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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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노스 왕조 1대 국왕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Ἀντίγονος Μονόφθαλμος | Antigonus I Monophthalmus


파일:안티고노스 1세.jpg


안티고노스
Ἀντίγονος
별명
모노프탈모스
Μονόφθαλμος
출생
기원전 382년
마케도니아 왕국 엘리메이아
사망
기원전 301년
프리기아 입소스
재위 기간
안티고노스 왕조
바실레우스
기원전 306년 ~ 기원전 301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안티고노스 왕조 1대 국왕. 모노프탈모스(Μονόφθαλμος)는 별명으로, 애꾸눈이라는 뜻이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3세 시대에 활약하였고,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디아도코이끼리 벌어진 세력 경쟁에 참가하여 한때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왕을 칭했다. 그러나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패사하였고, 평생 일궈낸 왕국은 경쟁자들에게 분배되었다.


2. 생애[편집]


파일:터키 디아도코이 2.png
기원전 312년경, 전성기의 안티고노스 영토. 셀레우코스 1세의 최대 강역 이상의 세력이었다.[1]

기원전 382년 마케도니아 왕국 엘리메이아에서 필리포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티고노스의 신분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여러 가설이 제기된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가 기원전 327년 인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어 인더스 강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필리포스와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마케도니아의 평범한 농부였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기원전 340년경 코르헤오스(Corrhaeus)의 딸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여 두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필리포스를 낳았는데, 코르헤오스가 상부 마케도니아의 린케스티다(Lyncestide) 또는 오레스티데(Orestide) 출신의 귀족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와 함께 자랐으며, 적어도 2명의 형제(데메트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를 두었으며, 이복형제로 훗날 마케도니아의 역사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마르시아스가 있었다. 또한 조카로 폴레마이오스(Polemaios), 텔레스포로스(Telesphoros), 디오스코리데스(Dioscouridès)를 두었는데, 이 세명 모두 훗날 안티고노스 휘하 장군으로 활약했다.

그는 처음에 필리포스 2세를 섬겼으며, 마케도니아가 승승장구할 때 파르메니온, 폴리페르콘,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활약했다. 기원전 340년 페린토스 포위전 때 화살 하나가 날아와 눈을 찌르는 바람에 한쪽 눈을 잃었다. 그는 이때부터 애꾸눈이라는 뜻의 모노프탈모스(Μονόφθαλμος)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애꾸눈이 된 것에 상당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테오그리테스라는 소피스트가 그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로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336년 10월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을 시작할 때, 그는 60세의 나이로 코린토스 동맹의 그리스 동맹 보병대 7,000명을 지휘했다.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알렉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를 프리기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하고 1,500명의 용병대와 현지 병력으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10년간 원정을 이어가는 동안 그곳에 남아서 보급로를 사수했다. 당시 프리기아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했다. 비티니아는 여전히 독립을 유지했고, 파플라고니아, 카파도키아, 리카오니아는 페르시아 사트라프들의 지도하에 있었으며, 이사우리아와 피시디아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다리우스 3세에 충성을 바치는 로도스의 멤논이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고 에게 해의 여러 섬을 공략하며 보급로를 위협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시리아 남부로 진격하다가 티레에서 기나긴 공성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 2만여 기병대를 포함하여 이소스 전투에서 생존한 페르시아군이 나바르자네스의 지휘하에 소아시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322년 봄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에서 3차례 맞붙은 끝에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 여기에 멤논이 함대를 이끌던 중 병사하면서 페르시아 해군이 무력화되었다. 이리하여 프리기아는 안정을 되찾았고, 알렉산드로스는 탄탄한 보급로를 바탕으로 페르시아 정복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로도 프리기아의 사트라프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그가 후계에 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장군들은 한 자리에 모여 차기 국왕을 누구로 삼을 지 논의했다. 그 결과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 필리포스 3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록사나가 임신한 태아가 아들일 경우 알렉산드로스 4세로 이름붙이고 공동 왕으로 삼기로 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제국을 분할하여 각자 통치하기로 했다. 이때 안티고노스는 프리기아, 팜필리아, 리키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321년, 제국의 섭정을 맡은 페르디카스가 점점 권력욕이 심해져 알렉산드로스 3세의 누이였던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하려 했다. 페르디카스는 이를 위해 기존의 아내와 이혼했는데, 그녀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통치자 안티파트로스의 딸이었다. 안티파트로스는 그를 대적하기로 마음먹고,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그리고 안티고노스에게 페르디카스에 공동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페르디카스로부터 할당된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를 공략하는 걸 돕지 않아 페르디카스의 분노를 샀다. 페르디카스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그는 13살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여 안티파트로스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안티파트로스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기원전 321년 1차 디아도코이 전쟁 때 안티파트로스의 해군 사령관을 맡아 그리스 해협을 통제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후 안티파트로스가 시리아로 진군하고 크라테로스가 에우메네스와 상대할 때, 그는 키프로스를 공략하고 페르디카스파 함대를 격파했다. 그러던 중 이집트를 공략하려다 실패한 페르디카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되면서, 1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끝났다. 안티파트로스는 제국의 새로운 섭정이 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가 되었다. 새 정권은 트리파라디소스 협약에서 크라테로스를 죽인 에우메네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안티고노스는 그를 포함한 페르디카스파 인사들을 정벌하는 전쟁의 지휘권을 위임받았다.

