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네마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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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테판 네마니치.jpg
이름
스테판 네마니치
(영어: Stefan Nemanjić, 세르비아어:Стефан Немањић)
별명
프르보벤차니(Prvovenčani: 왕관을 처음 쓴 자)
출생
1165년
사망
1228년 9월 24일
직위
세르비아 국왕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세르비아 왕국의 초대 국왕.


2. 생애[편집]


1165년경 토플리차, 이바르, 라시나, 레케를 다스리는 영주로 활동하던 스테판 네마냐와 아나스타시야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으로 부칸이 있었고, 동생으로 라스트코를 두었다. 부친이 타호미르를 물리치고 세르비아 대공이 된 후 세르비아 전역을 통합한 뒤, 큰형 부칸은 제타와 주변 영지들을 통치했고 라스트코는 훔을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별도로 영지를 받지 않았고 1191년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와 결혼한 뒤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를 받고 후계자로 공인받았다.

1196년, 네마냐는 라스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은퇴한 뒤 수도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대공 직위를 차남 네마니치에게 넘기겠다고 밝혔다. 네마냐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수도원 서약을 한 뒤 '시메온'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그가 큰아들 부칸이 아닌 차남 네마니치를 선택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칸이 가톨릭 신자였던 점이 걸림돌로 작용했고, 네마니치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딸과 결혼한 게 중요하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칸은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했고, 자신을 두클라의 왕으로 자칭했다.

1199년 네마냐가 사망하자, 부칸은 동생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헝가리 국왕 임레와 연합하였고, 교황에게 세르비아를 가톨릭에 봉헌하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두클라에 사절 2명을 보냈지만, 네마니치에게도 사절을 보냈다. 네마니치는 형과 교황의 동맹을 두려워해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세르비아에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201년 아내 에우도키아가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버림으로써, 동로마 제국을 이단으로 여기던 교황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다.

1202년, 부칸은 임레 왕의 지원에 힘입어 정변을 일으켰다. 네마니치는 불가리아로 도주하였고, 부칸이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다. 부칸은 헝가리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임레는 모라바 동쪽 지역을 헝가리 영토로 삼고, 칭호에 "세르비아의 왕"을 추가했다. 그러나 1203년 불가리아 군주 칼로얀의 사주를 받은 쿠만족이 세르비아를 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칼로얀은 이틈을 타 그해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1204년 네마니치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라쉬카에서 부칸을 축출하고 세르비아 대공으로 복위하였고, 부칸은 제타로 밀려났다.

1205-06년 겨울 또는 1206-07년 겨울, 네마냐의 셋째 아들이며 이 당시엔 수도자가 되어 '사바' 주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라스트코가 아토스 산에서 포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서 두 형을 중재해 화해시키고, 아버지의 유해를 스투데니카 수도원으로 옮겼다. 네마니치는 라스트코에게 세르비아에 남아서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라스트코는 이에 따라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목회 활동을 수행하였다. 1208년 부칸이 제타의 왕으로 등극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1209년 또는 그 직후에 사망하고 조르제가 그 뒤를 이었다.

1207년 10월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이 테살로니카 공성전을 벌이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보릴이 새 차르가 되었다. 보릴의 친동생 스테츠는 이에 불복하여 세르비아로 피신했다. 보릴은 스테츠를 불가리아로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네마니치는 거부하고 스테츠에게 프로세크 요새 수비를 맡겼다. 1208년 7월 8일 보릴이 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라틴 제국 황제 앙리에게 참패하자,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서 수트루마와 바르다르 강 사이의 땅을 점령한 뒤 스테츠에게 점령지를 다스릴 권한을 넘겨주면서도, 세르비아군을 그곳에 남겨뒀다.

이 무렵, 스테판 네마냐의 셋째 형이자 훔의 영주였던 미로슬라프가 사망했다. 안드레아 마로사블예비치가 뒤이어 통치자가 되었지만, 훔 귀족들은 그의 형제 페타르를 훔의 공작으로 추대하여 안드레아를 추방하였다. 안드레아는 네마니치의 궁정에서 숨어지냈고, 네마니치는 전쟁을 일으켜 페터르를 격파하고 훔과 포포브를 공략했다. 페터르는 헝가리로 달아난 뒤, 안드라시 2세가 점령한 네레트바의 서북부를 통치했다. 네마니치는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를 훔 공작으로 삼았고, 안드레아에게는 스토네를 포함한 훔의 해안지대와 포포보 지역을 줬다.

1208년, 부칸의 아들 조르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그들의 힘을 빌러 네마니치를 물리치려 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또 다른 봉신인 디미트리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베네치아에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네마니치는 이에 대항하고자 딸 콤네나를 디미트리와 결혼하였다. 1214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초대 데스포티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크루자를 공략하고 디미트리가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콤네나는 미하일을 대신하여 크루자를 다스린 그레고리오스 카모나스와 결혼했다. 1216년 조르제가 사망하면서 제타는 다시 네마니치의 수중에 들어갔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제타를 공략하려 시도했지만 격파되었고, 네마니치는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에게 제타를 영지로 넘겨줬다.

1214년 말 또는 1215년 초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암살당했고,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피로스의 새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네마니치는 아들 라도슬라프와 테오도로스의 딸 안나 두케나 앙겔리나의 결혼을 성사시켜서, 세르비아와 이피로스의 전쟁을 종식했다. 1217년 로마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왕관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그는 왕관을 첫번째로 쓴 자라는 뜻의 '프르보벤차니(Prvovenčani)'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호노리오 3세는 세르비아를 가톨릭화 하려고 왕관을 보냈고, 네마니치 역시 가톨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동생 사바 주교의 포교로 정교회를 신봉하게 된 백성들이 워낙 많아서, 교황의 의도와는 달리 정교회를 끝까지 거부하지 않았다.

1219년, 사바 주교가 세르비아의 첫 헌법인 '성 사바의 노모카논'을 발표했다. 이 법은 로마법에 기초한 민법과 세계 공의회에 기초한 교회법의 모음집이었다. 세르비아 왕국의 첫 성문법으로, 교회와 정부의 역할과 규례를 다루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세르비아 교회가 불가리아의 오흐리드 대주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대교구로 격상되었고, 사바가 초대 세르비아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미혼자들의 결혼을 장려했으며, 세르비아 각지를 계속 여행하며 백성에게 글을 가르쳤고,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를 축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는 네마니치가 세르비아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했다. 헝가리 왕이 지금껏 세르비아의 왕을 자처했고, 세르비아 대공은 헝가리의 봉신 노릇을 하였는데, 이제는 자신과 대등하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지만, 곧 십자군 원정으로 병력을 소진했기에 가까운 시일에 전쟁을 벌일 여력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네마니치가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의하자, 언드라시 2세는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세르비아가 헝가리로부터 빼앗긴 영역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국왕 등극을 인정하였다.

네마니치는 말년에 중병에 걸리자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원에 들어가 '시메온'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고,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에게 나라를 맡겼다. 1228년 9월 24일 성 베드로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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