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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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합천군 CI.svg 합천군
삼가면
三嘉面 | Samga-myeon




광역자치단체
경상남도
기초자치단체
합천군
행정표준코드
5480051
관할 법정리
13리
하위 행정구역
35행정리 65반
면적
60.57㎢
인구
3,047명[1]
인구밀도
50.31명/㎢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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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산청군·함양군·거창군·합천군

김태호 (3선)
경상남도의원 | 합천군 선거구

장진영 (초선)
합천군의원 | 라 선거구

성종태 (초선)

신경자 (재선)

행정복지센터
삼가중앙2길 12-8
삼가면사무소
1. 개요
2. 역사
3. 지명유래
3.1. 금리
3.2. 일부리
3.3. 소오리
3.4. 하판리
3.5. 문송리
3.6. 두모리
3.7. 덕진리
3.8. 학리
3.9. 외토리
3.10. 어전리
3.11. 용흥리
3.12. 동리
3.13. 양전리
4. 특징
5. 교육
6. 기타


1. 개요[편집]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가회면, 의령군 대의면, 산청군 생비량면과 맞닿아 있다.


2. 역사[편집]


삼가면(三嘉面)은 삼한시대에는 반사해국(半斯奚國 또는 斯二岐國)이란 부족국가의 옛 터이다. 양전리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삼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고려 때는 삼기현(三岐縣)과 가수현(嘉樹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을 조선 태종 14년(1414年)에 첫 글자를 따 삼가라 불렀다고 한다. 삼기현(三岐縣)은 지금의 대병면(大幷面)이었는데,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곳에 삼지현(三支縣)을 설치하였고, 35대 경덕왕이 이곳 지명을 삼기현(三岐縣)이라 고치고 강양군의 영현으로 부속시켰다. 그후 고려 8대 현종 9년(1018년) 에 합천의 속현으로 두었으며 공민왕 22년 (1373년)에 22년에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렸고, 별호는 마장(麻杖)이라고 했다. 가수현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가주화현으로 불렀고, 35대 경덕왕때 강주(진주<晋州>) 관할에 두었다. 고려조 이후부터 삼가현의 현청을 현재의 삼가쪽으로 옮기고 현감을 두었는데, 1914년 합천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삼가현의 관할은 현재의 삼가와 쌍백면, 가회면, 봉산면 일부와 거창군 신원면, 의령군 봉수면 일부, 대의면 일부였다. 그리고 조선 고종 32년(1895년)에는 현에서 군으로 승격 명실상부(名實相付)한 행정의 중심부가 되었으나 19년만에 다시 면으로 격하되어 옛날의 권위는 찾을 수 없다.


3. 지명유래[편집]



3.1. 금리[편집]


금리는 본래 삼가군 현내면의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부동, 흥문동의 각 일부와 유인면의 양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금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금리는 삼가군 현내면의 현청 소재지로 옛 유적이 남아 있으며 상금, 하금, 원금의 3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 원금
원금마을은 금산 밑 마을이다. 보통 북산밑으로 호칭하고 있는데 北이 아니고 베짜는 북을 뜻하지만 北山밑으로 잘못 알고 있다. 마을 중간지역의 산밑에는 여름에 아주 차가운 얼음 바람이 불어 나오는 곳이 있기도 하다. 마을 남쪽 끝 도로변에는 미륵불이 있는데 정초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 상금
상금마을은 면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우체국과 천일[2], 경전여객의 정류소가 있다. 면청사에 경남 굴지의 객사인 봉성관이 있었는데 1949. 9. 1 공비내습 방화로 소실되었다.

