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위나 애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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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
에드위나 애슐리
Edwina Mountbatten, Countess Mountbatten of Burma


파일:에드위나 애슐리.jpg

이름
에드위나 신시아 아네트 애슐리
(Edwina Cynthia Annette Ashley)
출생
1901년 11월 28일
영국 런던
사망
1960년 2월 21일 (향년 58세)
북보르네오 제슬턴
배우자
제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마운트배튼
(1922년 결혼)
자녀
패트리샤, 파멜라
아버지
제1대 마운트템플 남작 윌프레드 애슐리
어머니
아말리아 카셀
형제
메리
종교
성공회
1. 개요
2. 생애
3. 자녀



1. 개요[편집]


영국의 정치인 제1대 마운트탬플 남작 윌프레드 애슐리와 어니스트 카셀의 딸인 아말리아 카셀의 장녀다. 에드워드 7세의 재정관리인이었던 어니스트 카셀의 상속녀다.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숙모이다.

영국의 상속녀, 사교계 명사, 구호 활동가 그리고 당시 제1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자작의 아내로서 인도 자치령의 초대 총독부인이었다.

2. 생애[편집]


1901년 제7대 샤프츠버리 백작의 친손자인 마운트탬플 남작 윌프레드 애슐리와 어니스트 카셀의 외동딸이 아말리아 카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에드위나의 대부는 에드워드 7세였으며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은 에드워드 7세의 재산관리인이기도 했던 영국의 대금융가로 세계적 거물로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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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말리아 카셀과 에드위나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에드위나가 10살 때 사망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버지 윌프레드는 뮤리엘 스펜서와 재혼했다. 새어머니는 에드위나의 아버지와 결혼한 직후 아이들의 가정교사를 해고했다. 새어머니는 의붓자식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않았고, 에드위나와 여동생을 기숙학교로 보냈다. 에드위나는 새어머니를 매우 싫어했다.

기숙학교에서 에드위나는 외할아버지가 부자, 독일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 에드위나는 기숙학교 생활을 힘들어했다. 학교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기 싫어했던 에드위나는 공부를 마치기 위해 사촌과 파리와 로마 등 유럽으로 떠났다.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할아버지인 카셀 경과 함께 살았다. 에드위나는 카셀 경의 런던 거주지인 브룩 하우스에서 안주인으로 지냈다. 에드위나는 곧 런던에서 가장 흥미롭고 부유한 데뷔탕트 중 한 명으로 런던 사교계에서 유명해졌다. 에드위나는 그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에드위나의 모든 저녁 식사, 모든 파티, 모든 댄스 파트너가 신문에 기록되는 등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3세의 부인이 에드위나에게 영국 왕실의 친척인 루이 마운트배튼을 소개했다. 에드위나는 인도로 웨일스 공을 따라 인도 순방 중이던 마운트배튼을 만나러 가 1922년 2월 14일에 에드위나는 루이에게 청혼을 받았다.

결혼 얼마 전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 경이 사망했다. 그가 에드위나에게 상속해 준 재산은 미화로 대략 4천만 달러 정도였다. 이걸 현대의 4천만 달러와 비교하면 안 되는 게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1937년 아들 록펠러 2세에게 상속해준 재산이 5억달러 조금 안 되던 시절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 갓 20살 된 아가씨가 역사상 최고 부자 재산의 1/10 정도의 부자라는 뜻이다. 결혼 당시 에드위나의 재산은 남편인 루이의 연수입의 1만 배가 좀 넘었다고 한다.

루이와 에드위나는 1922년 7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세인터 마가렛 교회에서 결혼했다. 8,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였으며 왕대비였던 알렉산드라 왕비부터 조지 5세 부부와 모든 자녀들, 기타 왕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올해의 결혼식‘이라고 불렸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에드위나는 삶을 매우 지루해 했다. 하지만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자 구호활동을 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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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적십자 활동을 하기 위해 한국전쟁 도중이던 1952년에 방문했다. 당시에 부산의 한 시장을 방문해 직접 빈대떡을 시식하기도 했는데, 경향신문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그런데 오역인건지 여왕의 이모뻘 되는 사람이라고 오보가 났다.




마운트배튼 백작부인 내방
1952년 한국 전선을 방문한 마운트배튼 백작부인




1960년 바다에 묻힌 에드위나
추모 영상

1960년 2월 21일 영국령 북보르네오(현 말레이시아)의 제슬턴(현재 코타키나발루) 시찰 중 두통을 호소하며 잠을 자러 갔는데 파티 다음날 아침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영결식은 평소 자신이 죽으면 고향 바다에 수장해달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영국 포츠머스 바닷가에서, 영국 구축함 HMS 웨이크풀 호 선상에서 치러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제프리 피셔가 주재했다. 이때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해군의 구축함을 2대나 보내서 그녀의 유해를 호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3.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제2대 버마의 여백작 패트리샤 내치불
(Patricia Knatchbull, 2nd Countess of Burma)
1924년 2월 14일
2017년 6월 13일
제7대 브라본 남작존 내치불
슬하 6남 2녀[1]
2녀
파멜라 힉스
(Lady Pamela Hicks)
1929년 4월 19일

데이비드 힉스
슬하 1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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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중 3남은 1952년에 태어나 그 해를 못 넘기고 죽었고, 5남(6남과 쌍둥이)은 루이 마운트배튼과 같이 폭탄 테러로 죽어서 실질적으로 장성한 것은 4남 2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