기원전 320년, 안티고노스는 오키니아 전투에서 에우메네스의 군대와 대치했다. 그는 에우메네스가 크라테로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한 기병대와 정면 대결하는 건 자살행위라고 보고, 에우메네스가 그리스 사람으로 마케도니아 출신 장병들에게 그다지 지지받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부하들을 매수하고자 하였다. 결국 에우메네스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노라 요새에 은거했다. 안티고노스는 노라 요새를 포위하는 한편, 피시디아의 크레토폴리스 근처에 있는 알케타스, 도키모스, 아탈로스, 폴레몬의 연합군을 향해 진군하여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페르디카스 잔당들을 거의 정리했지만, 에우메네스 만은 천혜의 요새인 노라 요새에서 끈질기게 버텼기에 좀처럼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은 뒤 폴리페르콘이 섭정을 맡았다. 안티고노스는 폴리페르콘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며 폴리페르콘에 반감을 품었던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에우메네스에게 함께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지만, 에우메네스는 장고 끝에 폴리페르콘과 손을 잡기로 하고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노라에서 탈출한 뒤 킬리키아로 이동했다. 당시 안티고노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상륙하려는 클레이토스에 대항하기 위해 소아시아 북서부로 이동했기에 에우메네스의 탈출을 막지 못했다. 클레이토스는 안티고노스의 해군 제독 니카노르를 해전에서 격파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안티고노스와 니카노르가 육지와 해상에서 협공을 가했고, 클레이토스는 전군을 잃고 도주했다.

