 선왕릉에도 데리고 가는 등 왕위를 세손에게 넘겨줄 결심을 굳힌다.

대체재가 생긴 영조는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문을 쓰라며 세자의 스승들을 압박하고 세자가 저렇게 된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던 와중 영조의 마음을 읽은 김상로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이 나경언을 사주해 부추기고, 다시 석고대죄를 하던 세자는 마침내 한계에 이르러 칼을 빼들고 영조의 거처로 쳐들어갔다가 세손과 영조가 정답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포기하고 만다.

결국 다음날 세자의 생모 영빈은 영조에게 직접 세자를 처분해달라는 요청을 한다[10]. 영조는 이를 구실로 사도세자에게 칼자루를 내던지면서 "자결하라." 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이에 세자도 이런 법도가 어디 있느냐며[11] 언제부터 날 아들로 여겼냐고 거부한다. 당연히 신하들도 이 참상을 보다못해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말리지만[12], 영조는 그런 신하들마저 모두 내쫒고 세자를 뒤주에 가두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해 뒤주에 못질까지 손수 하고 폐세자 조서도 직접 작성해야했다.

영조가 뒤주에 가두기 전에 자살을 종용한 것은 실제 역사상의 사건 그대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시점에서는 자결하는 게 세자로서는 가장 편한 길이긴 했다. 영화 상에서나 역사적으로나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영조 입장에서는 합당한 후계자가 사도세자의 아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13] 좋건 싫건 세손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족보를 뒤져 먼 친척에게 물려줘야 하니까.

그런데 사도세자를 폐서인시키면 세손에게 물려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세자인 상태에서 죽은 상태"여야 했다. 또한 작중에도 나오지만 사약을 주거나 참형을 하면 역적이 되기 때문에 세손 뿐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에도 타격을 준다. 당연히 이 정도로 왕을 끌어내릴 순 없겠지만 큰 타격이 있을 것. 즉, 영조가 이미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사도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반드시 "처형이 아닌 형태로 사도세자가 세자의 신분을 유지 (혹은 회복)한 상태에서 사망"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인데, 새파랗게 젊은 세자가 자연사하길 기대할 수도 없으니 자결을 종용한 것이다. 그가 자결했다면 세자로서 사망하고 자연스럽게 세손이 후계로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결을 거부하자 저런 방법으로 죽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정황상 세자와 신하들이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냐" 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큰데 (실제 역사에서도 초반엔 몰래 음식과 물도 줬다) 영조 입장에선 아들을 반드시 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반드시 자살하거나 뒤주에서 죽어야지 1.(이미 국정을 돌보는 것이 불가능해진) 그에게 보위를 주지 않고 2. 손자에게 보위를 주는 것이 둘 다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을 거부한 이상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반드시 죽는게 필요했던 것이다.[14]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바로 이 대목에서 송강호의 삑사리가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는데, 단순한 연기 실수가 아니라 슬픔이 북받치다 끝끝내 터져버린, 피눈물 섞인 절규를 현실적으로 담아낸 장면이기 때문.]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니 아들이 산다."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후 7일 째 밤에 사경을 헤매는 사도세자와 진심어린 속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로서 그동안 품었던 모든 사심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세자를 엄하게 키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군주와 후계자로서의 법도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세자를 보면서 얻은 실망이 사랑을 미움으로 변하게 하였다며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과 말 한 마디였다는 세자의 진심을 듣고 왜 우리는 이승과 저승이 갈리는, 최후의 갈림길에서야 서로의 진심을 알았냐면서 한탄한다.

마지막에 사도세자를 걱정하면서 그래왔다는 이야기나 의리를 내세우며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우는 모습이 참으로 비탄스럽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처단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변호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 때 피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이 얼마나 엄청난 자리인지를 각인시키는 발언을 한다.

그 후 세자가 뒤주에서 숨을 거두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숨과 맥박을 짚어본 뒤 얼굴을 어루만지며 소리 죽여 오열하면서도 명분상 폐서인된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린다.[15]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일조했던 김상로를 비롯한 다른 대신들마저 "독하구먼. 자식 죽이고 개선가라......" 라고 말하며 씁쓸해 한다. 이렇게 아버지의 심정과 군주의 의무를 복합적으로 드러내었다.


