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프 자흐 1세

덤프버전 :






하이데라바드 왕국 초대 니잠
아사프 자흐 1세
Asaf Jah I


파일:Asaf_Jah_I,_Nizam_of_Hyderabad.jpg

이름
미르 카마르-웃-딘 칸 시디치
출생
1671년 8월 11일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아그라
사망
1748년 6월 1일 (향년 76세)
파일:하이데라바드 왕국 국기.png 하이데라바드 왕국 부르한푸르
재위 기간
하이데라바드 니잠
1724년 7월 31일 ~ 1748년 6월 1일 (25년)
대관식
1724년 7월 31일
후임자
나시르 중
부모
아버지 : 가지웃딘 칸
어머니 : 와지르 운 니사 베굼
배우자
움다 베굼, 사이드 운 니사 베굼
자녀
나시르 중, 살라바트 중, 아사프 자흐 2세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
2. 생애
2.1. 제국의 충신으로
2.2. 제국의 독립과 니잠 왕국의 창시
2.3. 마라타와의 전쟁
2.4. 보팔의 전투와 말라 할양
2.5. 카르나 타카 태수에 개입
2.6. 내정의 개혁
2.7. 죽음



1. 개요[편집]


  • 힌디어: निज़ाम-उल - मुल्क आसफजाह
  • 영어: Qamar-ud-din Khan

하이데라바드 번왕국[1]창업군주이자 초대 군주[2]다.[3] 왕국을 세우기 이전에 무굴 제국데칸 총독이자 재상으로 활동했다. 니잠 울물크(Nizam ul-Mulk), 아사프 자흐(Asaf Jah) 또는 아사프 자흐 1세(Asaf Jah I)라고도 불린다.

무함마드 샤 치세 당시 무굴 제국의 재상이 된 그는 여러 개혁 정책을 시행했지만 부패하고 쇠퇴하는 무굴 제국을 보면서 좌절하였다. 결국 1723년에 재상직을 그만두고 델리를 떠나 데칸으로 낙향했고, 1724년에 당시 데칸 총독이었던 무바리즈 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데칸 고원 지역에 하이데라바드를 도읍으로 정하고 왕국을 세우면서 무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하이데라바드 왕국은 18세기 말 대영제국보호국이 되었으며 인도의 독립 직후인 1948년까지 이어졌는데 결국에는 번왕 제도가 폐지되면서 인도에 병합되었다.


2. 생애[편집]



2.1. 제국의 충신으로[편집]


1671년 8월 21일 , 카마르딘 한은, 무굴 제국 의 중앙 아시아 · 터키계 귀족 가즈 · 우딘 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1708년 이후의 아우랑구제브 제몰 후의 제위 계승에 있어서는, 카마루딘 한은 전신 전령을 가지고 파르후 시야르제 를 지지한 무장으로서 활약했다.

카마루딘 칸은 그 즉각적인 노력을 했고, 1713년 1월 12일 , 팔프 시얄은 그에게 '왕국을 나누는 자' 혹은 '황제의 대리인'을 의미하는 ' 니더물 무르크 '의 칭호를 주었다( 그 어원은 아랍어 에서 유래하여 1600 년경 에 우르두어 가 된 것이다.

팔프 시얄제는 즉위 후 카마루딘 칸을 데칸 지방 으로 파견했다. 이 무렵 그는 중앙에 세금을 납입하면서도 데칸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팔프 시얄이 사이이드 형제 와 대립했을 때, 1719년 1월 카마루딘 칸에게 델리 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었고, 2월 팔프 시얄은 폐위됐다. 그러므로 5월 9일 미르 카마루딘은 데칸을 출진했고, 같은 달 25일 부르 함 푸르 에 진을 짓고 사이이드 형제 타도의 기회를 노렸다 .

팔프 시얄이 사이이드 형제에게 폐지된 뒤 라피 우다 라자트 , 라피 우다우라와 둘이 이어진 뒤 제위를 계승한 황제 무하마드 샤를 원조해 1720 년 말 사이이드 형제를 토벌했다.

