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라도슬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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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테판 라도슬라프.jpg
이름
스테판 라도슬라프
(영어: Stefan Radoslav, 세르비아어: Стефан Радослав)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세르비아 국왕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세르비아 왕국의 2대 국왕.


2. 생애[편집]


스테판 네마니치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프레디슬라프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콤네나가 있었다. 네마니치는 1201년 아내 에우도키아가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해버리고, 엔리코 단돌로의 손녀 안나 단돌로와 재혼해 3명의 아들(성 사바 2세,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스테판 우로시 1세)을 낳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추방이 그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히지는 않았다. 1207년경 페터르를 격파하고 훔을 공략한 부친에 의해 훔 공작에 임명되었고, 1216년 제타의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2대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딸 안나 두케나 앙겔리나와 결혼했다.

1228년 중병에 걸린 부친이 수도원에 들어가 '시메온'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된 뒤, 세르비아의 새 국왕에 즉위했다. 그는 무척 유약한 성격이라서 아내 안나와 장인 테오도로스에게 의존을 많이 했고, 국가의 정책을 이피로스에 유리한 방향으로 적용했다고 한다. 이 당시 주조된 그의 동전에는 '스테파노스 두카스(Στέφανος Δούκας)'라는 그리스식 이름이 사용되기도 했다. 귀족들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당시 이피로스의 위세가 대단했기에 감히 반기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1230년 4월, 테오도로스가 8만 대군을 일으켜 불가리아 제2제국으로 쳐들어갔다가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이반 아센 2세의 수천 기병대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혀 실명형헤 처해진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이피로스는 급격히 쇠락하였고, 장인에게 의존하던 라도슬라프의 입지 역시 약화되었다.

1233년 가을,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 귀족들은 스테판 블라디슬라프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라도슬라프는 급히 세르비아를 탈출하여 두브로브니크로 피신하였다. 그는 라구사에게 무역 특권을 줄 테니 복위를 도와달라고 청했지만, 블라디슬라프의 협박을 받은 라구사 측이 거절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세르비아 대주교이자 라도슬라프의 삼촌인 사바 대주교가 직접 나서 중재하였고, 그 결과 블라디슬라프가 이반 아센 2세의 딸과 결혼하고, 라도슬라프는 복위를 다시는 노리지 않고 수도자로 여생을 보내는 조건으로 세르비아에 돌아오는 걸 허락받았다. 사바는 돌아온 라도슬라프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고 그에게 요반이라는 수도명을 부여했다. 라도슬라프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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