* 하금
하금마을은 상금리에 이어 서남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기양루 옛 삼가군의 동헌, 죄인을 가두었던 옥 성안의 북문과 서문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3.2. 일부리[편집]


본래 삼가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삼가읍내에서 제일가는 마을이라고 해서 일부 또는 일부동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땨라 동문동, 홍문동 일부를 병합하여 일부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일부리는 일부, 이부, 장기, 봉두 등 4개의 행정리에 일부, 새동네, 이부, 장기, 봉두, 신봉두 등 6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일부
  • 옛날 지수물이라고 호칭하였던 일부마을은 양천강 제방의 안쪽에 남서로 이어진 마을이다. 백학산을 마주 보고 시장을 접한 곳으로 마을 한가운데 국도가 있어 자연스럽게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수물이란 호칭은 마을 앞으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물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명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 새동네 : 새로 국도가 건설되면서 국도에 살던 주민들이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 이부

옛날 삼가군 현내면 당시 동문성 밖의 박가묘가 있는 곳이라고 하여 동박동네, 박개미 등으로 불리워졌던 이부동은 마을 앞에 33호 국도가 나있는데 이 33호 국도 주변과 북쪽의 당산밑으로 이뤄진 집단 마을이다. 마을 앞 동남으로 양천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 백학산이 솟아 있다. 양천강 제방(옛 만류제) 밑의 고수부지는 면민의 체육장이다. 동쪽 오두산과 넓드덩에는 선사시대의 유물이 출토 되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수시로 도굴당한 흔적만 역역히 노출되고 있다. 백학산 좌쪽 기슭에는 옛부터 유명한 약수천이 있는데 이곳은 면민의 아침 운동장소겸 생수 공급처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중학교, 병원 등 공공시설과 소재지 전체에 공급하는 상수도 시설도 이곳에 있는데 면내에서 빈부의 격차가 적은 윤택한 마을이기도 하다.

이 부 일부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이며 일부 마을 동쪽에 있다.

  • 장기

장기 마을은 삼가면 소재지 중앙의 시장터 상가와 주택지로 1970년경 일부리에서 새행정리로 분할된 지역이다. 옛 현내면의 읍시장이 물추골에서 1932년경 이곳으로 옮기고, 1958년경에 현재 규모의 시장터가 확장되어 1977년에 상설 이층 건물의 점포가 이뤄졋다. 1970년경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행정리가 분할될 당시 장터의 마을이라 하여 장기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 봉두

봉두 마을은 봉두, 신봉두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봉두 : 삼가고교 뒷편으로 마을에 봉두사가 있다. 마을 뒷편은 산으로 이여져 있고, 앞은 삼가면 소재지를 향해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 신봉두 : 33호 국도변의 마을로 동서로 남향의 현대식 주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98년 봉두 마을과 외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꺼굴안 입구에 생긴 마을이다


3.3. 소오리[편집]


소오리는 삼가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소오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서 교동 남산을 병합하여 소오리라 하고 교동, 원소오 2개 행정리와 원소오, 생골, 남산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원소오

  • 원소오 : 본래 원소오(元巢梧)이며, 삼가초등학교 바로 윗쪽의 마을인데 양찬우 도지 사가 국가 재건사업으로 학교 부지를 마을 도로로 확장케 하고, 담장을 벽돌블록으로 축조하고 도색을 처음한 마을이다.

  • 남산 : 소오리 서쪽 산넘어 양천강을 앞에 둔 분지의 모래 땅에 위치한 마을이다. 채소재배 생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 교동

  • 교동 : 삼가초등학교의 윗쪽 구 도로변에서 서쪽의 골안 향교까지의 주거지이다. 별칭으로 향교마을 또는 생골로 호칭하고 있으며, 대병면 수몰지구에서 몇 가구 이주한 세대가 같이 살고 있다

  • 남산
    • 남산 : 2010년 2월 4일 행정구역개편으로 독립된 마을이 되었다. 소오리 서편 양천강변의 안쪽산 밑, 분지모양의 사토추적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3.4. 하판리[편집]


하판리는 본래 삼가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널재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아래널재 또는 하판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홍문동, 지동, 금동의 각 일부와 유인면의 양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하판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하판리는 상판, 하판, 지동 등 3개의 행정리에 아랫널티, 마쟁, 샛터, 굼투무리, 웃널티, 갓골 등 6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하판

