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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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0068991_4befc2c0160a2.jpg
width=100%]]| 신라 환두대도 레플리카
1. 개요
2. 명칭
3. 상세
4. 역사
5. 종류와 분류
5.1. 소환두대도
5.2. 이엽, 삼엽문 환두대도
5.3. 삼루문 환두대도
5.4. 용봉문 환두대도
6. 유물 사진
7.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환두대도
8. 미디어에서의 환두대도
9. 기타
10. 관련 항목


고리칼, 고리자루칼, 고리자루큰칼, 환두대도(環頭大刀), 횡도(橫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리칼)

1. 개요[편집]


한반도를 비롯한 고대 동아시아에서 흔히 사용한 무기로, 자루머리에 고리 모양 장식이 있는 외날 도검을 '전부' 이르는 명칭이다.[1][2]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군사 도검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약간씩 형태 변화는 있었더라도 원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폭 넓게 주력으로 사용하였으며, 칼날 휨을 추가한 환도를 주로 사용한 조선시대 때도 여전히 이와 비슷한 장도는 존재했다.

2. 명칭[편집]


환두대도란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만든 용어로, 칼자루의 끝에 고리 모양 장식이 달린 큰 칼이란 뜻이다. 순우리말 표현으로 '고리자루큰칼', '고리칼', '고리자루칼'라고도 하나 이들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쓰인 말은 아니고 환두대도를 번역한 말이다. 대개 환두대도로 부른다.

일본의 고서에는 다른 표현도 있다.

백제국의 임금 조고왕(照古王)이 숫말 한 필과 암말 한 필을 아지길사(阿知吉師)[3]

에게 바쳤다. 또한 횡도(橫刀)[4] 및 대경(大鏡)을 바쳤다. 또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으면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명을 받고 바친 사람의 이름은 화이길사(和邇吉師)이다. 즉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합쳐 11권을 이 사람에게 보내 바쳤다.

고사기오진 덴노

백제를 하대하는 듯한 말투로 쓰였으나 실제로는 이런 내용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는 의도적인 왜곡이 꽤 포함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의 진보장(AD 755년)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정창원에 모두 100자루의 대도(大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정창원 소장품은 모두 55자루이며 이 중 진보장에 기록된 것은 단 1자루뿐이다. 나머지는 언제 정창원에 입고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도검의 명칭도 명치(明治) 때 정해진 것이다. 진보장의 대도 100자루는 당대도(唐大刀) 13자루, 당양대도(唐樣大刀) 6자루, 고려양대도(高麗樣大刀) 2자루, 흑작대도(黑作大刀) 41자루 등인데, 거의 모두가 금은으로 장식된 뛰어난 예술품이다. 특기할 것은 칼집에 달린 염색된 가죽끈은 당시 일본에서는 만들 수 없었던 것이며 칼을 넣어 둔 주머니가 거의 모두 고려금(高麗錦)이란 것이다.

검도역사의 중세~대한검도회


이런 기록들을 보아 옛 일본에서 환두대도를 일반적으로 횡도(橫刀)[5]라고 불렀고, 고구려의 것은 따로 맥검(貊劍)[6] 또는 고려양대도(高麗樣大刀)라고 불렀다는 점도 알 수 있다.[7] 여기서 樣이란 한자는 양식이란 뜻이다. 고려양대도라고 하면 고구려(고려) 양식 큰 칼이란 뜻.


3. 상세[편집]


환두대도를 묘사한 그림이나 몇몇 유물을 보면 곡도처럼 휜 칼날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직도였다. 칼날 단면은 삼각형이 많다고 한다. 다만 비슷한 시기 중국이나 일본에서 단면이 오각형인 환두대도들이 발견되었고, 환도 역시 단면이 오각형인 경우가 많은 만큼 한국에서 사용된 환두대도 역시 심국시대 후반 정도에는 오각형 등의 단면들이 존재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삼국시대 후기로 갈 수록 유물량이 적고, 실제 환두대도 유물에 대한 실측 조사 등이 부족하여 아쉽게도 이를 확실히 알긴 어렵다.

