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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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문신. 는 한지(漢之). 는 기재(企齋)·낙봉(駱峰)·청성동주(靑城洞主).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고령(高靈).


2. 생애[편집]


신광한(申光漢)은 1484년(성종 15) 7월에 태어났으며, 영의정을 지낸 보한재 신숙주의 손자이다. 신광한의 아버지는 신형, 어머니는 정부(鄭溥)의 딸이며, 예조참판을 지낸 신종호, 좌의정을 지낸 신용개와는 사촌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중종 5)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승문원권지에 등용되었다가 승문원 부정자, 홍문관 정자를 거쳐 1513년(중종 8) 승문원 박사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정언, 승문원 교리, 호조좌랑, 공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17년(중종 12) 4월에 사헌부 지평으로 제수되어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여 중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7월에 공조정랑, 8월에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1519년(중종 14) 2월에 이조참의를 거쳐 6월에 도승지에 제수되었는데, 홍경주(洪景舟)와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사류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신광한에게도 화가 미쳐 조광조의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1522년(중종 17) 모친상을 당하여 고양에서 시묘살이 3년을 지내고, 여주 원형리로 내려갔다. 1538년(중종 33) 윤인경(尹仁鏡)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자 신광한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대사간을 거쳐 1540년(중종 35)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어 관리들의 기강을 엄히 하였다.

1542년(중종 37) 형조참판 겸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에 제수되었고,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듬해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544년(중종 39) 1월에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8월에 홍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1545)하자 신광한은 우참찬에 제수되었으며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소윤(小尹)에 가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의정부 우참찬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좌참찬,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1548년(명종 3)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1550년(명종 5) 좌찬성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54년(명종 9) 2월에 병으로 사직하니 7월에 삼정승의 진언으로 명종이 특별히 신광한에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더하여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진봉하고, 경연사를 겸하게 하였다.

1555년(명종 10)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는 학도들이 신광한에게 운집하였다. 또한, 청렴하여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遺逸: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학덕이 높은 선비)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와 한유(韓愈)를 기준으로 했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 저서로 기재집(企齋集), 기재기이(企齋記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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