하판마을은 삼가면 소재지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지점의 정자나무 숲이 있는 산 기슭의 마을이다. 하판마을 앞은 비옥한 넓은 들판이 있으며 아랫널티, 마쟁, 샛터, 굼투무리 등 4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아랫널티 : 하판마을의 중심지로 하판마을을 아랫널티로 많이 부르고 있다.
  • 마쟁 : 강성마을 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옛날 말의 사육장이 있었다.
  • 샛터 : 길 동편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다.
  • 굼투무리 : 하판 마을의 일부로 굽은 모퉁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 상판
    • 상판마을은 하판에서 북으로 1km 떨어진 지점의 왼쪽 산 언덕에 위치한 남향 마을이다. 마을 앞 좁은 골짜기에 남북으로 전답이 있는 산중의 마을로 옛부터 웃널티라 호칭하고 있다. 상웃널티 상판 마을을 별명으로 웃널티라 부르고 있다

  • 지동

지동 마을은 삼가면 소재지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문송리 중문마을로 넘어 가는 고개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원래 갓골이라고 불러왔으나 새 행정용어로 지동이 되었다. 조식(曺植) 남명(南冥)선생의 증조부 안습(安習)이 창녕에서 이주하여 후손이 정학한 마을이다.


  • 갓골 : 지동의 원래 이름이다


3.5. 문송리[편집]


문송리는 본래 삼가군 문송면 지역으로서 문실 또는 문송, 문동이라 불리어졌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문동, 중문동과 현내면의 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문송리라하며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송곡 문송리는 문실과 솔실의 첫자를 따서 마을명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문송리는 최 북쪽의 사면이 높은 산맥으로 둘러 싸인 남북으로 길게 뻗은 깊은 골짜기이다. 현재 문송리는 신기, 중문, 내문마을 등 3개의 행정리에 샛터, 중문실, 안문실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신기

문송리의 첫 동네로서 임진왜란 이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샛터(문송샛터)라고 한다. 지방도로에서 약 1km정도 떨어진 지점의 마을로 도로 양편에 주택지가 형성되고 있다.


  • 샛터 : 문송리의 일부로 새로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샛터라 하며 일명 신기라고도 부른다

  • 중문

중문마을은 삼가면 소재지에서 가회로 가는 지방도 옆 두모리 입구에서 북쪽 3km정도 떨어진 깊은 골짜기의 마을인데 마을 앞에 넓은 전답이 펼쳐져 있다. 문실 중간의 마을이라고 하여 중문실이라 한다. 중문실 중문 마을의 다른 이름으로 과거부터 계속 불러왔던 이름이다.


  • 내문

문송리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마을로 북단은 용주면, 서쪽은 가회면, 동은 쌍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산짐승이 많이 나타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경향 각지에서 수렵인들이 산돼지, 노루, 꿩 등의 사냥으로 내왕이 빈번 하였던 곳이다. 깊은 산중마을이라 6.25와 같은 재난을 당한 일이 없고, 비옥한 농토에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이라 전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씨의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가면 소재지에서 8km의 거리이나 군내버스가 왕래하고 있다. 안문실 과거 문송면에서 제일 깊은 산 안쪽의 마을이라고 하여 안문실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3.6. 두모리[편집]


삼가면 소재지에서 가회면으로 가는 도로변 산밑에 동서로 길게 늘어선 마을이다. 마을 뒷편은 높은 산줄기로 이어져 있으며, 앞은 넓은 들판인데 이곳을 사들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삼가군 문송면 지역으로 정동(亭洞), 두무동(杜舞洞), 이문동, 두무실 등으로 호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현내면의 하판동, 소오동, 금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두모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두모리는 내동과 외동의 2개행정리로 되어 있으며 내동, 외동, 옷밭골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두모리는 입문동(入門洞)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는 문송면(文松面)의 입구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 내동

삼가면 소재지에서 약 3.5km 지점의 마을 입구 밭 언덕에 서 있는 거대한 정자나무의 안쪽 골안이 내동마을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 종군시 산청군에서 합천으로 행차할 때 이정자나무 아래에서 쉬었고 골안의 노씨댁에서 머물고 갔다고 한다. 내동 마을이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내동으로 불리우고 있다.