칼날의 길이는 40cm의 짧은 것부터 100cm에 이르는 대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50cm~70cm 정도의 범위에 주로 분포하여 있고, 칼자루도 한손검 정도의 길이가 많았다. 다만 동시에 두 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있는 규격의 칼들도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물들을 보면 날 길이 60~70cm 정도에 칼자루 길이가 20cm 초반 정도인 칼들이 꽤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 권장된 환도의 규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규격이다.[8] 마찬가지로 벽화나 조각에서도 쌍수 파지가 가능한 길이의 칼들이 종종 묘사된다.[9] 게다가 김해 양동리 고분군의 철검은 전장 120cm로 후대의 쌍수도에 비견될 만한 길이를 자랑하며, 말고도 비슷한 규격의 대형 검들이 소수 출토된다. 따라서 환두대도는 조선 후기 환도가 그랬던 것처럼, 한손검과 양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한손반검 정도의 칼을 주로 혼용했으며, 개인에 따라 종종 더 큰 칼 역시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삼국시대 후반부터는 묘제의 방식이 바뀌는 등의 이유들로 출토 도검의 숫자, 벽화 등이 줄어들어 자세히 확인하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코등이(방패)는 대부분 없지만 후기 유물에서는 작은 코등이가 달린 것들도 나온다.[10] 칼자루 밑 고리는 장식이기도 하면서 고리에 끈을 매어 손목에 고정한 뒤 싸우다가 칼을 놓치더라도 바로 다시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주로 방패병이 주무장으로 썼고[11] 창병, 궁병, 기병이 호신용, 백병전용으로 차는 등 후대의 환도를 비롯한 보편적인 도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4. 역사[편집]



기원전 2세기 사르마티아 도검

후한 시대의 환수도

이전까지는 환두대도 양식이 중국 한나라의 환수도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엄밀히는 유목민족사르마티아의 고리 달린 칼이 시베리아중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비슷하게 유목민족이던 스키타이나 사르마티아의 도검 유물 중에서 고리 달린 형태가 적잖게 나오며 부여의 동병철검의 경우 양식이 아주 다양한데 고리 장식 형태도 극히 일부 발견되긴 했다. 다만 중국에선 검이 아닌 도의 형태가 널리 쓰였고 이러한 중국식 환수도가 낙랑군 등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줘 주류 양식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말엽부터 당나라 때까지 주류를 이룬 군도(軍刀)였다. 한국에서는 원삼국시대를 시작으로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폭넓은 시대에서 사용한다. 일본으로는 고분 시대 때 한반도와 교역하면서 환두대도 양식이 전해졌으며 후대에 당태도(唐太刀)에서 유래하는 일본도(카타나) 양식이 나타나기 전까지 주된 도검으로 썼다.

한반도의 경우 6세기 즈음 부터 칼코등이가 달리고 환두가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고려시대 때 심부대도가 되고, 이후의 환도로 이어진다. [12]

파일:external/res.heraldm.com/20140211000655_0.jpg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또는 신라 사신. 허리에 패용 고리를 이용해서 찬 환두대도가 보인다.

삼한을 통틀어서 출토한 횡도 유물들은 대부분 장식이 단순하고 전투에서 주로 사용하는 실전무기 양식과 가까웠지만, 갈수록 이런저런 장식들이 붙으면서 소유자의 신분과 지위를 함께 상징하는 면이 커졌다. 특히나 , 봉황 등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것들은 왕족 같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었는데, 이는 병권(兵權)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5. 종류와 분류[편집]


그림으로 보는 환두대도
환두대도 패용법

지금까지 출토한 횡도 유물들 중 초기 것은 대부분 소 형식이다. 시대가 흐를수록 장식성을 더해 이엽, 삼엽 형식이 등장하고 점차 화려해지면서 삼루, 용봉, 쌍용 형식이 나온다.

횡도의 고리 장식과 삼국시대의 군제(軍制, 군사제도)를 연결지어 연구한 사례가 있다. 일단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신라의 군제를 기준으로 추측했을 때는 아래와 같다. 출처

(유물 출토지가 불명확하거나 고분 피장자(무덤 주인) 정보 부족 등 아직 역사적인 고증을 정확하게 거쳐 확정한 분류는 아니기 때문에 삼국별, 시대별, 학자별 분류 기준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소(素): 화민(火民)
아무런 장식 없이 둥근 고리만 있는 가장 기본 형태.

  • 삼엽(銀三葉): 소감(少監)[13]

  • 삼엽(金三葉): 제감(第監)
파일:삼엽문양 비교.jpg
'삼엽(三葉)'이란 말은 '세 이파리'란 뜻이지만 이는 학계에서 임의로 붙인 명칭이며, 원래 모양만 놓고 봤을 때는 '날아오르는 새'를 본 뜬 게 아닐까 추측하는 의견이 있다.부르봉 왕가
파일:014_032_01.jpg 파일:평양 삼석구역 개마총 무사들.jpg
파일:52529f5e024a7d860143.jpg
고구려 벽화에서는 횡도를 마치 의장용으로 사용하는 듯이 고리가 위쪽으로 오게 하여 정중히 짚고 있거나 들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럴 경우 정말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 모양 처럼 보이기도 한다.[14]

  • 삼루(三累): 대관대감(大官大監)[15]
C를 3개 붙여놓은 모양. 유물 대부분이 신라에서 나왔다고 한다.

