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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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3. 기타
4. 출처


1. 개요[편집]


사타리(沙吒利)[1]태평광기에 인용된 당나라 소설 『류씨전(柳氏傳)』에 등장하는 번장(蕃將)이다.

류씨전의 등장하는 인물들 중 유일한 악역이다.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아예 대사가 없다.[2]

사타리의 출신에 대해서는 위구르족이라는 설[3] 혹은 백제유민의 후손설[4]등이 있다. 백제인설을 따를 경우 성씨는 ‘사타(沙吒)’ 씨로, 백제 대성팔족 중 사씨 가문 출신으로 본다.[5]


2. 행적[편집]


류씨전에 의하면 일찍이 공을 세운 번장 사타리는 한익이 후희일의 휘하에서 종군하는 동안 한익의 부인이었던 류씨의 외모에 반해서 그를 강제로 겁탈한 후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6]

한편 상관인 후희일이 좌복야 관직에 임명되어 장안으로 오면서 휘하 막료였던 한익도 후희일을 따라 장안으로 오게 되었다. 한익은 류씨의 행적을 듣게 되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타리한테 항의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익의 딱한 사정을 알게된 장수 허준은 사타리가 집에 부재한 틈을 타서 류씨를 사타리의 집에서 빼내주었다.[7]

이후 상관인 후희일이 한익과 류씨의 일을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서 한굉과 류씨의 일을 알려줬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서 사타리를 불러 류씨를 한굉에세 돌려보내게 하고 대신 막대한 돈을 주고 체면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3. 기타[편집]


  • 남송 시기에 지어진 언주시화(彥周詩話)에는 ‘미인은 이미 사타리에 속했은니(佳人已屬沙吒利)’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류씨전 이후 사타리는 ‘남의 아내를 빼앗는 고위 인사’나 ‘권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실존여부가 불확실한 인물이다. 사타리는 류씨전과 관련된 문헌들에만 등장하며[8] 정사류 사서들에서는 일절 등장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

4. 출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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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사질리(沙叱利)로도 표기된다.[2]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은 당나라 황제도 작중 조서를 통해 자기 의견을 드러낸 것과 달리, 사타리는 자신의 애첩이 뺏겼는데도 아무런 의견표명을 하지 않는다.[3] 중국 학자 王夢鷗의 설. 류씨전에서 황제가 사타리에게 2백만 전을 주고 체면을 세워줬다’(朝廷賜錢二 百萬)’는 기술을 근거로, 자치통감에서 당숙종이 안사의 난 진압에 위구르족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장안성의 금은과 비단, 평민은 모두 회흘(回紇)의 소유가 된다’는 조약을 맺은 것이 해당 기술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4] 중국학자 姜清波, 한국 중문학자인 정재서 등이 주장한 설. 이 경우 당나라로 투항한 사타상여, 사타충의 등처럼 백제 대성팔족 중 사씨 출신으로 본다.[5] 1726년 저술된 고금도서집성에서 사타리는 사타충의, 사타의와 함께 사타씨로 분류되었다.#[6] 원래 부부였던 한굉과 류씨는 안사의 난(천보의 난)이 터지면서 서로 살길을 찾아 한굉은 절도사 후희일의 막료가 되었고, 류씨는 비구니가 된 상태였다고.[7] 허준은 사타리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류씨를 찾는다고 거짓말을 쳐서 사타리의 집으로 들어가 류씨와 함께 빠져나왔다.[8] 사타리가 등장하는 문헌들은 당나라 말기에 저술된 이문집(실전됨), 송나라 대 편찬된 태평광기, 유설, 취옹담록 등인데 모두 류씨전과 그 이본들의 내용을 수록한 것이라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고금도서집성에서는 그를 사타충의, 사타의와 함께 사타씨로 분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