파일:늙은 영조.jpg

세손인 정조와 이야기를 나누는 영조
14년 뒤, 죽기 전에 청년이 된 세손과 함께 임오화변 당시의 기록들을 세초하는 것을 바라보며 너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록을 지운다고 밝힌 후 세손에게 네 아비를 왕으로 추숭하겠다는 자는 종사의 역적이라며 신신당부한다.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인 것이 큰 충격이었는지 세손과의 대화 중에 애통은 애통이고, 의리는 의리다라며 눈물을 흘린다. 삭제된 장면에서는 숙종을 모시는 빈소에 찾아가 "아버지, 자식 하나 건사하지 못한 이 불초소생을 용서하소서." 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나온다.[16] 실록에서 자식의 죽음에 슬퍼했다는 언급은 없지만 여기서는 아버지의 정을 표현 못했던 것과 아들을 죽인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듯하다.

3. 평가[편집]


개봉 전에는 송강호가 영조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며 우려스러운 분위기가 다수였으나, 예고편과 스틸컷이 공개된 이후에는 여론이 정반대로 뒤바꼈고 영화 개봉 후에는 대중매체에서 묘사된 최고의 영조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특히 나이가 든 것에 대한 현실감을 위해 목소리 톤을 다르게 연기했으며, 아들을 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를 완벽하게 묘사하며 "숨소리까지 영조." 라는 제목의 기사까지 나왔을 정도다. 정작 송강호는 영조를 연기하면서 이런 꼰대가 어디있냐며 본인이 맡은 배역이지만 혐오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여운을 준다. 처음에는 총명한 모습으로 영조의 사랑을 듬뿍받았고, 아들을 위해 밤을 지세우며 책을 쓰는 모습은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놀러나가기만 하는 세자의 모습에 실망하고 호통치는 장면은 아버지이자 왕으로서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 그리고 걱정이 끝내 증오와 분노로 변모해 아들을 학대하고 끝내 죽음으로 몰아가는 스토리 구성은 과거에 화목했던 부자간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안타까움을 남긴다.

영화상의 묘사론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역사적으로는 불명) 영조는 왕으로서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군주로서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줄타기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박적으로까지 공부를 했고, 경연에서도 신하들의 말문을 막을 정도의 학식을 가졌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영화에서도 언급이 된다.

그러나 이처럼 공부에 힘을 써야 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취미생활에 빠지자 조바심에 계속해서 그를 가혹하게 훈계를 하였고, 아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삐딱하게 나가자 실망감에 점점 차갑고 잔인하게 변한 것이다. 어쩌면 공부 스트레스로 자식을 자살하게까지 만드는 현대의 일부 잘못된 부모와도 비슷하다.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자식을 엇나가게 만든 것. "내가 임금이 아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거다"란 것이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할 수 있는게, 실제로 그가 왕이고 아들이 미래의 왕이란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아들을 분명히 사랑하는 영화상으론) 저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아들을 몰아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극중 영조가 아들을 사랑했음은 세자가 죽고 시호를 내려주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OST에서도 엿볼수있는데, OST의 제목이 "너를 생각하며 슬퍼하노라" 이다. 즉 단순히 과오를 뉘우쳤다며 시법에 맞춰 '사도(思悼)' 라는 시호를 내린 실제 역사의 영조와는 달리, 극중 영조는 정말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思) 슬퍼하는 의미로(悼) 시호를 내렸다고 볼수있다.

