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체육관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수용 인원은 3만명으로 웬만한 실외 운동장 수준의 규모였다. 내부에 육상 트랙, 농구·배구 코트, 유도장, 사격장, 검도장 등이 있어 거의 종합운동장 수준의 거대한 체육관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실내 공간으로 관중들을 압도했으며, 외관 역시 거대한 규모로 높은 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인천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1]
2. 상세[편집]
[ 기사 전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관객 3만여명 수용 전천후 현대시설
멀리 서해를 굽어보는 인천시 남구 도화동235 제물포역 뒷산에 한국의 명물이 또 하나 탄생한다.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내에 세워지고 있는 동양 최대규모의 실내종합체육관이 연내 완공을 위해 마지막 손질이 한창인 것이다.
지난 70년 4윌에 기공된 이 실내종합체육관은 관객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드와 200m 트랙을 갖추고 있으며 트랙 안 플로어에는 매트 400장 넓이의 유도장을 비롯해서 사적장, 검도장, 그리고 각각 2면의 배구, 농구 코트가 마련돼있어 축구와 야구를 제외한 모든 경기를 거행할 수 있는 명목적실내체육관이다.
고대 희랍에서 기원된 체육관은 독일에서 19세기 초 근대 체육관으로 발달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희랍에서의 체육관은 단순한 체력단련의 장으로서만 아니라 중요한 교육시설이었다.
19세기 근대체육관은 독일체조의 아버지(프리드리히 얀)에 의유를 부르짖는 운동의 일환으로 발달되었으나 1820년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그후 체육관은 학교와 YMC의 체육시설로서 미국에서 특수한 발달을 이륙, 1925년 뉴욕에 세계 최초의 종합시설을 갖춘 메디슨스퀘어 가든이 건설되기에 이른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종합시설을 지닌 체육관으로는 인천체부의 이 체육관이 규모로봐서 가장 큰 것이다.
연 30여만명이 동원되어 연내 완공을 서두르는 이 체육관은 3층의 로열박스까지 승용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완벽하다. 출입구 12개외에 승용차 2500대가 머무를수 있는 주차장까지 구비했다.
가로 176m, 세로 142m의 이 매머드 실내체육관의 규모는 서울 장충체육관(연건평 2350평, 수용인원 8000명) 규모의 3배가 넘는 엄청난 것으로 마치 서울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 지붕을 씌워놓은 꼴이다.
이 실내체육관의 돔 남북양쪽 끝에는 높이 60m의 14층 타워가 나란히 세워져있어 웅장한 모습을 한결 더하고있다.
이 2개의 타워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인가를 받은 체부인 인천체부 학생들의 강의실, 연구실, 베드 2400개의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며 한국스포츠의 일선지도자와 선수들을 배출할 요람구실을 하게된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나라 스포츠사상 각종 국제경기에서 이름을 남긴 체육인의 사진과 각종 체육기념물 등을 전시할 체육기념관, 미술관마저 꾸며져 한국스포츠의 참된 센터구실을 다짐하고있다.
높이 56m의 천장에 마련된 VTR시설과 이동TV카메라 3대가 설치돼있어 학생들은 선수들의 대전실황, 연습방법들을 강의실에 앉아서 지켜볼수가 있고 겨울에는 추위를 잊은 채 정상운동을 할 수있는 난방시설을 모두 갖추어 국가대표선수들의 합숙강화 훈련에도 큰 도움이 기대된다.
이 전천후 실내종합체육관을 완성하기까지는 시멘트 60만부대, 철근 1만여톤이 드는 대공사.
특히 이 체육관건립은 순수한 한국 기술진만의 참여하여 높이 20m의 돔을 씌울때 새 공법을 적용, 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 7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체부인 인천체부를 설립한 백 이사장은 "오늘날의 국제스포츠 대결은 서로가 국력을 저울질 해보는 새로운 전쟁" 이라고 규정하면서 "올림픽에서의 금메달리스트를 길러내 국위를 선양하는것이 꿈" 이라고했다.
또 백 이사장은 "국제스포츠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 우수선수확보. 둘째, 과학적인 스포츠시설 완비. 셋째, 선수와 시설을 조화있게 운영 할 수 있는 유능한 체육지도자 양성이란 3대요소가 필요하며 이 실내체육관 완공으로 이런 3가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소감을 말한다.
인천체부는 지난 17일에 부산에서 끝난 제54회 전국체전에 300여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각 종목에 출전시켜 경기선수단이 종합3위를 차지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다.
- 선인체육관 완공 중 소식 기사
대형 체육관 건설이 일생의 꿈이었던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에 의해 1970년 4월에 착공되어 197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당시 아시아 최대의 사학인 선인학원 소속 16개 학교가 공동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3]
가로 176m, 세로 142m에 높이 60m,[4] 당시에는 보기가 힘든 크기의 체육관이었다.[5] 건물 내부에는 야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들을 할 수 있는 기구들과 물건들이 마련되어있었고, 겨울에는 너무 춥지 않게 히터까지 설치하는 등 많은 편의시설을 갖추었다.[6] 이 뿐만이 아니다. 외부에는 차량 수천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되어 있었고, 출입구가 12개나 되는 등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완공된 이후로의 일들은 크게 2가지 인데, 첫번째는 1976년에 선인체육관에서 홍수환 선수의 WBA 타이틀 매치가 열렸고, 두번째는 1987년 WBC 챔피언 장정구 선수의 12차 타이틀 방어전이 국민들의 큰 관심 속에서 열리기도 했다.
추가로 체육관의 부속 시설인 14층 강의동 빌딩에는 인천체육전문학교와 인천체육고등학교가 있었다. 인천체육전문학교는 인천체육전문대학, 인천전문대학을 거쳐 2010년 인천대학교에 통합되어 송도캠퍼스로 이전했고, 인천체육고등학교는 2012년 11월에 청라국제도시로 이전하여 이후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건물이 되었다.
2.1. 철거[편집]
2000년대에 들어 도화지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체육회관으로 재단장하려고 하였으나 보수비용이 약 170억원으로, 신축비용보다 비싸다는 판단에 따라 2013년 1월부터 천천히 철거를 시작하여 그 해 8월 3일 아직 남아있던 강의동이 폭파되면서 철거가 완전히 끝났다.
2.2. 철거 이후[편집]
그리고 마침내 인천 포스코 더샵 스카이타워라는, 주거동과 상가동이 분리된 3세대 주상복합(MXD)이 들어섰다. 또한 주변 단지들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재개발이 속히 이루어졌다.
3. 여담[편집]
- 거대한 규모 덕분에 지역 주민들은 맘모스체육관 이라고 불렀다.
-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당시 인천 연설회가 열렸던 곳이다. 여기서 노무현 후보는 장인의 권오석의 남조선로동당 활동 비판에 대해 "그럼 제가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라는 특유의 감성 전략으로 돌파를 시도했고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들어먹혔다. #
- IOPS 스타리그 04~05와 So1 스타리그 2005의 결승전이 이 곳에서 열렸다. 오영종이 메이저 대회 유일한 우승과 함께 로열로더에 등극한 장소가 바로 이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