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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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잔혹성
3. 원인
4. 논쟁
4.1. 존치 측의 주장과 반박
5. 타국의 유사 사례
6. 매체
7. 관련 문서


Sati / Suttee[1]


1. 개요[편집]


사티는 순장 혹은 순사의 일종으로 남편이 죽어서 시체를 화장할 때 아내가 산채로 불 속에 뛰어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죽는 악습이다.

실질적으로는 순장에 해당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내가 죽은 남편을 자발적으로 따라 죽는 데다 남편과 아내 모두 화장 후 유해를 갠지스 강에 흘려보낸다는 동등한 형태로 장례를 취하므로 순사로 볼 수도 있다.

이 악습은 인도의 여신 사티의 이름을 땄다는 이야기와는 또 다른 설이 있다. 라마야나의 주인공인 라마(비슈누의 화신)가 자신의 아내 시타가 악마의 왕에게 끌려가 다시 돌아왔으나, 그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자신의 아들들이 와서 자신을 라마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이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자신이 다른 이의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 순결을 증명할 길이 없는 시타가 불 속에 들어가 자신의 순결을 증명했다는 설이다.


2. 잔혹성[편집]


가부장 성향이 강했던 과거 인도에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재앙이나 다름없다. 과부는 친척들로부터 가문의 남성들 중 한 명과 동침할 것을 강요당했다. 왜냐하면 남편이 사망할 경우 그 재산이 전부 아내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편을 잡아먹었다는 낙인이 찍혀 일평생을 집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힌두교 관습에 따라 과부들은 재혼도 못 하며 다른 남성을 유혹해서는 안 된다면서 머리카락을 전부 깎아서 대머리인 채로 있어야 하고 장신구를 걸치는 것과 하얀 옷 외에 다른 색깔의 옷을 입는 것 또한 금지한다.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감금과 멸시를 당하며 사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사티는 매우 끔찍한 풍습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불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항이 심해서 환각제를 먹인 채 기둥에 묶는다고 할 정도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화장이 밀폐된 공간이 아닌 바깥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시신이 불타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과부는 길면 10시간이 넘도록 숨이 끊어질 때까지 불태워지게 되면서 말 그대로 끔살당하게 된다. 이들은 처음에 온몸이 불타는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만 전신이 3도 화상으로 뒤덮이고 신경이 죽어 있을 때쯤이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렇게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서서히 지켜보다가 생을 마감한다.

테러리스트가 행하는 충격요법적 처형을 제외하면 인권에 대한 개념이 적은 전근대적 국가에서조차 (대역죄인을 제외하면) 사형사형수를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인다는 점에서 사티는 몹시 잔혹하다고 할 수 있다.


3. 원인[편집]


친척들이 자신들의 가족인데도 과부가 된 여자에게 사티를 종용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때문이다. 사티를 행한 여자는 여신으로 승격돼서 사원이 지어지고 친척들은 막대한 기부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본가와 시가(媤家) 양쪽에 엄청난 부가 보장되니 그들이 합심해서 집안에 과부가 생기면 곧바로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가족을 산 채로 불태우는 인면수심의 행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또 사티를 주관하는 사제브라만들도 결탁되어 있었다. 과부에게 더욱 화려하고 비싼 장신구를 착용하고 순사할 것을 권장했는데, 사티가 끝난 후 재 속에서 그 장신구를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부패도 같이 나타났다.


4. 논쟁[편집]


이렇듯 끔찍한 악습이기 때문에 몇 번을 금해지고 행해지기를 반복했다.

16세기 무굴 제국악바르 대제가 금했으나 그가 사망한 후 다시 행해졌다.

1829년 동인도 회사의 총독 벤틱 경(Lord William Bentinck)이 금지했으나, 인도의 도시 중 하나인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성 벽면에는 1843년 마하라자 만 싱 왕의 장례식에 그의 15명의 아내들이 사티로 죽기 전에 남긴 손바닥 도장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사티는 만연했다.

