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촌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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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460호
공주 수촌리 고분군
公州 水村里 古墳群
Ancient Tombs in Suchon-ri, G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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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201 외 일원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면적
337,865.1㎡
지정연도
2005년 3월 3일
제작시기
청동기시대~통일신라시대
위치




파일:11624321.jpg

수촌리 고분군의 전경

1. 개요
2. 위치
3. 특징
4. 역사
5. 출토유물
6. 조사내용 및 주요고분
6.1. 1호분
6.2. 2호분
6.3. 3호분
6.4. 4호분
6.5. 5호분
7. 의의
8. 여담
9. 외부 링크
10. 사적 제460호



1. 개요[편집]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 소재하는 고분군이다. 한성백제 시절 공주지역 지배층들의 묘역으로 2005년 사적 제460호에 지정되었다.


2. 위치[편집]


수촌리 고분군은 공주시 북쪽에 위치한다. 더 세부적으로 보자면 천태산에서 서쪽으로 늘어진 작은 능선 말단에 있는 높이 50m 내외의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평지에 조성되었다. 의당천과 정안천이 고분군을 사이에 두고 합류하여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고분군의 지대가 주변에 비해 높은 편이라 조망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3. 특징[편집]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발굴성과라 일컬어질 정도로 급이 높은 유물들이 대거 쏟아졌다.

또한 수촌리 고분군은 토광묘, 석곽묘, 석실분 등의 다양한 묘제가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한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그동안 백제의 고분군으로 알려진 다른 고분군들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라고 한다.

당시 발굴을 진행했던 학자들에 의하면 웅진 지역의 토착 세력가이자 문주왕의 웅진 천도 이후 두각을 나타낸 백씨 가문의 무덤군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한다고 한다. [1]

수촌리 4호분과 5호분에선 각각 반으로 쪼개진 대롱옥[2]이 발견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둘을 맞춰보자 하나로 딱 맞아떨어졌는데 학자들은 4호분과 5호분이 서로 부부 사이이고 내세에서도 부부의 정을 간직하고자 했을거라고 이런 부장품을 넣었을거라고 추정한다. 부부사이 금슬이 좋았나보다


4. 역사[편집]


원래 주변에 알려져 있던 유적은 아니었고 공주 의당농공단지 조성 예정부지에서 지표조사를 하던 도중 우연히 유적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상당히 뒤늦게 실시한 구제발굴인데다가 도굴 흔적도 있어서 발굴에 참여한 학자들은 유적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막상 조사를 시작하자 기존 백제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의 유물이 쏟아졌다.

현재 발굴조사가 어느정도 마무리되고 발굴된 고분들이 있는 곳은 공원으로 정비되어서 방문객을 맞고있다. 발굴된 유물은 전부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유적이 구릉지대에 있어 경관은 나름 괜찮은 편이다.[3]


5. 출토유물[편집]


파일:금동관모_1.jpg
수촌리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그 복원품

파일:수촌리_금동신발_21.jpg
수촌리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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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중국제 도자기 흑유계수호

한성백제 시대 중앙에서 지방의 유력한 귀족에게 하사하던 금동관모 2점이 가장 유명한 유물이다. 그 외에도 금동신발, 중국제 흑갈유 도자기, 금동과대, 환두대도, 각종 마구류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6. 조사내용 및 주요고분[편집]


파일:z2_cp07020107000.jpg
수촌리 고분 발굴 당시의 모습

6.1. 1호분[편집]


무덤의 주인은 금동관, 금동신발, 금동귀걸이 등을 착용한 채로 발굴되었다. 허리에는 용문양이 은상감된 환두대도를 차고 있었으며, 발치에는 당대로선 최고급 도자기인 중국제 청자유개사이호 1점이 놓여 있었다. 부장품으로 미루어보아 매우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2호분 매장자의 남편으로 추정된다.

6.2. 2호분[편집]


1호분에서 나온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과, 대신 금제귀걸이과 청옥, 대롱옥, 굽은옥 등 여러 형태의 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출토되었다는것이 특징이다. 매장자의 머리가 놓여 있던 곳에서는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호박색 구슬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1호분 매장자의 아내로 추정된다.

6.3. 3호분[편집]


3호분 내에선 금동신발, 철제대도, 철모, 화살촉 등의 철기류 및 다양한 종류의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말을 탈 때 사용하는 발걸이인 '호등'이 나왔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6.4. 4호분[편집]


4호분은 규모가 큰 편이고 선행조사된 5기 가운데 부장품이 가장 화려했다.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있고, 허리에는 은장식대도를 차고 있어, 한 지역을 대표하는 수장층이 갖고 있어야 할 필수품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최고급 중국제 도자기인 흑유계수호를 비롯한 4점의 중국제 자기, 각종 마구류와 철모,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크기와 출토유물로 보아 수촌리 고분군 중 최고위에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5. 5호분[편집]


4호분과 가까이 있으나 좀 더 낮은 곳에 있다. 수촌리 고분들 가운데 가장 거대했기에, 발굴 당시 학자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기대와 달리 1쌍의 금제귀걸이, 대롱옥, 그리고 등자와 재갈, 철모 등의 철기류, 삼발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류가 주를 이루었다.

7. 의의[편집]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가치가 무척 크다. 특히 출토된 부장품은 피장자들의 신분이 한성백제 시절 공주지역의 유력한 귀족층이였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제사관련 유물을 통해 한성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출토된 부장품들의 질과 량이 대단하기 때문에 한성백제 시대 웅진 지배계층의 위세를 가늠하기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8. 여담[편집]


  • 수촌리 고분군을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확장 등재하는 사업이 추진 중이다. 현재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한성백제 시대의 유적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 고분군이 공원으로 정비된 후 발굴조사 체험장이 들어섰는데 이용하기 위해선 공주시 문화재과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연락을 취해 사전에 예약해야한다.

  • 고분군 근처에 있던 민가를 그대로 사용하는 듯한 안내소 겸 역사교육관이 운영중인데 문화재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으므로 원한다면 유적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도 있다.[4]


9. 외부 링크[편집]




10. 사적 제460호[편집]


공주수촌리고분군은 공주 의당농공단지 조성 예정부지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현재 공주사와 문화재청은 유적의 역사적 가치와 성격을 규명하기 위하여 연차별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백제시대 분묘(대형토광목곽묘,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등 고대의 다양한 시기의 유물과 유구가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토광묘에서는 세형동검과 검파두식(검자루끝장식) 등 다양한 청동제품이 출토되었다. 또한 점토대토기(점토띠토기), 흑고장경호 등 토기가 매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물도 발견되어 초기철기시대 묘제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백제시대 분묘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제이식, 환두대고(고리자루 큰칼), 중국제 흑유도기, 흑유 계수호(닭버리 모양 주전자)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분묘는 공주지역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로서 출토된 유물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조영된 것으로 짐작되어 가치가 크다. 특히 발견된 부장유물은 피장자의 신분이 당시 공주지역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이며, 이들 제사관련 자료를 통해 한성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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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수촌리 고분군이 백씨들의 무덤이 맞다면 부장품의 격을 미루어보아 웅진천도 이전부터 남부럽지 않은 권세가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2] 대롱모양의 옥구슬[3]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4] 조만간 안내소가 폐쇄되고 방문자센터가 새로 들어올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