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오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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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아카오빈86.png

赤尾敏
あかおびん | 아카오 빈

출생
1899년 1월 15일
일본 제국 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
1990년 2월 6일 (향년 91세)
일본국 도쿄도 도시마구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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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구제아이치현립제3중학교[1] (중퇴)
직업
사회운동가
정당
대일본애국당
1. 개요
2. 생애
3. 사회주의자에서 전향하다
4. 중의원 선출
5. 전후 우익 활동
6. 말년


1. 개요[편집]


아카오 빈은 일본의 우익 사회운동가이다. 중의원을 지냈으며 대일본애국당을 창당하고 초대 대표가 되었다.


2. 생애[편집]


1899년 (메이지 32년) 1월 15일 나고야의 철물상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이자 자유주의 지식인이었다. 구제중학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빼앗았다는 수업을 듣고 '나도 공부하면 총리가 될 수 있어'라고 꿈꾸고는 장래희망을 총리대신으로 정했다.


3. 사회주의자에서 전향하다[편집]


구제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결핵에 걸려 중퇴하고 미야케지마 섬에 요양을 떠났다. 원시공산주의를 지지하던 아카오는 아버지에게 지원을 받아 새로운 마을(新しき村)[2]이라는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대부분의 노동력을 고아로 충당한 이 농장에서는 지위에 상관없이 생산된 농작물을 균등하게 분배하였고, 이에 감명을 느낀 몇몇 사회주의자와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새로운 마을은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 결국 미야케지마의 토착 유력자에 넘겨지고 만다. 이후에는 도쿄에서 사카이 도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오스기 사카에, 다카하타 모토유키 등의 문하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좌익 세력의 지원을 받아 도카이농민조합연합회와 채무자동맹을 설립하는 등 좌익 활동에 투신했다. 그러던 중 군사훈련기에 천황제를 비판하고, 현지 재계에 활동비를 요구한 혐의(공갈미수)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감옥에 있던 중 동지라고 생각했던 아이치통신의 기자에게 매몰차게 비판받자, 좌익에 배신감을 느낀 아카오는 우익으로 전향했다.


4. 중의원 선출[편집]


감옥에 있던 동안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을 공부했고, 출소한 뒤인 1926년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 대응하여 건국제(建国祭)를 기획했다. 전현직 정치인과 거물 우익 활동가까지 참가한 이 건국제는 12만 명이 참가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다만 1933년 기획한 매화절 행사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1937년 도쿄시의회 선거에 아라카와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미지:아카오빈42.jpg

1942년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6구에 비추천 후보[3]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결국 다른 우익 성향의 의원들처럼 대정익찬회에 가입하기는 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에 반대[4]하는 등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1943년 전시형사특별법 개정에 반대해 사임하고, 도조 히데키의 연설을 방해하거나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뿌린 행동으로 인해 당선무효 처리되었다.

패전 이후에는 일본 전국을 다니며 우익 강연과 연설을 했다.


5. 전후 우익 활동[편집]


전후 GHQ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1952년 역코스의 흐름을 타 정계에 복귀하여 대일본애국당을 창당했다. 여러 선거에 후보로 출마했는데, 의원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전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찍지 말고 기권하라는 연설도 했다고.

아카오와 대일본애국당은 전후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의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받는데, 도쿄 찌르기 사건의 범인이 전직 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고, 시마나카 사건[5]의 범인도 애국당의 예비당원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건사고에 연관되어 구속되었으나, 매번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6. 말년[편집]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에 일본 아스팔트 우익 중에는 드물게도 적극적인 친미, 친서방 정책을 지지하며 반공정신을 역설했다.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전방위적인 개선을 주장했는데,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1989년 제15회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이때 나이가 90세로 일본의 역대 공직 선거 출마자 중 3번째로 고령[6]이다.

1990년 2월 6일 오전 9시 26분 도쿄도립오츠카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91세.
[1] 現 아이치 현립 쓰시마 고등학교[2] 소설가 무샤코지 사네아츠가 주장한 것으로 로버트 오언의 초기 사회주의적 공동체와 유사하다.[3]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은 후보[4]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공산주의 소련의 계획이라고 주장했다.[5] 언론인 시마나카 호지의 소유인 <중앙공론>에 천황 내외가 단두대에서 참수당한다는 내용의 글이 연재되자 우익 성향의 소년이 칼을 들고 시마나카의 자택에 침입했던 사건이다. 시마나카는 당시 집에 없어 화를 면했다.[6] 그보다 고령인 후보로는 1953년(26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한 오자키 유키오, 2012년(46대) 중의원 선거에 출마한 가와시마 료키치로 94세에 출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