사티의 금지에 대한 관련 야사가 하나 있다. 1849년에 인도 주둔군 총사령관을 역임하던 찰스 네이피어(Charles James Napier)에게 힌두교 인사들이 면담을 청했다. 네이피어를 만난 이들의 부탁은 사티는 오래도록 이어져 온 전통 풍습의 하나이니 이를 존중해서 도로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네이피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게들 하시오. 과부를 불에 태우는 건 당신네들 관습입니다; 장례식용 장작도 준비하세요. 다만 내 나라에도 관습이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산 채로 태우면 그 놈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그 작자들의 재산도 모조리 몰수합니다. 그러니까 내 목수들은 과부가 희생당하면 관련자 모두를 공개 처형할거란 말입니다. 우리 각자 국가별 관습에 따라 행동합시다.."

-

"Be it so. This burning of widows is your custom; prepare the funeral pile. But my nation has also a custom. When men burn women alive we hang them, and confiscate all their property. My carpenters shall therefore erect gibbets on which to hang all concerned when the widow is consumed. Let us all act according to national customs."


식민지 당국 또한 힌두교도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2,000년이나 지속되던 사티의 폐지에 뜸을 들이다가 선교사들이 굽히지 않고 열성적으로 폐지 운동을 한 끝에 비로소 1829년에야 법으로 사티를 금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질적인 사티 풍습이 법으로 금지된 지 195년이나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몇몇 힌두교 단체에서는 사티 제도의 폐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국가 권력이 제대로 닿지 못하는 시골 구석 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죄 없는 과부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다.[2]

영국BBC 보도에 따르면 이런 일도 있었다. 2006년 8월 22일 인도마디아프라데시주의 툴시푸르 마을에서 열린 프렘 나라얀이라는 남성의 장례식에서 사망자의 아내인 자나크리니라는 40대 여성이 불에 뛰어 들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끔찍하게 여기기는커녕 사티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죽은 여자가 불에 뛰어든 현장에서 종교의식을 행하고 과부가 불에 탄 후 남은 재를 만져보기 위해 몰려들면서 때 아닌 관광 특수까지 누렸다는 것이다. 기사


4.1. 존치 측의 주장과 반박[편집]


존치 측에서는 사티가 과부들이 자진해서 하는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설령 자발적인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티의 잔혹성을 고려하면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선교사 윌리엄 캐리라는 사람이 1802년 한 해 동안 조사한 결과 인도의 캘커타 지방 주위 50km 반경 안으로 438명의 과부가 사티 풍습에 의해 희생되었다.

윌리엄 캐리는 영국 출신 선교사로, 구두 수선공이었다가 인도에서 대학교수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근대 선교사역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 사람들이 윌리엄 캐리, 조쉬아 마쉬먼, 윌리엄 워드를 일컬어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부를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의 조사 자료는 훗날 사티 제도 폐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몇몇 극단적인 지지자들은 "사티가 없어지면 여자들이 남편의 생명을 취하려 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여자가 남편을 죽여서 재산을 가로채는 꽃뱀이 될 거란 주장이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다.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생명보험을 노리고 살해하는 등의 보험사기가 일어나는 건 맞지만 정말로 돈을 목적으로 한 살인이 일어난다면 정말 그러한지 조사해서 처벌하면 될 일이지, 이러한 악습을 유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인도의 성차별의 실태를 생각해 보면 사티가 없어져도 아내가 남편을 살해할 엄두를 낼 수 없다. 위에서도 보듯 남편이 그냥 죽어도 아내 탓으로 몰면서 마구 심한 대우를 하는 게 현실인데, 사티 하나 없어진다고 저런 주장을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 뿐이다.

이는 전형적으로 약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뒤집어서 생각해서 이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당신들의 아내가 죽었을 때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겠나?"라고 물었을 때 실제로 그렇게 대답하고 행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자기는 하기 싫은 행위를 남에게는 강요하는 행위는 악행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 나온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과부를 희생시켜 자기네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여자들이 남편의 생명을 취하려 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피해자는 힘 없는 과부고 가해자는 힘 있는 친척, 브라만 등등이니 당연히 제대로 된 개선이 되지 않을 수밖에.