카마루딘 칸은 황제 무하마드 샤에게 그 공적을 인정받아 전폭의 신뢰를 두는 것과 동시에, 1722년 2월 8일 에 재상의 지위를 주어, 중용되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20일 , 그는 데칸 총독 으로 임명되어 동시의 영지를 황제로부터의 공훈( 필만 )에 의해 진봉되었다.


2.2. 제국의 독립과 니잠 왕국의 창시[편집]


하지만 카마루딘 칸은 무하마드 샤의 타락과 측근의 부패로 조금씩 점차 좌절을 하게 되고 국정의 개혁도 내부 암투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제국을 그 쇠운에 한탄하고, 자신은 다른 길로 자립하는, 즉 새로운 국가의 수립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1723년 10월 에 카마루딘 칸은 재상직을 그만두고, 제국에서 출립하고 델리를 나와, 자신의 영지가 있는 데칸 고원에 국가를 수립하려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재상의 독립을 있는 역사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출립은 제국으로부터의 충성과 미덕의 영주를 상징했다”

1724년 10월 11일 , 카마루딘 한은 자립을 목표로 남하중, 그를 대신해 데칸 총독이 되고 있던 무바리즈 칸이 이끄는 무굴 제국군의 공격을 받았다( 샤칼 케이더의 싸움 ) 하지만 그는 교묘한 전술로 무굴 제국군을 완매하지 않고 꺾고, 무바리즈 칸을 축출하고, 이것에 의해 그를 시조로 하는 니잠 왕국 이 창시되었다.

같은 해 12월 7일 , 카마루딘 칸은 하이드라바드 를 니잠 왕국의 일시적인 수도로 정하고, 1725년 1월 16일 에 이 도시에 입성해, 이 지역의 지배를 굳혔다. 그 때문에, 왕국의 이름이 이 하이데라바드의 이름을 씌우고, 하이데라바드 왕국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결국 무굴 제국은 이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같은 해 6월 25일 에는 카마루딘 칸을 명목적으로 데칸 6주 전체를 통괄하는 데칸 총독의 지위로 임명 했다. 이 땅을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다. 또 이때 황제 무하마드 샤에게 ' 아샤프 샤 '의 칭호를 받고 이 칭호가 니잠 왕국의 왕조명이 되어 아서프 쟈히 아침 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2.3. 마라타와의 전쟁[편집]


카마루딘 칸은 하이데바드를 일시적으로 수도했지만, 나중에 동지에서 아우랑가바드 로 이동하여 자신의 영지과 지배를 굳히려고 했다.

하지만 영토로 대접된 데칸 6주는 마라타 왕국 에도 권리가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라타와의 싸움이 생겼다. 이미 1718년 7월 마라타는 무갈 제국령의 데칸 6주에 관한 차우타 (제세의 4분의 1을 징수할 권리)와 사르데슈무키 (제세의 10분의 1을 별도로 징수할 권리)의 징수를 제국과 마련하고, 1719년 3월 에 황제에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1727 년 초 , 마라타 왕국의 재상 바지 라오 가 남 인도 의 카르나타카 지방 에 원정 중, 니잠 왕국은 그에게 적대하는 마라타의 무장들과 함께 공격했다. 같은 해 4월 에 바지라오도 카르나타카 원정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1728년 2월, 니잠 왕국의 군대는 푸네와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지만, 원정에서 돌아온 바지 라오에게 패했다( 펄케이드 전투 ). 같은 해 3월 6일 , 니쌈은 말라타의 데칸에서 차우타와 루데슈키를 인정했다.