한편, 에우메네스는 킬리키아, 시리아, 페니키아를 장악하고 은방패부대 지휘관인 안티오네스, 테우타모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폴리페르콘을 돕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지만, 그들은 킬리키아 해안에서 안티고노스의 함대와 마주치자 편을 바꾸었다. 안티고노스는 이제 에우메네스를 정리하기 위해 시리아로 진군하였다. 에우메네스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수적 열세가 명백하니 일단 피하기로 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러 북 바빌로니아에 겨울 숙영지를 세운 뒤, 바빌론의 사트라프 셀레우코스 1세,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 등에게 안티고노스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페이톤과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편을 들기로 했다. 이에 에우메네스는 기원전 316년 수사로 이동하여 그곳의 사트라프들로부터 지원을 받아낸 뒤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으로 진격했다. 셀레우코스는 이에 맞서 삼중천차 2대와 작은 배 몇 척을 보내 건널목을 저지하게 했고, 홍수를 저지하기 위해 설치했던 장벽을 파괴해서 홍수를 유발하게 했지만, 이 모든 조치는 허사였다. 하다못해 에우메네스를 따르는 장병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줘서 회유해보려 했지만, 이 또한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에우메네스가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으로 진군하자,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 페이톤과 함께 안티고노스에게 달려갔다.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에게 에우메네스가 지중해로 이동하는 걸 저지하는 임무를 맡긴 뒤, 전군을 이끌고 에우메네스에게 향했다. 에우메네스는 당시 상당한 병력을 모았기에 그와 한판 붙어볼 만하다고 판단하고 회전을 벌일 태세를 갖췄다. 그는 먼저 코프라타스 강을 건너려던 안티고노스의 선봉대를 기습하여 4,000명의 병력을 포로로 잡았다. 안티고노스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메디아로 진군해 그곳의 사트라프들을 위협했다. 에우메네스는 서쪽으로 진군해 안티고노스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지만, 그를 따르던 사트라프들이 "우리는 배정된 영지를 떠날 수 없다"며 반발하는 바람에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16년 늦여름, 안티고노스는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며 에우메네스에게 회전을 제안했고, 에우메네스도 동의했다. 이리하여 양군은 남부 메디아의 파라이타케네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더 많은 사상자를 입은 안티고노스는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기원전 316-315년 겨울, 안티고노스는 사막을 가로질러 행군해 에우메네스를 기습하려 했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대응할 태세를 갖췄다. 며칠 후 양군은 가비에네에서 맞붙었다. 플루타르코스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에우메네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를 후원하던 페르시스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태만으로 인해 에우메네스가 축적해왔던 상당량의 전리품들과, 휘하 부대이자 마케도니아 최정예인 '은방패 부대' 대원들의 처자식들이 적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은방패 부대는 에우메네스와 장교들을 모조리 체포해 안티고노스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처자식들을 돌려받았다.

안티고노스는 자신을 상대로 대단히 선전한 에우메네스를 내심 흠모했고, 아들 데메트리오스 역시 그를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그의 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고, 부하들이 위험인물이니 당장 처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에우메네스를 처형했다. 이리하여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뒤, 페이톤이 자신의 병사 일부를 매수해 반란을 도모하는 걸 눈치채고 곧바로 처형했다. 또한 바빌론에 도착한 뒤 셀레우코스에게 바빌론에서 벌어들인 수입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셀레우코스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50명의 기병과 함께 이집트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안티고노스는 인도 근방에서 소아시아까지 이르는, 디아도코이 중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는 이러한 성공에 고무되어 장차 제국을 통합하여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리시마코스가 기원전 314년 손을 잡고 안티고노스에 대항하기로 했다. 그들은 안티고노스에게 공동으로 사절을 보내 프리기아를 리시마코스에게, 페니키아와 시리아를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바빌로니아를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안티고노스는 콧방귀를 뀌며 "전쟁을 알아서 대비하라"라고 답했다. 그는 아리스토데모스 장군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보내서 군대를 일으키게 했고, 조카 폴레마이오스 휘하의 군대를 헬레스폰트로 보내 폴리페르콘과 손잡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연합에 대항하게 하였다. 그리고 본인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하에 있던 페니키아를 직접 침공하여 티레를 포위했다. 1년간의 공성전 끝에 티레를 공략하고 페니키아를 확보한 뒤, 페니키아의 방어를 장남 데메트리오스에게 맡긴 후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기원전 312년, 안티고노스는 리디아와 카리아의 사트라프 아산드로스를 격파하고 리디아, 카리아 전역을 점령했으며, 조카 텔레스포로스와 폴레마이오스를 그리스로 파견해 카산드로스에 대항하도록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서 출정해 가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를 상대로 승리하고 시돈을 공략하면서, 그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로부터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지명되었던 아게노르의 아들 페이톤이 전사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에게 일부 병력을 줘서 바빌론에 복귀하게 하였다. 셀레우코스는 재빨리 바빌론을 장악한 뒤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안티고노스는 메디아의 사트라프 니카노르와 아리아의 사트라프 에바고라스에게 셀레우코스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두 장수는 셀레우코스의 기습으로 완패하였고, 두 장수가 이끌고 갔던 병사들이 투항하면서 오히려 셀레우코스의 힘을 불려주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급기야 메디아, 수사, 페르시아, 아리아, 파르티아 등지마저 셀레우코스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안티고노스는 어쩔 수 없이 프톨레마이오스와 휴전 협정을 맺은 뒤 물러났다. 이후 기원전 311년부터 309년까지 셀레우코스와 맞붙었지만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하자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렇게 디아도코이간의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그들은 곧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노렸다. 기원전 308년,카산드로스가 폴리페르콘과 화해하고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압박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와 손을 잡고 에게 해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쳐들어갔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안티고노스도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기에 둘의 협력관계는 곧 끊어졌다.

