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찌르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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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 후폭풍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uploadfile/Tokyostabbing.jpg
[1]

피습 당시의 영상(연령인증 필요)

이 사건을 보도한 대한뉴스

한국어: 도쿄 찌르기 사건,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일본어: 浅沼稲次郎暗殺事件(あさぬまいねじろうあんさつじけん)
영어: Tokyo Stabbing / Tokyo Stabbing Incident / Inejiro Asanuma Assassination

1960년 10월 12일 일본사회당 소속의 정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TV 연설회 도중 극우파 소년에게 살해당한 사건.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 나가오 야스시(長尾 靖, 1930~2009)가 절묘한 순간에 찍은 사진이 영문 제목인 'Tokyo Stabbing(도쿄의 찌르기)'으로 유명해지면서 그는 이 사진으로 미국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196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또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도 고스란히 NHK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사상 최악의 방송사고 중 하나가 되었다.[2] 피의자와 피해자 둘 다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야마구치가 먼저 옆구리를 찌르면서 야마구치의 안경이 날아갔고 이후 오른쪽을 찌르면서 아사누마의 안경이 날아가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야마구치는 안경을 쓰지 않은 상태다.


2. 피해자 아사누마 이네지로[편집]


파일:external/www5.sdp.or.jp/081010_asanuma.jpg
아사누마는 당대 일본 사회주의 계열 정치가들 중에서는 온건파에 속한 정치인이었으나 좌파아시아주의 성격이 강한 정치인이었다. 이에 따라 공산화 이후의 중국에서 '미국중국일본의 공통된 적'이라는 요지의 반미 노선에 충실한 연설 등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1960년 일본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자유민주당, 민사당[3], 일본사회당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하게 되었다.

당일 미국과 일본의 협정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던 도중 일부 군중들은 야유와 협박을 해댔다. 하지만 아사누마는 계속 연설을 이어갔는데 갑자기 17세 극우파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가 연단으로 달려와 순식간에 아사누마의 옆구리를 긴 칼[4]로 찔렀다. 칼을 맞고 나서도 두 다리로 한동안 서 있었던 걸 보면 칼이 체내에 온전히 다 들어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치명상인 건 매한가지였던 탓에 병원으로 이송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만 61세였다.


3.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야마구치 오토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img.chess443.net/2014052000004_2.jpg


4. 후폭풍[편집]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이 패배할 것 같았으나[5]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아사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민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며(296석/467석 57.4%) 민사당이 유탄을 맞아 의석 수가 40석에서 17석으로 줄어들어 참패했고 사회당은 의석 수를 122석에서 145석으로 늘리기는 했으나 1958년 총선 때보다 의석 수가 적었다.

참고로 아사누마가 암살당한 뒤 사회당에서는 그의 부인인 아사누마 쿄코(浅沼享子)가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무난히 당선되었지만 3년 후 실시된 선거에서는 입후보하지 않고 정계은퇴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전 일본이 어린이들에게 "날붙이 추방 운동"을 실시하면서 규제에서 제외 대상이었던 히고노카미[6]와 연필깎이 칼[7] 등을 1963년 4월 5일 총도법 개정안에 추가로 적용시켰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1961년에 소설 '세븐틴'을 썼다.

일본 래퍼 NORIKIYO의 노래인 仕事しよう의 뮤직비디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5. 기타[편집]


  •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2007년 벌어진 아르메니아튀르키예 언론인 흐란트 딩크 암살사건이다. 범인인 사마스트 오군은 1990년생으로 범행 당시 야마구치랑 똑같은 17살이었다. 튀르키예 우파인 오군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연이어 보도하던 딩크를 살해했으며 잡혀가는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다음은 오르한 파묵 차례다!" 라고 외치는 통에 오르한 파묵은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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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진은 소년이 아사누마를 막 찌르려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왼편에서 달려오면서 칼로 그를 찌른 뒤 다시 오른쪽으로 밀쳐진 장면이다. (아래 영상 21초)[2] 대한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다뤄졌으며 당시의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었다.[3] 니시오 스에히로 등 사회당 일부 계파가 사회당을 탈당해 만든 정당. 1994년 신진당에 합류하면서 해산했다.[4] 코등이 없는 와키자시이며 일명 시라사야로 유명하다.[5] 물론 사회당이 낸 후보자 수가 196명 정도라 정권교체될 가능성은 적었다.[6] 肥後守. 건담 엑시아가 연상되는 일본의 접이식 칼. 작명이 이즈미노카미 카네사다무츠노카미 요시유키 같이 이름이 알려진 일본도와 유사하다. 어촌에서의 그물 끊기나 그 외 날붙이가 필요한 잡다한 일에 만능칼로서 널리 쓰였으며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도 들어와서 쓰이다가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신성공업사란 기업에서 히고노카미를 간략화(크기의 소형화, 플리퍼 오픈장치의 삭제)시키고 공장에서 대량생산할 수 있게 만들어 생산성을 높인 버전이 '신성특급도'(이하 신성칼)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생산되고 있다. 일본의 히고노카미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지만 대부분이 장인이 하나하나 손으로 만드는 수제작품이라 가격도 신성칼의 10배 이상 비싸고 열처리나 칼날 형태도 균일하지 않다. 그래도 신성칼에는 없는 칼날 오픈장치가 남아 있고 크기도 훨씬 큰 것들도 있어서 특성은 바래지 않은 편.[7] 안전 칼집이 있고 단두대 날처럼 비스듬한 날을 가진 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