  • 용봉(龍鳳)[16]: 장군(將軍)
용과 봉황을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다. 백제 무령왕의 것도 이것이며 무령왕릉 발굴 때 왕의 왼쪽 허리춤에서 발견하였다.
해당 분류는 신라를 기준으로 '추정\'한 것이기 때문에 백제, 고구려, 가야에서는 상징 계급 기준이 일부 다를 수도 있다.

  • 쌍룡(雙龍), 쌍봉(雙鳳): ? (추정)
용과 봉황이 서로 휘감고 있는 모습이다. 환두대도(보물 제776호) 처럼 신라 유물로 나온게 있고 이 외에도 몇 개가 더 있는데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들이라 어디서 나온 건지 출토지가 죄다 불명이다.

이렇게 횡도는 피장자의 몸, 그것도 허리춤 부근에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에 무덤 주인이 생전·생후에 직접 소지한 무기신분 증명서라고도 볼 수 있다.


5.1. 소환두대도[편집]


'민무늬 둥근머리 큰 칼'이라고도 한다. 자루머리의 고리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대도이다. 소환두대도는 출현기부터 길이가 90cm 내외인 대도였고, 고리부터 칼날까지 일체로 제작한게 특징이다. 손잡이로 만들 부분에는 천이나 가죽끈으로 감쌌던 것으로 보인다.

소환두대도는 칼몸체가 일직선을 이루는 직도가 대부분이지만, 4세기 초에는 칼몸체가 칼날 방향으로 약간 안으로 굽고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또한 칼자루 속으로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인 슴베가 칼몸체와 각을 이루면서 안으로 꺾인다. 이는 이나 쿠크리처럼 베는 효과를 증대시키기 위함인 듯하다.


5.2. 이엽, 삼엽문 환두대도[편집]


이엽, 삼엽문 환두대도는 고리 안에서 뻗어나온 부르봉 왕가 백합 무늬와 닮은 이파리 2개, 이파리 3개 금속제 장식 문양이 있는 대도이다. 특히 삼엽문(三葉文) 환두대도는 삼국시대 지역 골고루 발견되지만 가야 지역에서 대량으로 출토하였다.

삼엽문(三葉文)이라 해서 나무 등의 식물 이파리 세 개를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이 보니 모양이 이파리 같아서 편의상 그렇게 명명했을 뿐, 정말로 이파리를 형상화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인동초 문양이라고 하는 한국의 삼국시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러한 문양 요소를 가미한 금속공예품들이 많이 있긴 하였다. 그런 시대적인 디자인적 유행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은 있다.

방형계 삼엽문 환두대도는 모두 신라 지역에서만 출토하여 신라 삼엽문 환두대도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백제 지역에서는 아직 이런 환두대도가 출토하지 않았다. 이엽문 환두대도는 중국 한나라 시기 대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5.3. 삼루문 환두대도[편집]


C모양 고리 세 개로 이루어졌다. 경주 대릉원에 소재하는 대형 적석목곽분과 대구달성 고분군 · 경산 임당 고분군 · 창녕 교동 고분군 · 양산 북정리 고분군 · 부산 복천동 고분군신라 지방의 큰 무덤에서 출토된다. 칼자루에는 금동판 또는 은판에 비늘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신라 중앙 정부는 지방의 수장층들을 포섭·지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무늬가 장식된 칼을 하사하고, 지방의 수장층들은 칼을 하사받아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다.


5.4. 용봉문 환두대도[편집]


고리 안에 또는 봉황을 새겼다. 세공이 화려한 칼자루에는 하늘을 나는 용 두 마리가 서로 얽힌 모습을 새겼다. 비늘 무늬가 있다면 은을 상감하여 연꽃무늬·당초무늬·주작무늬 등을 장식했다. 용환두대도는 백제신라의 가장 큰 무덤에서 나온다. 특히 무령왕릉에 부장되었음을 보면 들이 패용했던 칼이었음을 보여준다.

봉황이 한 마리만 있으면 단봉문이라고도 한다. 고령군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한 단봉문 환두대도가 대표적이다.


6. 유물 사진[편집]


파일:대한민국의환두대도.jpg

파일:WRIT0002_267M000183.jpg

파일:984153.gif

대한민국 유물[17]

파일:external/images.metmuseum.org/DT304541.jpg

중국 유물[18]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panese_straight_swords_6th_7th_century_Kofun_period.jpg

일본 유물


7.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환두대도[편집]




8. 미디어에서의 환두대도[편집]


대한민국삼국시대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며, 고구려부여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 바람의 나라에서도 등장한다. 전사의 70레벨 무기로 아주 초창기부터 있어왔던 일명 '깹무기'라 불리는 템. 북방템으로 환두대검-진성검 순으로 강화할 수 있다. 다만 외형은 실제 환두대도와는 전혀 다른 순수 판타지형 검이다.


