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울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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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교황 보니파시오 1세에 대항한 대립교황.
2. 행적[편집]
출생년도, 출신지, 집안배경, 대립교황이 되기 이전의 행적 등은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대 집사였다는 것만 전해진다. 418년 12월 26일 조시모 교황이사망하자, 대부분의 집사, 소수의 사제 및 기독교 신자들로 구성된 군중이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을 점거한 뒤 에울랄리오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들은 12월 29일까지 그곳을 점거한 뒤 공식적으로 새 교황을 축성했다. 그러나 12월 27일 70명의 신부가 이끄는 또다른 무리가 전 교황 인노첸시오 1세의 고문이었던 보니파시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추대했다. 보니파시오 1세는 산 마르첼로 알 코르소 성당에서 축성되었다.
로마 행정을 주관하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는 먼저 교황이 에울랄리오가 진정한 교황이라고 여기고 주현절 행렬을 조직한 보니파시오 1세를 민심 선동 혐의로 체포했다. 이에 보니파시오 1세의 지지자들은 황제 호노리우스가 머물고 있던 라벤나에 대표단을 보내 에울랄리오가 사제들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정당한 선거 없이 무단으로 선출되었으니 교황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올렸다. 호노리우스는 2월 8일 두 당삳자를 황궁에 소환하여 분쟁을 해결하려 했지만 별다른 타협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6월 13일 스폴레토에서 아프리카와 갈리아 주교들도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했다.
보니파시오 1세와 에울랄리오는 공의회에서 판정이 내려질 때까지 로마 외곽에 머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에울랄리오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와 실권자인 콘스탄티우스 3세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점을 과신한 나머지 부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로마에 들어갔다가 보니파시오 1세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도시 밖으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신망을 잃어버린 에울랄리오는 419년 4월 3일 호노리우스로부터 교황 직을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네피에서 주교를 맡던 그는 422년 보니파시오 1세가 사망한 뒤 로마의 일부 성직자 및 신도들로부터 새로운 교황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는 1년 후인 42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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