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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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체육관
善仁體育館 | Seonin Gymnasium

파일:인천전문대학 예체능학부.jpg
기공/개장
1970년 4월/1973년 10월
공사 비용
2,000,000,000원(20억원)
폐장
2012년 11월
소속
인천체육고등학교(1976~2012)
인천전문대학(1973~2010)

1. 개요
2. 상세
2.2. 철거 이후
3.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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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었던, 국내 최대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체육관.

수용 인원은 3만명으로 웬만한 실외 운동장 수준의 규모였다. 내부에 육상 트랙, 농구·배구 코트, 유도장, 사격장, 검도장 등이 있어 거의 종합운동장 수준의 거대한 체육관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실내 공간으로 관중들을 압도했으며, 외관 역시 거대한 규모로 높은 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인천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1]


2. 상세[편집]


파일:1973 선인체육관.png
1973년 건축 중인 선인체육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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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3만여명 수용 전천후 현대시설

멀리 서해를 굽어보는 인천시 남구 도화동235 제물포역 뒷산에 한국의 명물이 또 하나 탄생한다.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내에 세워지고 있는 동양 최대규모의 실내종합체육관이 연내 완공을 위해 마지막 손질이 한창인 것이다.

지난 70년 4윌에 기공된 이 실내종합체육관은 관객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드와 200m 트랙을 갖추고 있으며 트랙 안 플로어에는 매트 400장 넓이의 유도장을 비롯해서 사적장, 검도장, 그리고 각각 2면의 배구, 농구 코트가 마련돼있어 축구와 야구를 제외한 모든 경기를 거행할 수 있는 명목적실내체육관이다.

고대 희랍에서 기원된 체육관은 독일에서 19세기 초 근대 체육관으로 발달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희랍에서의 체육관은 단순한 체력단련의 장으로서만 아니라 중요한 교육시설이었다.

19세기 근대체육관은 독일체조의 아버지(프리드리히 얀)에 의유를 부르짖는 운동의 일환으로 발달되었으나 1820년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그후 체육관은 학교와 YMC의 체육시설로서 미국에서 특수한 발달을 이륙, 1925년 뉴욕에 세계 최초의 종합시설을 갖춘 메디슨스퀘어 가든이 건설되기에 이른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종합시설을 지닌 체육관으로는 인천체부의 이 체육관이 규모로봐서 가장 큰 것이다.

연 30여만명이 동원되어 연내 완공을 서두르는 이 체육관은 3층의 로열박스까지 승용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완벽하다. 출입구 12개외에 승용차 2500대가 머무를수 있는 주차장까지 구비했다.

가로 176m, 세로 142m의 이 매머드 실내체육관의 규모는 서울 장충체육관(연건평 2350평, 수용인원 8000명) 규모의 3배가 넘는 엄청난 것으로 마치 서울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 지붕을 씌워놓은 꼴이다.

이 실내체육관의 돔 남북양쪽 끝에는 높이 60m의 14층 타워가 나란히 세워져있어 웅장한 모습을 한결 더하고있다.

이 2개의 타워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인가를 받은 체부인 인천체부 학생들의 강의실, 연구실, 베드 2400개의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며 한국스포츠의 일선지도자와 선수들을 배출할 요람구실을 하게된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나라 스포츠사상 각종 국제경기에서 이름을 남긴 체육인의 사진과 각종 체육기념물 등을 전시할 체육기념관, 미술관마저 꾸며져 한국스포츠의 참된 센터구실을 다짐하고있다.

높이 56m의 천장에 마련된 VTR시설과 이동TV카메라 3대가 설치돼있어 학생들은 선수들의 대전실황, 연습방법들을 강의실에 앉아서 지켜볼수가 있고 겨울에는 추위를 잊은 채 정상운동을 할 수있는 난방시설을 모두 갖추어 국가대표선수들의 합숙강화 훈련에도 큰 도움이 기대된다.

이 전천후 실내종합체육관을 완성하기까지는 시멘트 60만부대, 철근 1만여톤이 드는 대공사.

특히 이 체육관건립은 순수한 한국 기술진만의 참여하여 높이 20m의 돔을 씌울때 새 공법을 적용, 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 7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체부인 인천체부를 설립한 백 이사장은 "오늘날의 국제스포츠 대결은 서로가 국력을 저울질 해보는 새로운 전쟁" 이라고 규정하면서 "올림픽에서의 금메달리스트를 길러내 국위를 선양하는것이 꿈" 이라고했다.

