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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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후편 (1930)

파일:아리랑후편(조선일보1930-02-13).jpg
파일:아리랑후편(단성사 주보 359호).jpg

감독
이구영
각본
나운규, 이구영
제작
박정현
기획
이구영
주연
나운규, 윤봉춘, 임송서, 김보신
촬영
이명우
편집
이명우
제작사
원방각프로덕션
개봉일
1930년 2월 13일
개봉관
단성사

파일:아리랑후편(매일신보1930-02-11).jpg
[1]
파일:아리랑후편(중외일보1930-02-08).jpg
[2]

1. 개요
2. 줄거리



1. 개요[편집]


나운규의 《아리랑》 후속편이다. 《아리랑》의 이후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구영이 연출하고, 영진 역은 1편에 이어 나운규가 연기했다.

이구영(1901~1973)은 《장화홍련전》(1924)의 각본가로 영화계에 데뷔했는데 장화홍련전의 성공으로 고려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쌍옥루》(1925), 《낙화유수》(1927) 등을 제작·연출했다. 광복 후에는 《의사 안중근》(1946)와 《삼일혁명기》(1947)을 연출했다.

흥행 성적은 좋았으나 1편에 비해 부실하다는 비평을 받았다. 4개월 간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조선에서 처음으로 배광기(配光機)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필름은 현재 사라진 상태이다.

2. 줄거리[편집]


영진은 정신 이상으로 말미암아 16명이나 살해를 하고 곧 경찰에 체포되어 장구한 시일을 옥중에서 신음하다 결국 정신상실증의 범죄란 명칭 아래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부친과 누이 동생 영희는 3백원의 빚으로 말미암아 정처없는 길을 밟게 되었다. 영진은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 근 1년이란 세월을 행방 없이 떠돌아 다녔으니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농민대표 천상민은 소위 살인범 최영진을 영구히 그 향리에서 축출하려고 하다가 영진의 날카로운 낫으로 바야흐로 생명이 위험할 때 박 선생님의 애절한 교훈으로 말미암아 다시 아리랑 고개를 넘게 되었다. 홀연히 어느 날 기차 안에서 그의 자태가 나타난다. 유치장에서 같이 있던 미친 노인의 딸 해신이라는 여자와 알게 되어 해신의 백부의 집 재생원에 몸을 붙이고 낮에는 철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틈 있는 동안에는 원장의 아들 귀남을 교육시키고 아버지와 영희를 찾기에 힘썼다. 그리고 천상민의 양자 천재만의 방탕한 행동과 현구의 영진 구명운동... 즉 천재만은 재생원 원장 최 박사를 이용하려다가 뜻을 같이 하지 아니하매 형사에게 해신을 살인범 이상의 대적이라고 하여 체포케 하였다. 그리고 현구도 영진이가 확실히 정신병자인 것을 당국에 표시하기 위하여 향리 사람들에게 도장을 받으러 돌아 다니다가 영진이가 갇혔던 경찰서에도 가 보았으나 벌써 석방되었다고 하므로 할 수 없이 발을 돌리어 어느날 동리에 와 있다가 전염병의 준동으로 말미암아 우연히 영희를 만나게 되어 같이 있게 되었다. 영진은 해신이가 경찰에게 체포된 것은 재만의 소행인 것을 알고 격분하여 그와 싸우다가 재만의 실수로 도끼로 자기 가슴을 맞아 즉사하게 되자 뒤에서는 경관이 따라와서 영진을 잡으려 할 때에 길에서 귀남이를 만나가지고 피하는 곳이 마침 영희 집이었다. 그리하여 부친과 영희와 현구를 만났으나 다시 범인이 되어 지붕에 뛰어 올라가서 헛소리를 하다가 결국에는 또 다시 경관의 손에 체포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일보 1930년 2월 20일)

[1] 매일신보 1930년 2월 11일.[2] 중외일보 1930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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