  • 외동

문송리 입구에서 봉성 초등학교 아랫 쪽으로 이어진 도로변의 주택지 전체가 외동마을이다. 옛 문송면 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외동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외동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옷밭골 옷나무가 많은 골짜기 마을이라고 하여 옷밭골이라 명명 되었다고 한다.


3.7. 덕진리[편집]


옛 삼가군 문송면 지역으로 서부에 위치하여 북쪽은 가회면과 서쪽은 산청군 신등면과 경계를 이룬다. 덕진, 송곡 2개 행정리에 홈골, 부곡, 쇠실 등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모동 일부를 병합하여 덕진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 덕진

덕진 마을은 홈골, 부곡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덕진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에 큰 강물이 흐르고 있고, 이곳에 나루터가 있다고 하여 덕진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부곡 가마골은 동네 뒷산에서 마을까지의 모습이 가마솥 같이 생긴 지형이라고 부곡이라 하였다.


  • 송곡

문쇠실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덕진에서 약 2km의 서쪽산 밑으로 깊숙한 골안의 마을이다. 북쪽은 가회면과 서쪽은 산청군 신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미실 : 송곡의 별칭이다.


3.8. 학리[편집]


  • 옥동리

옥동리에는 옥동과 옻밭골의 2개 자연 마을이 있다.


  • 옥동 : 홍수덤 앞 양천강 건너 산 밑의 마을인데 원래 이 마을 지명은 학동이다. 1978년 6월 1일 대화재로 마을이 전소되어 재건한 주택지이다. 옻밭골 마을입구 홍수덤 산 줄기의 아랫쪽 양지 바른 언덕바지에 있는 마을로 옻나무밭이 있었다고 하여 옻밭골이라 한다

  • 금천

금천마을은 금천, 월평, 농암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금천 : 옻밭골 아래쪽(서편)의 밭언덕 아래 남향의 마을이며, 옥녀봉의 선녀들이 비단을 짜는 형상의 지형이라 직금이라 하는데 직금의 발음이 '지끔이'로 또 는 '지그미'로 잘못 호칭되고 있는데 행정 이름은 마을 앞 강에서 비단을 씻 었다고 금천(錦川)이 되었다고 한다.

  • 월평 : 금천 서쪽 들 건너의 산청군으로 이어진 산 줄기의 기슭 언덕에 남북으로 자 리잡은 마을인데 1958년경 금천의 대화재로 주민이 새 거주지를 가마골과 월평을 택하여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 때 박씨 문중이 가마골과 월평에 주로 이주하여 왔다.

  • 농암 : 월평의 서쪽 깊은 골짜기 산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옛 정유년에 이 순신 장군이 산청군에서 합천군으로 행차할 때 지나간 길목으로 지금 마을 입 구에 충무로란 표시를 바위에 기록하고 있다. 또 1960년대까지 삼가장과 단계장을 왕래하는 포부상(抱負商)과 일반일들이 항시 내왕하는 산중 길이었다. 농바위골은 농박골로도 호칭하고 있다.

  • 용계

금천의 남쪽 양천강 건너 어전리에서 산줄기의 끝 산 기슭에 위치한 남서향의 마을이다. 옛부터 항두마을로 불러오며 농박골 입구의 목넘기에서 바라보면 마을 지형이 황소머리(또는 사람머리)모양이라고 '황두'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행정명은 개천에 용이 누워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용계리라 지었다 한다. 또한 마을지형이 황소가 누어있는 형국이라하여 항두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3.9. 외토리[편집]


본래 삼가군 아곡면 지역으로서 토실 또는 외토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동, 토동, 장성박, 점골, 신기, 피차골, 제보를 병합하여 외토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삼가면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양천강의 물줄기에 따라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들판을 끼고 있다. 남쪽은 의령군 대의면과 서쪽은 산청군과 경계를 이루며 안동, 토동, 신점, 제곡 등 4개 행정리에 안골, 새앳골, 밖골, 점골, 샛터, 피차골, 저부 등 7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안동

본래 안동인데, 행정리명이 安洞으로 되어 있다. 외토리에서는 제일 북쪽에 있다. 안골 안동마을의 별칭이다. 토동에서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안골로 불리우고 있다.