5. 타국의 유사 사례[편집]


16세기 유럽 몇몇 나라에서는 마녀재판의 1순위 위험군은 과부였다. 재산이 좀 있으면서 그걸 지켜낼 사회적 힘이 없을 경우 더더욱. 특히 중부유럽에서 더욱 심했는데, 이는 고발자들과 심판하는 주체가 과부의 재산을 나눠가질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이런 폐단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사티보다도 더 악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티나 마녀재판이나 과부를 억울하게 죽이는건 똑같지만 사티는 적어도 과부의 명예라도 지켜주지 마녀재판은 마녀를 죄인으로 몰아 불명예스럽게 죽이는 만큼 불명예도 불명예이지만 없는 죄를 억지로 만들다 보니 (과부만 대상으로 한건 아니지만) 재판 대상자들은 온갖 고문을 당해야 했는데 당연히 죄가 있고없고는 중요하지 않아서 사실대로 불 때까지 고문해서 무려 56번이나 고문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다행히 이 사람은 무죄라고 판정내려져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마녀를 처형할 때면 사티와 똑같이 화형으로 죽인다. 심지어 과부 죽이는 사티와는 달리 마녀사냥은 필요하면 마녀로 지목된 과부들의 자식들까지도 끌고 와서 고문하거나 죽였다. 둘 다 막장이지만 마녀사냥은 고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식까지 죽이는 한 술 더 뜨는 막장이었던 것.

고전적으로 유명한 사례는 고대 로마루크레치아라는 귀족 여성이 있었는데, 다른 남자에게 겁탈당한 뒤 남편에게 "다른 남자에게 더럽혀졌다"고 고백한 후에 "벌을 받아야겠다"며 수절을 지키려고 은장도로 죽은 경우다.[3]

고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었다. 나라에서 여자들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수절을 잘하거나 죽은 남편을 따라 자발적으로 자결한 부인들을 기리는 열녀문을 세워주는 등의 사업을 했다. 이에 과부를 희생해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시가와 친가의 사람들이 과부에게 자살을 직접적으로 강요하거나 혹은 직접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사례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열녀문의 의미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켜냈다는 것이지만, 그 후로는 열녀문을 세우면서 조정에서 열녀문을 세워주는 조건으로 열녀로 뽑힌 이들의 존경과 가문의 영광이 직결되는 것도 있지만 열녀를 배출한 마을은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경우가 많아 가문이나 마을에서 열녀로 뽑히기 위해서 일부러 자살로 위장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등의 범죄가 간혹 생겼다. 물론 이런 행위는 공식적으로는 아주 무거운 중죄라서 한번 걸리면 처벌 수위가 장난 아니었다. 주범은 당연히 사형이며 해당 고을의 수령은 파직되고 해당 고을의 지위가 강등당한다. 원래 나라에서 공적을 치하하려던 취지를 억울한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악용하는, 임금과 조정을 대상으로 한 사기(기군망상죄) + 살인죄니까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중국의 어떤 지방에서는 과부들이 단체로 자살했을 때 그녀들을 묻어 줬는데 이를 축제처럼 진행하기도 했다. 동아시아사 교과서에도 수록된 내용.

참파 등 힌두교가 전파된 동남아시아 국가에도 전파된 적이 있다. 이 풍습과 관련된 이야기로 13세기에 베트남 대월국 황제 영종이 여동생인 현진공주(玄珍公主)를 참파의 국왕 자야 신하바르만 3세(制旻, 제민)에게 시집보냈는데, 참파 왕이 죽자 공주가 사티를 피해 대월로 몸을 피하면서 대월과 참파가 전쟁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참고


6. 매체[편집]


필리어스 포그는 아주 작은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말투로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 야만적인 관습이 아직도 인도 땅에 남아 있단 말입니까? 영국인들이 없앨 수는 없었나요?"

