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섭(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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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사섭/head_of_statue_snake_marsh.jpg
시호
선감가응령무대왕(善感嘉應靈武大王)
왕호
사왕(士王, 시브엉/Sĩ Vương)
성씨
사(士)

섭(燮)
베트남식 이름
시 니엡(Sĩ Nhiếp)
생몰 년도
137년 ~ 226년
재위 년도
187년 ~ 226년
1. 개요
2. 언어별 표기
3. 생애
4. 사후
5. 평가
6. 가족 관계
7.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 삼국시대 손오의 인물이자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교주를 다스린 인물로 자는 위언(威彦)이다. 교주(交州) 창오군(蒼梧郡) 광신현(廣信縣) 사람으로 중국 최남단(현재의 광둥 성, 광시 자치구, 베트남 북부 및 중부)에 위치했던 교주의 자사였다. 훗날 베트남쩐 왕조(陳朝)는 사섭을 '선감가응령무대왕'(善感嘉應靈武大王)으로 추존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언급조차 없고, 정사 삼국지에만 등장한다. 묘하게도 반삼국지에는 등장한다.[1]

교주는 후한의 명장 복파장군 마원쯩 자매{쯩짝(Trưng Trắc),[2] 쯩니(Trưng Nhị)}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후한에 속하게 되었지만 항상 반항적이었고, 결국 유능한 인물 한 두명에 의존하는 형태로 반발을 눌러왔는데 사섭 역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2. 언어별 표기[편집]


파일:attachment/사섭/statue_of_snake_marsh.png
중국어
士燮
베트남어
Sĩ Nhiếp


3. 생애[편집]


본디 사섭의 집안은 노국(魯國) 문양(汶陽)[3]현이 본관이었으나 6대 전에 전한이 멸망하고 신나라가 세워지는 혼란기를 피해 교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사사(士賜, Sĩ Tứ, 시 트)는 일남[4]군 태수를 지냈다. 이러한 배경이 사섭 특유의 베트남 통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즉, 이전의 남월 지방에 세워진 군현을 다스리는 한족 지방관들은 대개 교주 밖에서 왔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어둡고 통치하려는 의욕도 없었던 탓에 빨리 중앙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동시에 재산을 긁어모을 목적으로 지역민들을 수탈했다. 그러나 교주에서 6대를 살아오고 또 아버지가 교주 최남단인 일남군의 태수를 지낸 배경으로 말미암아 사섭은 이 지방의 사정을 잘 알았고, 또 이곳을 떠나 중앙으로 진출하기보다는 눌러앉아서 안정된 통치를 할 유인이 있었던 것이다.

사섭은 젊어서 경사, 즉 낙양에 유학해 《좌씨춘추》를 익혔으며, 아버지 사사의 상을 치른 후에 교지(交沚)군의 태수가 되었다. 사섭이 교지 태수를 지내던 196년에 당시 교주 자사였던 주부(朱符)가 이민족에게 살해당해 교주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사섭이 표를 올려 각 형제들을 태수로 임명했다.[5] 사일은 합포군 태수, 사유는 구진군 태수, 사무는 남해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사씨 일가는 교주 전체를 차지했고 사실상 독립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6]

사실 주부가 살해된 직후에도 후한 조정의 영향력은 그때까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장진(張津)을 파견하여 교주자사로 임명했는데, 장진은 이후에 그의 부장 구경(區景)에게 살해되었다.[7][8] 조정에서는 사섭을 교지태수 겸 수남중랑장에 봉하고 교주의 7개군(교지, 남해, 창오, 울림, 합포, 구진, 일남)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중원의 혼란을 피해 교지로 도망쳐 온 한족 망명객들을 우대하여 교지 일대의 문물을 개방했으며, 이 과정에서 베트남에 한자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서 그 지방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는 등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사섭은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경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춘추》에 능해 주해를 달기도 했고 원휘순욱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베트남 통치에서는 유교를 위시한 중국 문화를 이식하는데 적극적인 관심이 없었고, 이즈음 남방을 통해 들어온 불교 등에도 관용을 베풀었다. 이는 이후 베트남사가 중국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영향을 미쳤다.

201년부터 죽을 때까지 손권에게 신속하여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진상품을 매년 빠짐없이 보냈다. 손권은 210년 보즐을 교주 자사로 보내면서도, 동시에 사섭을 좌장군에 임명했다.

