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바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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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하지야 공화국 제2대 대통령
세르게이 바갑시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Багапш | Sergei Bagapsh


본명
세르게이 와슬이파 바갑시[1]
Сергеи Уасыл-иԥа Багаԥшь
출생
1949년 3월 4일
소련 그루지야 SSR 압하스 ASSR 수후미
사망
2011년 5월 29일
러시아 모스크바
재임기간
압하지야 제1부총리
1995년 ~ 1997년 8월 29일
압하지야 총리
1997년 8월 29일 ~ 1999년 12월 20일
압하지야 대통령
2005년 2월 12일 ~ 2011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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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바실리 바갑시
어머니 슈샤나 바갑시
배우자
마리나 쇼니야
자녀
아들 주랍 바갑시
딸 리아나 바갑시
학력
그루지야 아열대농과대학교[1]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세르게이 바갑시는 압하지야의 기업인, 정치인으로, 2대 압하지야 대통령을 지냈다. 압하지야의 영토 확장과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2. 생애[편집]


1949년 수후미에서 태어났다. 그루지야 아열대농과대학교를 졸업하고 1973~1974년 군복무를 했다. 1978년 콤소몰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위원회의 정보 책임자가 되었다. 1980년 압하지야 지역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2년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산당 오참치라 지부 서기장이 되었다. 소련 붕괴 후 기업인으로 전직하였고 모스크바에서 압하지야 분리주의자들을 대표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압하지야 제1부총리를 역임했다. 1997년 4월 29일 압하지야 총리에 임명되었다. 임기 중 1998년 5월 압하지야 동남부 갈리 지구에서 조지아인이 일으킨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1998년 압하지야 전쟁). 이 전쟁으로 조지아인 최소 3만명이 다시 조지아로 도피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국영전기회사 체르노모르에네르고(Черноморэнерго)의 사장을 맡았다.

2004년 10월 3일 치뤄지는 압하지야 대선에 통합 압하지야의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대선 결과를 두고 양측간의 지저분한 분쟁이 2달간 벌어졌는데 압하지야 선관위는 압하지야 국민통합포럼의 후보 라울 하짐바의 승리를 선언했으나 대법원은 바갑시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런데 하짐바의 지지자들이 대법원으로 쳐들어가 판결을 번복하게 만들었다. 대법원은 새로운 선거를 치루겠다고 공표했으나 곧 취소하고 다시 바갑시를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하짐바 지지자들은 국회 건물을 점거했으며 바갑시 지지자들도 지역 TV 방송국과 대통령실을 점령하여 그에 뒤지지 않는 행동을 보였다. 이후 수차례 회담 끝에 기존 선거를 취소하고 새로이 대선을 열되 바갑시와 하짐바 측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출마하기로 합의했다. 재선 결과 바갑시-하짐바 측은 압승을 거뒀고 바갑시는 2005년 2월 12일 드디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내심 강경 친러 후보인 하짐바를 지지했던 러시아는 압하지야로부터 수입을 금지하는 뒤끝을 보여줬다.[2]

대통령 임기 중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이 발발하자 바갑시는 러시아 측으로 참전했다. 이 전쟁으로 압하지야는 코도리 계곡을 모두 병합했다. 전후 압하지야는 러시아의 승인(8월 26일)을 받았으며 곧 친러 국가인 니카라과(9월 5일)와 베네수엘라(9월 10일)의 승인도 받았다. 러시아의 독립 승인 이후 러시아 기업의 대대적인 투자를 받아 압하지야의 경제가 발전했지만, 이는 곧 외국인 투자 문제를 둘러싼 또다른 사회적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9년 12월 12일 대선에 출마했고 여유있는 득표율로 재선되었다(부통령은 아이타이라 소속 알렉산드르 안크바프). 재선된 이후로도 국제사회에서 압하지야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2010년 러시아,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를 방문했다.[3]

2011년 4월 튀르키예 내 압하스인 디아스포라의 초청으로 터키를 개인적으로 방문했다. 이후 폐암이 급격히 악화되어 러시아 모스크바로 보내졌고, 5월 21일 수술을 받았으나 호전되지 못하고 29일 사망했다. 향년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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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압하스어 이름으로, 러시아어 이름은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바갑시(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Багапш)'.[2] 바갑시 반대파는 대선 내내 바갑시를 두고 친조지아 정치인이라고 씹어댔다. 이건 바갑시에게 조금 억울한데 압하지야 전쟁 당시 직접 총들고 싸운건 아니지만 압하지야 반군의 병참에 참여하고 갈리 지구에서 일어난 조지아인의 반란을 분쇄한 것도 바갑시이기 때문이다.[3] 다만 2024년까지도 압하지야의 독립을 승인한 나라는 러시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나우루, 시리아 5개국에 그치고 있다. 나우루는 바갑시의 임기 중인 2009년 12월 15일 승인했고, 시리아는 2018년 5월 29일 승인했다. 나우루가 국제사회에서 표팔이로 먹고사는 나라로 유명하고 시리아는 정부측이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의 도움으로 죽다 살아나서 그 보은으로 압하지야 독립을 승인한 것이니 바갑시의 노력이 성과를 봤다고 보긴 힘들다. 투발루바누아투도 압하지야 독립을 승인한 적이 있지만 곧 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