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레이만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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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큰 앗 딘 술레이만 샤
페르시아어, 아랍어 : ركن الدين سليمان شاه
터키어 II. Rükneddin Süleyman Şah

재위 1196년 ~ 1204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룸 술탄국의 7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하여 술탄이 되었다. 1200년 무렵 내전이 마무리된 후, 쉴레이만샤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쇠퇴하던 살투크 왕조를 병합하였다. 하지만 이로써 국경을 접하게 된 전성기의 조지아 왕국과의 바시아니 전투에서는 패배하였고, 이후 재차 조지아를 공격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2. 생애[편집]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차남으로, 토카트를 영지로 받았다. 1192년 케이휘스레브 1세가 즉위한 후로도 그의 형제들은 영지를 반납하지 않고 경쟁을 이어갔는데, 쉴레이만샤는 형 멜리크샤가 사망한 후 형의 영지인 시바스카이세리 일대를 접수하며 단숨에 성장하였다. 뒤이어 동생들로부터 니크사르, 아마시아, 앙카라 등을 점령 혹은 복속시킨 쉴레이만샤는 악사라이에 대군을 모은 후 콘야를 포위하였다.

포위가 장기화되자 성내의 귀족들은 쉴레이만샤에게 철수한다면 원정 비용을 내주겠다며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하였다. 역으로 쉴레이만샤는 케이휘스레브가 도시를 떠난다면 그의 자녀들, 재산, 일행에 대한 안전을 보장할 것이고 거취의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1] 이를 수용한 케이휘스레브는 항복 문서에 서명한 후, 그날 밤 콘야를 떠났다. 뒤이어 쉴레이만샤는 칼리파 알 나시르의 책봉과 함께 술탄에 즉위하였다.

정당성 확보를 위해 쉴레이만샤는 대외 원정에 착수하였다. 우선 1199년, 내전 도중 룸 셀주크를 침공했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에 대한 보복 원정을 가하여 실지를 회복하였고 1200년 6월에는 자신에 복속하지 않은 동생 케이세르 샤의 영지인 말라티아를 점령하였다. 이에 하르푸트아르투크 왕조가 복속해왔다. 다만 마지막까지 복속하지 않은 동생 마수드의 앙카라에 대한 포위는 장장 3년이나 걸렸고, 결국 마수드는 변방의 요새를 영지로 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는데 후환을 우려한 쉴레이만샤는 약속을 어기고 앙카라를 떠나던 그를 살해하였다. 이러한 내전 때문에 동로마 제국삼순으로 향하던 셀주크 선박들을 약탈했음에도 쉴레이만샤는 보복하는 대신 외교를 통해 평화 조약을 맺는 것에 그쳤다.

내부를 안정시킨 그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조지아 왕국의 위협을 받던 에르주룸을 점령, 살투크 왕조를 병합하였다. (1202년) 이로써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에 대한 룸 셀주크의 패권은 더욱 공고해졌다. 자신감을 얻은 쉴레이만샤는 조지아 여왕 타마르를 조롱하며 더욱 동진하였는데, 만지케르트 부근에 주둔하던 중 조지아 군대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응전하던 쉴레이만샤의 말이 넘어지며 그는 낙마하였고, 이를 술탄이 전사한 것이라 여긴 셀주크 군은 혼란에 빠져 패주하였다. (1203년, 바시아니 전투)[2] 기사회생한 쉴레이만샤는 에르주룸을 거쳐 콘야로 철수하였다. 1204년, 조지아에 대한 보복 원정에 나서던 쉴레이만샤는 도중 병사하였다. 사후 어린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 3세가 계승했으나, 곧 동생 케이휘스레브가 돌아와 복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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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속대로 후일 쉴레이만샤는 조카인 이젯틴과 알라에틴에게 의사를 묻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친과 합류할 수 있게 해주었다[2] 이때 에르진잔의 멩귀췩 베이 바흐람샤가 사로잡혔다가 배상금을 내고 풀려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