사섭은 옹개가 일으킨 남만 반란의 실질적인 배후세력이었다. 반란을 유도한 공로로 손권에게 상까지 받았으며 아마도 재정 지원을 해준 듯하다.[9] <삼국지 시리즈>에서 교지와 남만이 연결되는 건 여기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실제로 《삼국지》의 남만은 사천성 남부부터 운남성 일대에 이르는 지역으로, 교주와는 바로 옆에 붙어있다. 이 길은 몽골군이 다이비엣(대월)의 쩐 왕조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운용했던 루트였으며, 당나라 시기에는 운남성에 세워진 남조(南詔)가 교주 지역을 공격해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참고로 남조는 후에 김용의 무협으로 유명한 대리국의 전신이었다.

226년 무려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실 137년 출생이면 조조, 원소, 손견, 유비보다도 한 세대 앞선 동탁, 왕윤, 도겸, 채옹, 황보숭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4명의 군웅이 다 죽었을 때도 살아 있었고 그보다도 한 세대 뒤이자 자기보다 50년이나 연하인 조위 문제 조비랑 같은 해에 죽었으니 무진장 장수한 셈이다.

유경숙(劉敬叔)의《이원》(異苑) 권7에 따르면

창오왕(蒼梧王) 사섭(士燮)은 한말에 교지(交趾)에서 죽었는데, 남쪽 변경에 장사지냈다. 무덤에는 항상 짙은 안개가 끼었고, 신령스럽고 이상한 기운이 불항(不恒)하여 누차 난리를 피하니 (아무도) 다시는 (무덤을) 파내지 않았다. 진나라 흥녕(興寧) 연간에 태원(太原) 사람 온방(溫放)이 자사가 되었는데, 기병들을 대동하여 무덤을 파보게 하였다. (무덤을 파고) 돌아와서, 말들이 죽었다.



4. 사후[편집]


사섭이 죽자 오나라에서는 교주를 교주와 광주로 분할했는데 문제는 이 교주자사와 광주자사를 사씨 일족과 관계없는 인물들로 임명한 것이었다. 사섭의 아들인 사휘를 안원장군으로 임명하기는 했지만 숨은 의도[10]가 대놓고 보였기에 당연히 사씨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광주자사로 임명된 여대[11]에게 설득(!!)당해 사휘 포함 사섭의 여섯 아들들은 다시 투항하게 되었다. 물론 죄목이 반란인 이상에야 용서는 없었지만, 문제가 되는 건 여대가 군수의 자리만 해임하고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권했다는 점이다. 여대는 이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조서를 읽어주고 처형해버렸다. 이 때문에 《위씨춘추》를 쓴 손성은 여대가 사섭의 아들들을 거짓으로 투항시켜놓고 모두 죽게 한 것은 신의가 없으니, 여씨 가문의 봉록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신랄하게 깠다.[12][13]


5. 평가[편집]


이렇게 사섭은 교주를 장악하였고, 주부의 죽음 이후 몇 년간, 사섭은 고요한 교주를 별 문제없이 다스린다. 교주는 형주처럼 전란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이 의탁하는 곳이 되었고, 상업으로 번성하였으며, 사섭의 통치는 조타에 비견될 정도로 칭송 받으며 베트남에서는 아직까지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월남 지방(현재 하노이 인근의 북베트남)의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이유로 베트남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며, 사왕(士王)으로 칭송받는다. 이 시기의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후한 제국에 저항하는 경향을 보이면서도 유능한 지배자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했다. 왕이라 일컫는 인물은 복파장군 마원, 왕망의 신나라 시기에 한나라의 문물을 전파한 석광, 후한 초기 농사 기술과 철제 농기구를 전파한 임정, 그리고 사섭 등 네 명이다. 사섭은 전•후한 400년의 장대한 역사를 통틀어서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중국 출신 지도자였던 것이다.

사섭은 남월을 지키며 마음대로 하고 생을 마쳤지만, 그 아들에 이르러서는 신중하지 못하여 스스로 화를 초래했다. 아마도 평범한 재능으로 부귀함을 즐기고 험한 지세를 부지한 것이 그로 하여금 이 결과가 되게 했을 것이다. - 진수


우리나라가 시서(詩書)가 통하고 예악(禮樂)을 익히며, 문헌(文獻)의 나라가 된 것은 사왕(士王)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공덕은 어찌 (사섭의) 당대에 특별하게 베풀어져, 멀리 후대에까지 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으랴? 자식의 불초함은 곧 자식의 죄이다. - 《대월사기전서》 오사련