참고로 영화에서 묘사된 영조의 학대는 실제에 비해 순화된 것으로 실제 역사에서는 휠씬 더 심했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생일상을 치러준다고 부르고선 갑자기 엎어버리고, 여동생과 즐겁게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혼냈으며,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냄새가 난다며 신하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등[17] 정말 아버지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기록들이 넘쳐난다. 특히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하는 석고대죄라는 기괴한 고문을 자주 시켰는데, 사도세자가 18세에 홍역에 걸렸을 때 겨울에 일어난 사흘간의 석고대죄와 누나인 화협옹주가 같이 홍역을 앓다가 죽어서 세자 때문이라고 앙심을 품고 2주 후에 다시 석고대죄를 시켰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서처럼 사도세자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후회한다는 기록도 일절 남아있지 않다. 사도세자는 심각한 정신병에 걸려 살인을 포함한 온갖 발작증세를 나타냈으나, 영조는 단 한번도 아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를 뒤주에 가두어 죽여버렸다.[18]

또한 사도세자의 정신병이나 막장행적 역시 역사상의 실존인물이 그랬던 것보다 상당히 순화되어 있다. 사도세자는 100명에 가까운 이를 죽인 것 외에도[19] 폭행과 살인, 궁녀나 비구니에 대한 성폭행도 있었으며, 아내인 혜경궁 홍씨에게 바둑판을 던져 부상을 입힌 적도 있었고, 후궁을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또한 그는 연회와 하사품 구입에 동궁의 예산을 탕진해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린 적도 있었다.

위 서술은 누구 잘못이 더 크냐를 비교하는게 아니라, 실제 역사상의 영조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수준으로 아들을 학대하고 아버지로서 정이 없는 모습을 보였으며, 실제 역사상의 사도세자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수준으로 막장행각을 벌였다는 것을 참고사항으로 추가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묘사된 영조와 사도세자, 이 둘간의 관계는 실제와 다르므로, 실존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하려면 해당문서에 가서 하는 것이 옳다.

여담으로, 너, ~니? 등 은근히 간략하고 짧은 대사들이 많은데, 작중 내내 무겁기만 한 중후반부를 조금이나마 환기시켜주는 대사로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지만 현실은 실제 궁중어투라서 쓰인 것이다. 궁중어투를 잘 살린 것으로 유명한 사극 대왕의 길의 영조도 거의 똑같은 말투를 사용한다. 실제로 영조는 신하가 아침에 문후를 여쭐 때에도 "나는 일없다" 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답했다. 한중록을 봐도 영조는 세자에게 "그 술은 누가 주더니?"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니" "어찌 그러하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배우의 출신지(경남 김해)가 출신지여서 그런지 억양상 동남 방언이 묻어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연기력과 상관없이 몰입이 깨졌다는 평도 있다.


4. 테마[편집]




방준석 - 너를 생각하며 슬퍼하노라

5. 기타[편집]


  • 뒤주를 동원해가면서 세자를 죽인 이유는 정순왕후의 가족과 김상로의 대화로부터 나온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사약을 내리면 되지 않냐고 묻자 정순왕후와 김귀주의 아버지인 김한구와 김상로가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하는 것은 역적에게 내리는 것이고, 그 3대는 역적으로 취급받으니 아비인 영조 자신도 역적이 되기 때문에, '미쳐서' 아비에게 해를 끼치려 한 아들을 왕이 아닌 분노로 '미친' 아비가 죽임으로서 이를 어디까지나 가정문제로 한정지어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자가 역적이 되면 자기는 물론 세손까지 역적이 되기에 세손을 아끼던 영조로서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된 것.

  •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영조는 못난 아버지다. 어릴때 쏟은 사랑이 성인이 되기까지 유지되었다면 좋았을 운명을 자신과 나라만을 생각하면서 별 시덥잖은 이유로 아들을 책망하고, 끝내 아들을 죽이는 게 운명이라면서 단호하게 나오는 모습이 화를 일으킨다.