  • 토동

토동마을은 새앳골과 밖골의 2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새앳골 안동과 토동의 가운데 골 마을이다. 조식 남명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밖골 외토리 토실의 입구에 있는 첫 동네로 마을 앞에 몇백년 되는 정자나무와 효자비가 있는 윗편 마을이며, 밀양박씨의 집성촌이다.


  • 신점

국도 33호의 도톨재를 넘어 서쪽 들판을 건너 산밑에 동서로 배열된 점골과 샛터의 두개의 자연마을이다.


  • 점골 : 마을에 점터, 즉 도기 가마터가 있어서 점골이다. 대의면을 바라 보는 넓은 들판에 양천강이 흐르고 있는 전망이 좋은 마을이다.

  • 샛터 : 점골 아래편의 남향 마을이다. 조식 선생이 산청으로 이사 가면서 보평들이라 적어준 후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다.

  • 제곡

제곡마을은 외토리의 최 남서쪽으로 산청군 생비량면과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으며, 별칭은 저부마을이다. 저부와 피차골의 두 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저부 : 생비량면 저부마을과 경계선을 이루며, 앞은 양천강의 들판을 이루고 있다.(산청저부와 삼가저부가 있다)

  • 피차골 저부마을 윗쪽 골안에 있는 마을로 옛날 싸움터로서 골짜기에 피가 가득했다고 피차골이다


3.10. 어전리[편집]


진주 방면으로 33번 국도를 접하고 마을 옆에 비옥한 넓은 평야에 수리시설이 잘 된 곳이다. 옛 삼가군 아곡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서 현내면의 어은동, 일부동의 일부분과 의령군 모의면 하촌동의 일부분을 병합하여 어전리가 되었다. 현재 신평과 어은의 2개 행정리에 10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어은

진주 방면으로 33번 국도를 접하고 마을 옆에 비옥한 넓은 평야에 수리시설이 잘 된 곳이다. 옛 삼가군 아곡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서 현내면의 어은동, 일부동의 일부분과 의령군 모의면 하촌동의 일부분을 병합하여 어전리가 되었다. 현재 신평과 어은의 2개 행정리에 10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신평

마을 앞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의령군 대의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이름은 '늘밭'인데 마을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여기저기 동서 남북으로 사방에 늘어져 있어서 늘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행정구역명은 신평리(新坪里)인데 남뱅이, 무덤기골, 가운데골, 절골, 웃들말, 옥천동, 못둑 등 7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마이크로 공장의 안쪽이 옥천동, 공장 앞이 못둑동네, 들가운데 마을이 윗들말, 모의로 가는 도로의 윗쪽 첫동네가 절골, 다음이 가운데골, 세 번째가 무덤기골, 무덤기골 마주 보는들 건너편 산밑마을이 남뱅이 마을이다.

  • 웃들말 못둑 도로에서 동쪽의 들 가운데 평풍덤을 배경으로 모의천이 흐르는 냇가 의 마을이다.

  • 세곳의골안 모의 하촌리행의 도로 위쪽에 세곳의 골에 마을이 있는데 첫째가 절골, 두 번째 골이 가운데 마을, 세 번째가 무덤기골이다.

  • 남뱅이 어전리에서 제일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의령군 대의면 하촌마을과 경계선 을 이루고 있다.

