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리투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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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투 경과
4. 영향
5. 여담



1. 개요[편집]




서기 251년 6월, 로마 제국의 황제 데키우스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동게르만계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모이시아 속주의 아브리투스[1]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전사한 전투로, 3세기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2. 배경[편집]


서기 239년 또는 240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다뉴브(도나우, 다누비우스) 강 하류 일대를 침략한 고트족에게 연공금을 지불할 테니 포로를 석방하고 돌아가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고트족과 함께 침략한 카르피족에게는 연공금 지불을 거절했다. 이에 카르피족은 다키아 속주에서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244년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은 뒤 새로운 황제가 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245년 필리포폴리스에 본부를 세운 후 카르피족을 격파하여 다뉴브 강 이북으로 돌려보내고, 그후 고트족에게 연공금을 지불하는 걸 중단했다. 고트족은 이에 반감을 품고, 248년 말 콰디족과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략하여 마르키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그러다가 다뉴브 강 방면군 사령관 데키우스에게 격퇴당하여 본거지로 돌아갔다.

데키우스는 고트족과 콰디족을 물리치고 파카티아누스 등의 반란을 진압한 뒤,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249년 여름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를 격파한 뒤 데키우스는 새 황제로 즉위했고, 기강이 해이해진 제국의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모든 로마인들에게 재물을 신들에게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에 유일신교인 기독교 신자들이 불응하자, 그들을 '무신론자'로 간주하고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그러던 250년,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다뉴브 강을 재차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고트족 뿐만 아니라 카르피족, 바스타르네족, 타이팔리족, 반달족 등 여러 부족도 함께 했다. 그들은 마르키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뒤 니코폴리스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데키우스는 급히 트라키아로 진군해 니코폴리스를 포위한 고트족에 접근했다.

크니바는 황제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하에무스 산맥으로 물러가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다. 데키우스는 추격하다가 아우구스타 트라야나 근방에서 숙영했다. 이때 크니바가 돌연 방향을 돌려 로마군을 급습했고, 데키우스는 갑작스러운 공세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대패했다. 데키우스가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패주한 뒤, 크니바는 전장에 남겨진 로마군의 무기와 보급품을 확보한 후 필리포폴리스로 쳐들어갔다. 250년 늦은 봄, 필리포폴리스의 수비군 사령관 티투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한 후 크니바에게 항복했고, 스스로 황제를 칭한 뒤 크니바와 연합하여 데키우스에게 대항했다.

한편, 데키우스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장정들을 모집한 후 고트족과 합류하려고 진군하던 카르피족 외 여러 게르만족을 저지하고, 산꼭대기의 통로를 신임하는 장교들에게 맡긴 후 국경 요새들을 강화하는 한편 고트족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후 데키우스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고트족을 몰아붙였고, 고트족은 점차 괴멸될 위기에 빠졌다. 크니바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모두 내주는 조건으로 안전한 퇴각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한 데키우스는 침략자들을 응징하여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겠다고 결심한 후 어떠한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고트족은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251년 6월 다뉴브 강 연안의 습지 지대인 아브리투스에 자리를 집았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전투 중 하나인 아브리투스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편집]


크니바는 휘하 병력을 3개 부대로 나누어 큰 늪 주변에 배치했다. 최전방 부대는 늪 건너편에 배치되었고, 다른 부대는 늪을 앞에 둔채 배치했다. 데키우스는 현장에 도착한 뒤 전통적인 전투 대형으로 로마군을 배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 초기에,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병사들이 동요하자, 데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한 병사의 죽음은 공화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황제는 아들의 죽음에도 흔들림없이 군대를 지휘했고, 결국 고트족의 제1열과 제2열이 괴멸되었다. 이에 로마군은 제3열마저 섬멸하려고 진군했다. 그런데 그들은 에트루스쿠스의 죽음에 분노해 이성을 상실했는지 제3열 전면에 있는 늪지대로 돌진해 버렸다. 병사들은 늪에 빠져 밑으로 가라앉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병사는 미끄러졌다.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는 장창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반면 고트족은 그런 습지에서 싸우는 것이 익숙했다. 그들은 키가 컸고 창이 길었으며, 멀리서도 적군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앞서 격파당한 고트족의 장병들이 전장으로 돌아와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로마군 병사들을 공격했다.

결국 로마군은 늪지대에서 허우적대다가 고트족에게 괴멸되었다. 이때 데키우스 황제도 늪지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전사했고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로써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외적에 의해 전사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4. 영향[편집]


데키우스가 전사한 뒤, 부사령관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로마군의 주력이 괴멸된 상황에서 대 고트 전쟁을 이어나가는 건 의미없다고 판단한 후, 승자인 크니바와 서신을 몇 차례 주고받은 끝에 평화협정을 맺었다. 고트족은 그들이 확보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그대로 데리고 갈 수 있었으며, 로마군은 돌아가는 고트족을 건드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트족에게 다양한 편의품을 제공해야 했다. 또한 갈루스는 고트족이 로마 영토를 다시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로마인들은 이 굴욕적인 조약에 분노했고, 결국 갈루스가 사전에 크니바와 밀약을 맺은 후, 데키우스 황제가 전사하도록 유도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다. 조시무스도 갈루스가 고트족과 연합하여 데키우스를 배신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갈루스가 데키우스의 차남인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우고, 데키우스의 유족들을 잘 대우한 점, 데키우스에게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던 그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찬탈을 갈망할 가능성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간주하며, 갈루스는 현실을 직시하여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일로 그의 인기는 추락했고,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다른 게르만 부족들은 고트족의 성공을 부러워하여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를 휩쓸었다.

253년, 다뉴브 강 방면 사령관 아이밀리아누스는 게르만인들을 격파한 뒤 고트족에게 지급될 예정이었던 황금을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황제를 자칭한 뒤 로마로 쳐들어가 갈루스를 처치했다. 고트족은 이에 보복하고자 다뉴브 강을 건너 그리스 북부의 테살로니키를 약탈했다. 그후 아이밀리아누스는 갈루스를 도우러 달려오던 라인 강 방면 사령관 발레리아누스에게 압도당해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서방을 장남인 갈리에누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방을 맡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대적했다. 그러나 260년 에데사에서 샤푸르 1세와 대적하던 중 전염병이 돌면서 로마군 장병들의 희생이 크자, 협상을 통해 군대를 빼내려고 했다가 페르시아군에게 붙들려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에데사 전투) 이 참담한 소식은 로마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빗발쳤고,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는 이 틈을 타 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5. 여담[편집]


"야만인들에게 둘러싸여 죽임을 당하고, 벌거벗은 채로 야수와 새에게 뜯어먹혔다"
며, 그가 그 꼴이 된 건 신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이라고 혹평했다.
  •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에 의한 로마 약탈이 벌어졌을 때, 로마 다신교 신봉자들은 신들이 기독교 신을 신봉하는 제국에 분노하여 은총을 베푸는 걸 중단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기독교인들을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이에 반박하여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겪은 수많은 패배를 언급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로 이 아브리투스 전투를 거론했다.
  • 271년,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키아 속주를 침략한 고트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고트족 왕 칸나바우데스를 주살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름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이 인물이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 황제를 전사시킨 크니바 왕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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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21년 로마의 산 로렌초 부근에서 발견된 루도비시 대석관이다. 서기 250년에서 26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로마 시대의 대석관으로 중앙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는 인물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 대석관을 제작한 목적은 남편과 아들을 잃어 비탄에 빠진 데키우스의 미망인인 헤레니아 에트루킬라 황후를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로마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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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불가리아의 드라이아노베츠 마을 근처 벨리 롬 강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