  • >"별일 없지?"
영조가 불길한 일이 있는 날에, 부정을 떠넘긴다는 의미로 싫어하는 사람을 불러서 말하는 대사. 처음엔 내관, 그 다음엔 세자를 불러서 이런다. 이 점은 영화와 사료가 조금 다른데,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부정을 씻기 위해 세자를 불러서 실제로 한 말은 "밥 먹었냐"였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해당 상황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영조가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훌륭한 배우 개그가 되어 버려 관객들이 빵 터질 것을 우려해 유사한 의미의 다른 대사로 바꾸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1] 조선 왕 27명 중 최장수[2] 다른 조선 왕릉과는 다르게 파묘(破墓) 자리를 쓴 능이라는 것이 특징이다.[3] 조선 왕 27명 중 최장 집권[4]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을 때의 모습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 뒤에서 경멸하듯이 쳐다보고 있다.[5] 세자와는 다르게 공부를 좋아하고 총명했기에 굉장히 아꼈고, 저 장면에서도 자신의 질문에 막힘없이 올바른 정답을 말했기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6] 영조는 압슬형, 지자형 같은 가혹한 고문을 폐지했던 임금이다. 이런 그가 가혹한 형벌을 내린 건 그만큼 출생에 대한 심한 컴플렉스와 경종 살해 루머라는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7] 참고로 두 번째 대사는 대본에 없는 송강호의 애드립이다.[8] 사실 영조는 입장상 신하들, 특히 자신의 즉위에 힘을 실어준 노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노론 인사들의 부정부패를 어느 정도는 방관하는 대신 그들에게 지지를 받고, 반대로 소론에게도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는 식으로 탕평책을 펼치며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세자가 원칙대로 하니 비록 그 방법이 정론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역정을 낸 것.[9] 물론 영조는 대왕대비와 기싸움을 하려던 것일뿐 양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자가 정말 가만히 있었다면 패륜아 취급하며 양위를 흐지부지시켰을게 분명하다. 대왕대비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끝나자 그 죄책감도 세자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10] 시해시도까지 간 이상, 왕실을 지키고 세손이라도 구하려는 의도였으며, 어쩌면 세자도 폐세자로라도 살릴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한 행동으로 묘사된다.[11] 자결이란 형벌이 조선에 어디 있냐고 울부짖는데 좀 애매하지만, 사약은 거부권 없이 공식적으로 집행되는 사형 형식이다. 영조가 개인적으로 자살하라고 하니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세자는 영조가 자결을 강요하자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의금부로 넘기라고 요구한다.[12] 채제공처럼 진심으로 세자의 안위와 정국을 걱정하며 말리는 신하도 있었고, 세자가 죽으면 덩달아 자신들도 몰락할 것을 두려워해서 말리는 신하들도 있었다.[13] 영조의 중전들은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고 그의 후궁들도 줄줄이 딸만 낳았다. 영조의 아들은 모두 후궁인 정빈 이씨 소생의 요절한 효장세자와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 뿐이었다.[14] 진심으로 아들을 증오했든지 죽이고싶진 않았지만 미쳐버린 아들을 도저히 두고볼 수 없었던 간에, 왕권과 종묘사직을 더 중시한 영조의 입장에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반드시 필요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죽음이 영조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는 실록에 기록되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딱히 슬퍼했다는 기록은 없다), 영화에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아버지로서 정이 있었으나 나라를 위해 (미친 사람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으로 묘사된다.[15] 이 때 가마가 금천교를 지나가자 영조는 세자가 대죄하는 환영과 교차하게 된다. 생사지로에 이르러서야 왕부자가 가까스로 진심을 나누었음을 나타내는 연출.[16] 불초소생은 "훌륭하신 부모님을 이 자식이 못나고 모자라서 닮지 못했다."라는 뜻으로, 세자를 죽인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자책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와는 반대로 숙종은 아버지로서는 몰라도 남편으로서는 최악인 사람이다. 그도 그렇듯이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아내들을 정쟁에 끌어들여서 가혹하게 굴었기 때문이다.[17] 작중에선 망가지는 세자를 묘사하기 위해 마신 걸로 나왔지만, 실제 역사에선 술을 마시지도 않은 생사람을 잡았다고 한다.[18] 처음에는 사도세자가 영조가 지적한 것을 고쳐보려고 했으나, 어떻게든 허점을 찾아냈으며 나중에 가서는 아예 없던 사실까지 만들어내서 망신을 줬다. 아버지에게 칭찬 한마디조차 받아보지 못한 세자는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고, 세자를 싫어하던 신하들조차 영조의 만행에 학을 뗐을 정도로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19]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했다." - 대천록.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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