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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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청년기 시절
1.1. 대학 입학 전
1.2. 대학 시절 및 군복무
2. 동아일보 기자 시절



1. 유년~청년기 시절[편집]



1.1. 대학 입학 전[편집]


1943년 6월 28일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아버지 성태후(成泰侯, 1915. 5. 15 ~ 1980. 12. 16)와 어머니 평산 신씨 신순득(申順得, 1921. 8. 13 ~ )[1] 사이에서 4남 4녀 중 셋째,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리오카(成岡) 다카히코'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아버지는 엉겹결에 그의 이름을 '철수(徹洙)'로 호적에 올렸는데, 어릴 때부터 놀림[2]을 받던 이름이라 대학 졸업 뒤에 '유보(裕普)'로 개명하였다.

일제의 수탈로 인해 그 당시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성유보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었다. 부모님은 평생 그를 혼내거나 매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5살 때부터 어머니께 성을 내는 등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이러한 성유보의 성격을 고치고자 그를 6살도 채 안 되어 경산초등학교에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50년에는 6.25 전쟁이 발발했는데, 국군대구를 방어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가 살았던 경산은 전쟁터 신세는 면했고, 정전 협정이 맺어진 5학년 때까지 수업에 공백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과 무관할 수는 없었는데, 아이들까지 나서서 방공호를 팠고, 어머니는 피난에 대비하여 미숫가루를 잔뜩 만들었다. 또한 전쟁 당시에 국민방위군 열댓명이 그의 집에 기숙하였고, 학교에는 미군이 2년 동안 점유하고 있어 야외수업을 하거나 담배창고를 임시학교로 사용했으며, 제트기B-29 전폭기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을을 지나갔다.[3][4]

성유보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 당시 한국전쟁과 함께 또 다른 기억이 있었는데, 1950년 7월 하순에 어느 날부터 보름넘게 흰옷 입은 어른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신작로를 줄지어 지나갔던 기억이었다.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그 트럭에 실려 갔던 흰옷 입은 어른들이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총살됐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고, 성유보도 먼 훗날인 2005년 '영남대 경산 광산 유적발굴단' 단장을 맡아 5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해냈던 박현수 명예교수를 만나 뒤늦게 어릴 적 자신의 기억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한국전쟁 기간 중에 이승만 정부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이다.

이후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1.1.1. 2.28 학생민주의거와 이후[편집]


1960년 2월 26일, 경북고등학교는 학년 말 시험[5]을 갑자기 앞당겨 친다는 핑계로 학생들에게 2월 28일 일요일 등교를 지시하였다.[6] 2월 28일 오후 2시에 있을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선거유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7][8]

2일 뒤인 1960년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 2학년 대표 이대우가 교정 단상에 올라 성명서를 낭독하며 "일요 등교를 지시한 도지사에게 항의하러 도청으로 가고자 한다."라고 외쳤고, 2학년이었던 성유보는 800여명의 모고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경북도청으로 갔다. 오후 2시쯤 경북고 학생들은 경북도청에 도착하였고, 오임금 도지사에게 일요 등교에 대한 책임을 물었으나 100여명의 경찰들에게 체포당하였다. 성유보 역시 형사에게 체포당하여 스스로를 국장이라고 말하던 한 공무원으로부터 온갖 협박을 당했고, 오후 5시쯤에 풀려났다.[9] 그 뒤 경북고 선생님들은 별말없이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10]

2.28 학생민주의거 이후, 성유보는 어른들의 세계와 청소년의 세계가 무관한 게 아님을 느끼고 신문을 읽으며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3월 15일 부정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기붕이 당선되고, 이에 반하여 마산에서 일어났던 3.15 의거가 강제진압되고, 경찰이 이대우를 강제로 납치[11]하면서 대구의 고교생들은 3.15 부정선거, 4.19 혁명, 4월 26일 이승만 퇴진 때까지 제대로 된 의거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그래도 4.19 혁명 이후 경북고 학생들은 교육의 민주화와 교원들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교원노조단식농성에 참여하여 5일 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12]

2.28 학생민주의거와 4.19 혁명의 영향을 받아 정치학과로 진로를 바꿨고[13], 고3 때 평생 공부를 다 해버릴 것처럼 노력하여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61학번)에 입학하였다.

1.2. 대학 시절 및 군복무[편집]



2. 동아일보 기자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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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현직(申鉉稷)의 딸이다.[2] 철수라는 이름은 워낙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철수와 영희를 떠올리면 된다[3] 미군들이 가끔씩 실개천 제방에서 사격 연습을 하기고 했고, 동네 아이들에게 간식이 든 레이션 박스를 주기도 했다.[4] 한국 전쟁을 통해 성유보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두 가지 강한 인상을 느꼈는데, 하나는 미국이라는 큰 나라의 국력에 대한 부러움이고 다른 하나는 그 힘이 주는 위압감이었다.[5] 당시에는 4월이 신학기였고, 대학 시험을 치른 3학년은 2월 말에는 아예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6] 당시 학생민주의거에 함께 참여하였던 대구고등학교는 토끼사냥, 대구상업고등학교는 졸업식 예행연습, 대구여자중학교은 영화관람을 위해 일요일 등교를 지시하였다.[7] 참고로 자유당 선거 유세 날이었던 전날(27일)에는 오전 수업만 하였다.[8] 여담으로 당시 대구의 모든 공무원과 노동자들에게는 일요일 특근 지시가 내려졌다.[9] 그러나 결의문을 읽고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대구고, 경북여자고등학교 등 다른 학교와 함께 시위를 계획했던 이대우는 빨갱이로 몰려 다음날인 29일까지 구금되었다.[10] 경북고 선생님들은 학생의 시위 활동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고, 주동자 처벌에도 반대했다.[11] 3.15 의거가 일어나자 형사 3명과 동행시켜 포항, 영덕, 울진 일대로 끌고 다녔다.[12]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 이후 5월에 들어선 장면 내각도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교원노조 지도부는 박정희쿠데타 이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대부분 투옥되고 교원노조는 결국 해체되었다.[13] 원래는 공대를 가려고 했었다. 참고로 강요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법대 지망을 바라셨다고 한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