기원전 307년 카산드로스가 에페이로스를 장악하러 간 사이,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테네를 기습 점령하였다. 데메트리오스는 이듬해에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을 섬멸하고 키프로스를 장악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세를 이어가 기원전 305년 로도스를 포위하고 엄청나게 거대한 공성탑 헬레폴리스까지 동원하며 공격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보낸 지원군에게 막혀 결국 로도스를 공략하지 못했다. 다만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칠 때만 지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안티고노스의 패권을 인정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일로 인해 "공성자"라는 뜻의 폴리오르케테스(Poliorcetes)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비록 로도스를 공략하지 못하긴 했지만, 이 당시 안티고노스의 세력은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 헬레니즘 제국의 영역 절반 이상을 점거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세웠던 제국을 통합시킬 가장 유력한 인물로 손꼽혔다. 게다가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아테네를 포위하던 카산드로스를 격파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전부 귀속시키면서, 카산드로스를 조만간 끝장낼 수 있을 듯했다.

그는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들여 왕을 칭했고,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통합시키려는 야망을 공공연히 표출했다. 카산드로스가 평화 협정을 맺자고 호소했지만, 당시 거듭된 승리에 도취되었던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아시아의 셀레우코스에게 연합을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바로 옆에 있던 리시마코스는 즉시 카산드로스와 합류하였고, 카산드로스가 테실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를 상대하는 사이 자신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소아시아를 전격 침공했다. 얼마 후 사절단을 접견한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기로 하고, 시리아의 시돈을 침공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는 인도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사절단을 접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원전 302년 소아시아를 침공한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안티고니아에서 축제를 즐기는 틈을 타 플라펠루스 장군의 활약을 앞세워 많은 영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안티고노스는 즉시 대군을 일으켜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는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조우해 곧바로 결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리시마코스는 결전을 미뤘고, 그 사이에 겨울이 오면서 양측은 날씨가 풀릴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동계 숙영에 들어갔다. 이무렵 인도 전선에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셀레우코스 1세는 귀환하던 중 카산드로스의 사절단을 만나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셀레우코스의 대군이 소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있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전갈을 보내 당장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에페수스에 상륙한 뒤, 리시마코스가 점령한 해안의 많은 도시들을 순식간에 탈환하고 셀라에나에서 아버지와 합류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헤라클레아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후 양측은 디아도코이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로 일컬어지는 입소스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참패를 면치 못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투창에 맞아 전사했다. 향년 81세. 그의 죽음과 함께 디아도코이 최대의 영역을 자랑했던 안티고노스 왕조는 붕괴되었고,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 승자들에게 분배되었다. 하지만 장남 데메트리오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기원전 294년 마케도니아에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틈을 타 마케도니아를 공략하고 왕조를 재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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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레우코스 1세는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와 접촉하면서 상당한 영토를 헌납해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