"대부분의 인도 땅에서는 이제 그런 희생제를 드리지 않아요. 하지만 미개한 지역까지는 우리 힘이 미치지 못하지요. 주로 분델칸드 지역이 그래요. 그래서 빈디아 산맥의 뒤편 북쪽 지역은 끊임없이 살인과 약탈의 무대가 되고 있어요."

파스파르투가 중얼거렸다.

"불쌍한 여자로군! 산 채로 불태워지다니!"

여단장이 다시 말했다.

"불쌍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죽지 않으면 친척들 때문에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상상도 못할 겁니다. 머리를 빡빡 민 채 겨우 쌀 한 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받거든요. 그렇게 남편이 먼저 죽은 여자는 부정한 여자로 취급되어 한쪽 구석에서 굶주린 개처럼 죽어 가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죽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나 광신적인 신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끔찍한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쌍한 여인들이 죽음을 택하게 되지요. 하지만 때때로 정말 스스로 원해서 제물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어요. 몇 년 전 봄베이에서 살 때, 한 젊은 과부가 정부 관리를 찾아와서 남편의 시신과 함께 불에 타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어요. 물론 관리는 거절했지요. 그러자 그 과부는 봄베이를 떠나 어느 영주의 집에 숨어 있다가 결국 거기서 자신을 제물로 바쳤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중. 시공주니어 김주경 판본.

[4]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인도 여행의 한 파트에서 등장한다.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 일행이 인도 여행을 하던 중에 사티로 죽을 뻔한 아우다라는 여자를 구출한다. 아우다는 분델칸트 자치령의 왕의 아내였는데, 사실 강제적인 결혼이었던 데다 결혼 후 3달 만에 왕이 죽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이런 끔찍한 풍습을 잘 알고 있었는데 크로마티 준장은 인도에서 오래 지냈기에 사티라는 풍습에 대해 알고 있었다. 분델칸트 자치령은 영국 정부의 힘이 닿지 않는 외딴곳이라 이런 잔인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 과정이 매우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강제적임을 아우다 부인의 입과 포그 일행의 생각으로 나타내었다. 이걸 반영했는지, 아우다 부인은 아편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육군 준장 크로마티의 증언으로 사티를 당하지 않을 시 머리를 밀고 멸시받으며 살아가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면서 어떻게 될지도 상당히 상세히 나와 있다. 오죽했으면 기계 같던 포그가 자신의 여행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아우다 부인을 구하려고 나설 정도다.

포그는 자신의 여행 일정에 시간이 남는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구해 주자고 했는데, 같이 가고 있던 크로마티 준장은 "당신도 인간적인 면이 있군요."라고 할 정도였고, 파스파르투는 왕의 시신으로 분장해서 아우다 부인을 구출해낸다. 이 구출 장면이 포그의 인간미와 파스파르투의 재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5]

그리고 이 구출은 마지막에 큰 도움을 준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일주를 마친 포그는 5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내기에 졌지만, 아우다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그 다음날 파스파르투를 목사에게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어제가 아닌 오늘이 80일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의 시간이 되기 직전에 클럽에 도달하여 내기에 이겼다. 아우다를 구출하고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분명히 내기에 졌을 것이다.

원문의 표기가 Sutty여서 '서티'라고 번역하는 판본도 많다.

7. 관련 문서[편집]



[1] 이 표기는 19세기에 주로 등장한다.[2] 후술할 80일간의 세계일주에도 영국의 통치력이 잘 먹히지 않는 외진 지역은 아직도 사티가 행해진다는 내용이 나온다.[3] 이 사건은 흔히 말하는 로마 공화국의 출범을 불렀는데 이유는 루크레치아를 겁탈한 남자가 바로 당시 로마 왕의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4]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 힘', '정부'는 인도 제국을 다스리는 영국 정부를 말하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인도 공화국 정부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상황이다.[5] 이때 아우다를 구하기 위한 작전 중, 죽은 왕으로 변장해 사람들을 당황시켜서 도주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실패하면 자신도 같이 통구이가 될 수 있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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