  • 옥천동 동네 산밑에 수질 좋은 옥샘이 있어서 옥천동이다. 지금 이샘 부근에 옥천 사를 지어서 절에서 이용중이다. 마을 앞에 마이크로 공장이 건립되어 성 업중이다


3.11. 용흥리[편집]


삼가면에서 동남쪽 자굴산 줄기에 위치하며, 동서로 길게 뻗은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진 산중의 마을이다. 골짜기의 폭은 약 1km이고 동리의 입구 아초에서 동리의 끝 침실까지는 약 4km이다. 옛 삼가군 아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아초, 복곡동, 설월을 병합하여 용배미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 따라 용흥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용흥리는 복곡, 아초 등 2개의 행정리에 아초, 웃침실, 하침실 웃들, 밭들 등 5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아초

용흥리에서 첫 동네로 으뜸되는 집단촌이다. 옛날 마을앞 둑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아조(阿棗)라는 말이 변해서 아초가 되었고 삼가 향교가 처음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초 대추나무가 많은 마을이라고 하여 아초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 복곡

용흥리에서 제일 윗쪽에 위치하며, 윗침실, 아랫침실, 설월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이 동구설이라 (돌아가는설) 마을 끝은 자굴산 준령으로 이어져서 이 마을에 와서는 다시 돌아 가야만 하는 지형이다. 세 개 자연마을이 卜자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복곡이라 한다.


  • 침실 : 용흥리의 자굴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삼가 소재지에서 약 6km 지점이다. 바늘과 같이 좁은 골짜기이지만 실속있는 골이라고 침실(針實)이라 한다.

  • 윤들 : 본래 이름은 눈들인데 행정명에서 설월이라 하고, 보통 윤들로 부르고 있다. 일설에는 마을의 저수지가 달밤에 눈이 덥힌 것처럼 보여서 설월(雪月)이라 한다고 한다.

  • 밭들 밭 한가운데 새로 생긴 마을이다.


3.12. 동리[편집]


삼가면의 제일 동부에 위치하며, 쌍백면 외초리를 면 경계로 자굴산을 바라보는 넓은 분지에 있다. 본래 삼가군 유린면이며, 유린역(有麟驛)이 있어서 유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서 동리로 되었다. 구전과 인평 두 마을이 행정리로 형성되어 있다.


  • 구전

국도에서 자굴산 쪽으로 1km 동쪽에 있으며, 서동(西洞)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지형이 거북이가 기어나오는 형상이라고 한다. 마을 숲은 이팝나무의 군락지이다. 구전 마을의 형태가 거북이가 기어나오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구전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 인평

동리에서는 동동(東洞)이라 부르며, 마을의 들판이 고기 비늘과 같다고 하여 어진들이라고도 불렀으며, 넓은 들판에 자굴산을 배경으로 쌍백면 외초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자양초등교와 보건진료소가 있다.



3.13. 양전리[편집]


본래 삼가군 유인면 지역으로 좋은 밭이 많으므로 양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동 일부와 현내면의 홍문동 일부를 병합하여 양전리라 해서 합천군 삼가면에 편입 되었다. 삼가면에서는 쌍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며, 국도와 양천강을 앞에 두고 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강성과 양정의 두 개 행정리로 되어 있으며, 양전, 문촌, 강성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양전

양천강 상류에 있는 마을로서 양전, 주막거리, 문촌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양전 양지 바른 산기슭의 마을에 비옥한 전답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명명되어졌다고 한다. 문촌 옛날 서당이 있어 문촌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 강성

양양천강이 마을을 감싸 주는 성(城)같은 형태에 물 좋은 곳이라 하여 강성으로 이름지었고, 마을 뒷산은 강성 부엉덤이라 하여 매우 높은 산 줄기가 쌍백면 죽전리로 이어져 있다. 강성 강물이 마을을 성곽처럼 둘러싸고 흘러내린다 하여 강성이라 하였다고 한다.



4. 특징[편집]


면소재지는 금리이며 합천군 남부의 교통요충지이다. 이 면은 진주, 산청, 의령과 가까우며 삼가면민들은 거의 진주생활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단, 진주로 가는 버스는 아침에 1회 뿐이며 오히려 마산부산서부로 가는 버스가 더 많다.


5. 교육[편집]


초등학교 - 삼가초등학교 (공립)
중학교 - 삼가중학교 (공립)
고등학교 - 삼가고등학교 (공립)


6. 기타[편집]


[1] 2023년 6월 주민등록인구[2] 정작 현재 천일여객은 삼가를 넘어 합천 전체지역에서 GG치고 떠났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합천은 경전/동일의 사실상 독점구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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