9. 기타[편집]


머리장식이 고리 모양이 아닌 대도로는 고리 없이 둥글게 생긴 원두대도(圓頭大刀), 네모지게 생긴 방두대도(方頭大刀), 5각형 모양인 규두대도(圭頭大刀) 등이 있다. 규두대도는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분시대에 유행하였던 일본계 유물이기도 한데, 한국에서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규두대도 유물이 확인되어 한일 교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0. 관련 항목[편집]


  • 도검
  • 환도
  • 환검 - 환두대도를 사용하는 현대 창작 검술.
  • 역적전 - 환두대도 4자루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역사소설. 특히 주인공 출랑랑은 옥전고분 출토 유물과 동일한 '봉문도'라는 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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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도, 일본도, 레이피어, 롱소드 같이 세부적으로 나누는 도검 종류가 아니라 조선시대 때 군용 칼이라면 전부 환도라고 불렀듯이 그냥 고리모양 장식이 있는 칼을 모두 폭넓게 부르는 표현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사용한 고리 장식 칼 전부 이렇게 부른다.[2] 그러나 '○두대도'라는 표현은 본디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옛날 그 당시에 사용하던 실제 명칭은 '횡도(橫刀)'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3] 아직기(阿直岐)[4] 일각에서는 칠지도로 비정하기도 한다.[5] 비슷한 명칭으로 고대 동아시아 악기들 중에서 가로로 부는 기다란 목관악기를 '횡적(橫笛)' 또는 '횡취(橫吹)'라고 부른 사례가 있다.[6] 비슷하게 고구려을 당시 중국에서 '맥궁(貊弓)'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나온다.[7] 그러나 '횡도'와 '맥검'이라는 명칭은 출처를 알 수 있는 옛 기록에서 나온 만큼 신빙성이 있지만 '당대도', '당양대도', '고려양대도', '흑작대도' 등의 명칭은 정확한 출처를 알기 어렵다.[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환두대도.@@@ 아쉽게도 칼자루 길이가 측정되어 있지 않지만, 전체 길이와 칼날, 칼자루의 비율을 계산해보면 칼날 길이는 60cm 중후반, 칼자루 길이는 20cm 초반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중 3~5cm 정도가 환두 부분임을 감안해도 충분히 양 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규격이다. 이 세 유물들 말고도 비슷한 규격의 칼들이 꽤 발견된다.[9] 김유신묘십이지상에 조각된 환두대도를 보면 한손용과 함께 경우 양손으로도 잡을 수 있는 길이의 환두대도가 조각되어 있고 당시 사천왕상 등에 조각된 검들 역시 꽤 길이가 되는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또 고구려 감신총 벽화에도 환두대도로 땅을 짚고 서 있는 무사 그림이 그려져 있다.[10]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 속 고구려 사신들이 차고 있는 환두대도에는 코등이가 달려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11] 전한시대 토우나 고구려 벽화에서도 환도를 지닌 병사들은 긴 방패를 같이 지니고 다닌다.[12] 일전에는 몽골의 영향을 받아 곡도가 되었다는 설이 보편적이었지만 러시아 체르냐찌노 발해 고분 유적에서 곡도 유물이 발견되어 몽골 침입 전부터 발해 유민을 통해 곡도를 접했을 가능성도 생겼다.전어도 항목의 2번 문단에서 해당 유물의 사진을 볼 수 있다.[13] 1. 신라 때에, 각 군영(軍營)의 군사를 거느리던 무관 벼슬. 감사지의 다음으로 위계는 대사(大舍) 이하이며 육정(六停), 구서당, 십당, 오주서의 기병이나 보병을 거느렸다. / 2. 신라 때에, 패강진전에 속한 외관(外官) 벼슬. 보감(步監)의 다음으로 위계는 대사 이하이다. <네이버 국어사전>[14] 한반도 국가들을 포함한 북방 민족들이 선사시대부터 를 숭배한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솟대, 조우관, 망새 등에서 이러한 문화가 잘 드러난다.[15] 1. 신라(新羅) 때의 무관(武官)의 벼슬. 진흥왕(眞興王) 10년(549)에 베풀었는데 각 영(營)에 다섯 또는 네 사람씩 도합 62명이 있었음.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의 진골(眞骨)이나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내마(柰麻)까지의 사람으로 시킴. <네이버 한자사전>[16] 1. 봉황을 아울러 이르는 말. / 2. 뛰어난 인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네이버 국어사전>[17] 1번째 사진은 백제신라, 2번째 사진은 가야, 3번째 사진은 고구려 것이다.[18] '环柄长刀' 또는 '环首刀'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