또 백 이사장은 "국제스포츠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 우수선수확보. 둘째, 과학적인 스포츠시설 완비. 셋째, 선수와 시설을 조화있게 운영 할 수 있는 유능한 체육지도자 양성이란 3대요소가 필요하며 이 실내체육관 완공으로 이런 3가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소감을 말한다.

인천체부는 지난 17일에 부산에서 끝난 제54회 전국체전에 300여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각 종목에 출전시켜 경기선수단이 종합3위를 차지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다.

- 선인체육관 완공 중 소식 기사


대형 체육관 건설이 일생의 꿈이었던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에 의해 1970년 4월에 착공되어 197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당시 아시아 최대의 사학인 선인학원 소속 16개 학교가 공동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3]

가로 176m, 세로 142m에 높이 60m,[4] 당시에는 보기가 힘든 크기의 체육관이었다.[5] 건물 내부에는 야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들을 할 수 있는 기구들과 물건들이 마련되어있었고, 겨울에는 너무 춥지 않게 히터까지 설치하는 등 많은 편의시설을 갖추었다.[6] 이 뿐만이 아니다. 외부에는 차량 수천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되어 있었고, 출입구가 12개나 되는 등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완공된 이후로의 일들은 크게 2가지 인데, 첫번째는 1976년에 선인체육관에서 홍수환 선수의 WBA 타이틀 매치가 열렸고, 두번째는 1987년 WBC 챔피언 장정구 선수의 12차 타이틀 방어전이 국민들의 큰 관심 속에서 열리기도 했다.

추가로 체육관의 부속 시설인 14층 강의동 빌딩에는 인천체육전문학교와 인천체육고등학교가 있었다. 인천체육전문학교는 인천체육전문대학, 인천전문대학을 거쳐 2010년 인천대학교에 통합되어 송도캠퍼스로 이전했고, 인천체육고등학교는 2012년 11월청라국제도시로 이전하여 이후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건물이 되었다.


2.1. 철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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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진행 중인 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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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파 준비 중인 강의동


발파 해체 영상
이렇게 동양 최대 라는 명칭이 있는 체육관이었지만, 선인학원 재단 건물들 대부분이 다소 부실하게 지어져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고,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난방 및 냉방 시설을 제대로 안 갖춰서 사용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 도화지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체육회관으로 재단장하려고 하였으나 보수비용이 약 170억원으로, 신축비용보다 비싸다는 판단에 따라 2013년 1월부터 천천히 철거를 시작하여 그 해 8월 3일 아직 남아있던 강의동이 폭파되면서 철거가 완전히 끝났다.


2.2. 철거 이후[편집]



파일:제물포캠퍼스 부지 전경(2008).jpg


파일:제물포캠퍼스 부지 전경(2020).jpg

개발 이전(2008)
개발 이후(2020)
프로젝트의 계획은 인천구도심의 재개발프로젝트 시작의 일환으로 도화오거리를 도화사거리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그 외로는 아파트 단지와 공원, 상업시설, 그 외 등등 많은 것들을 추진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천 포스코 더샵 스카이타워라는, 주거동과 상가동이 분리된 3세대 주상복합(MXD)이 들어섰다. 또한 주변 단지들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재개발이 속히 이루어졌다.


3. 여담[편집]


  • 거대한 규모 덕분에 지역 주민들은 맘모스체육관 이라고 불렀다.

  • 1977년박근혜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이유는 '새마음갖기운동'이라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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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크고 웅장한데, 선인체육관은 그 건물들 중에서도 제일이었다.[2] 뒤 3개의 건물은 현재 기준으로 왼쪽부터 인천소방고등학교,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본관,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인천전자마이스터고등학교 건물이다. 그 외 공학관, 인천대학교 옛 본관은 지어지기 이전이라 보이지 않는다.[3] 이 건물 공사에도 선인학원 학생들과 교사들도 인부로 동원되었다고 한다. 비교적 간단한 일에만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론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4] 혹은 65m. 강의동 건물 최상단의 평지붕을 포함한 수치로 예상된다.[5] 넓이만 고려해도 장충체육관의 3배를 넘는 상당히 거대한 건물이었고, 이 체육관을 받추어 주고 있던 지반까지 포함하면 대략적인 높이는 80m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80m는 아파트 27층 정도의 규모이다. 이 정도 수치이면 그렇다 할 높이지만 당시 주변에는 주택 건물들밖에 없었기에 그 크기가 더욱 눈에 띄었다.[6] 다만 나중에는 시설이 부실해서 제대로 쓸 수가 없었는지 많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7] 실제로 1977년에 새마음갖기운동이 해당 체육관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