2.4. 보팔의 전투와 말라 할양[편집]



데칸에서 니잠 왕국이 패한 뒤, 바지 라오의 군세는 매년처럼 무굴 제국의 영토에 몰려들어 말루워 등으로부터 차우타를 징수하고 있었지만, 1730년대 후반에는 델리 근교에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바지 라오는 무굴 제국의 데칸 영토를 지배하에 넣어 그때까지 약탈처였던 중부인도의 말라나 서인도의 구자라트 , 델리 근교까지도 마라타 동맹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바지 라오는 북상해, 1737년 3월 28일 에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를 공격해, 그 군세를 깨었다( 델리의 전투 ). 아우랑제브의 사후 30년째에 일어난 이 사건은 무굴 제국의 쇠퇴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무굴 제국은 니잠 왕국에 원군을 요청했고, 카마루딘 칸이 파견한 원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지 라오의 귀도에 요격했지만, 같은 해 12월 24일 보팔 에서 패했다 ( 보팔 전투 ).

패한 니잠 왕국군은 보팔에 포위된 후 강화를 맺기로 결정했고, 1738년 1월 7일 에 강화했고, 니잠 왕국은 마라타 동맹에게 말라를 할양할 수밖에 없었다.


2.5. 카르나 타카 태수에 개입[편집]


니잠 왕국은 마라타에게 패했다고는 해도, 똑같이 무갈 제국과 독립한 남 인도의 카르나 타카 태수 에는 잘 개입하고 있었다.

1742년 10월, 태수 사프달 앨리한 이 종형제 무르타자 앨리한 에게 살해당하면 카마르딘 한은 곧바로 보병 20만, 기병 8만의 대군을 보내 3월에 알콧을 점거 했다.

또한, 니잠의 군세는 그대로 말라타가 지배하는 틸칠러 파리 로 향해, 같은 해 8월 29일 에 이 땅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틸칠러 파리 포위전 ).

1744년 7월 , 사프달 앨리한의 어린 아들인 태수 사아 다틀러 한 2세가 암살되면, 카마루딘 한은 곧 자신의 부하인 언워 루딘 한 을 태수 에 임명했다.


2.6. 내정의 개혁[편집]


카마루딘 칸은 무굴 제국에 대재상을 있었을때 개혁정책이 기득권과 무굴 제국에 상층부 타락에 좌절하였지만 자신의 왕국에서 자신이 왕이 되자 개혁 정책을 자신있게 추진하였다.
니잠 왕국은 데칸에서는 마라타 세력에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하이데바라드에 중심으로 데칸 고원 남부에 광대한 영역을 확대하여 일정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마루딘 칸은 스스로 무굴 제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데칸에서는 사실상 독립된 입장을 취하고, 독자적인 행정을 깔고 있다.

하지만 무굴 제국처럼 가신에게 관직이나 봉토로 저기르 를 주고, 저기르 달리제 를 도입해, 악바르 대제 처럼 힌두교도 에게는 관용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의 첫 재상이 풀랑 챈드라 는 힌두교도였던 것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또, 무굴 제국의 저기르 달리제를 왕국에 도입한 것으로, 반항적인 유력 자민 다르 에게는 그 권위에 복하도록 강요했다. 한편 마라타 세력을 영토에서 밀어내어 데칸에 질서 있는 행정을 깔았다. 또한 왕국의 징세기구에서는 부패로 인한 부패를 배제하려고 한 것도 알려져있다.

카마루딘 칸은 바로 1948년 인도에 병합될 때까지 계속되는 니잠 왕국의 기초를 반석으로 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굴 제국 분열기인 18세기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2.7. 죽음[편집]


1748년 6월 1일 카마루딘 칸은 데칸의 부르함푸르 에서 사망하고, 그 시신은 아우랑가바드 근처의 풀더 바드 에 매장되었다.

그 사후 아들 나실 정이 뒤를 이어갔지만 손자 무자팔 정도 왕위의 계승을 주장하고 카르나타카 태수의 내란도 함께 제2차 카나틱 전쟁 이 발발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2 06:53:06에 나무위키 아사프 자흐 1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니잠 왕국이라고도 한다.[2] 군주를 니잠이라고 부른다.[3] 재위 : 1724년 ~ 174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