사섭이 지배한 영역이 지금의 베트남 북부와 광서장족자치구, 그리고 홍콩, 마카오를 포함한 광둥성 전역이니 땅의 크기와 산물 및 중요도를 따져봐도, 그리고 이렇게 넓은 지역을 90세가 될 때까지 순조롭게 다스린 것을 보면 본좌급이 맞다.[14] 게다가 사섭은 한국 고등학교세계사》 교과서(베트남사 파트)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아래에 나오는 '시 히엡(니엡)'이 바로 사섭이다.
1세기 전반 치콴(錫光; 석광)이 유교를 도입하였고, 3세기 시 니엡이 한자를 도입하였으며, 5세기 초 드 추에 드(杜慧度; 두혜도)가 학교 제도를 도입하였다고 한다.(교학사 《세계사》 교과서 P.53)
중국사 파트에서 삼국시대 자체를 짧게만 언급하고 바로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로 넘어가는 것에 비하면(...) 사실 《삼국지연의》라는 소설 덕분에 삼국시대가 대중적으로는 상당한 인기가 있지만 사실 역사학적으로는 중국사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시기인데[15], 삼국시대에 일어난 일들로 인해 후대에 끼친 영향이 구품중정제 정도를 제외하면 별로 없기 때문이다.[16] 반면 사섭은 베트남사에서는 필수요소나 다름없으니, 일반적인 인지도와 달리 역사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6.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사사(士賜)
  • 동생
  • 아들
  • 조카: 사광[17]


7. 미디어 믹스[편집]



7.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사섭(삼국지 시리즈) 문서 참조.


7.2. 토탈 워: 삼국[편집]


파일:사섭_토탈_워_삼국_스크린샷.jpg

도겸, 엄백호에 이은 3번째 FLC 추가 세력으로, 네 번째 DLC 흉폭한 야생에서 추가된다. 타입은 모사. 군웅할거,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 플레이가 가능하다.

추가가 확정되기 이전에는 논플레이어블 마이너 군벌 세력으로 등장했는데, 군웅할거 캠페인 외에도 천명 캠페인과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 사섭 세력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고유 일러는 없고 클론 군주였다. 황제가 되면 나라 이름은 '파(巴)' 국이 되었었다. 상당히 구석진 곳에 있는데다가, 주목 세력임에도 칭제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있어서인지 무주공산인 익주 남부~교주 일대를 근거로 칭제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18]

거의 모든 플레이어블 팩션들이 다 강북에서 시작하고 유일하게 강남에서 시작하는 손견도 강북 지역과 강을 두고 국경을 맞대고 있어 마냥 빈 땅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 AI 사섭은 맵 남서쪽 끝, 성도에서 내려가고 운남에서도 더 내려간(...) 교지 지역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인근 몇 개 군을 통틀어 견제 세력이 아예 없다. 미개발지역이라 빈 땅부터 하나씩 시작해야 하지만 향신료 시장도 있고 무역항도 있어 시간만 조금 소모하면[19] 혼자서 빈 땅이랑 한나라 땅 느긋하게 일궈가면서 배 두드리며 살 수 있다. 덕분에 플레이어가 강북 지역에서 피터지는 싸움을 하며 평정한 뒤 황제를 선포하면 손견의 오나라와 함께 사섭이 파 제국을 선포하며 같이 황제가 되는 꼴을 왕왕 볼 수 있다. 사실 캠페인을 하다보면 두 판 중에 한 판은 황제 사섭을 구경할 수 있다.

FLC로 추가돼서 플레이어블 세력이 되고부턴 황제가 된 후의 나라 이름이 구진(九眞)으로 바뀌었고 고유 일러스트 등이 추가되었고, 고유 자원으로 가족을 관직에 앉히면 얻게 되는 '위엄'이라는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대신 남만 세력이 추가돼서 전쟁과 외교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도록 바뀌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7.3. 삼국전투기[편집]


브리타이 크리다닉으로 패러디되었는데, 두번째 컷을 보면 데컬쳐라 적혀 있다. 본인이 첫 등장한 남만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남만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오의 충실한 신하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인품과 학문으로 전국구인 인물이라 전국에 영향력이 크다고 묘사되었으며, 그래서 옹개도 사섭의 영향을 받아 촉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됐다.

남만 전투 (2)편의 2컷에서는 '인품과 학문은 혼자 쌓아야 는다.'라며 뭔가 솔로부대스러운 면모를 보였지만, 타이틀 컷에 쓰인 소개문에서는 후에 솔로는 탈출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7.4. 삼국지톡[편집]


파일:사섭(삼국지톡).jpg

입촉 16화에서 언급으로 등장.

[1] 마운록같은 가공 인물 창조와 함께 《반삼국지》가 가장 고평가를 받는 부분 중 하나다.[2] <대항해시대 4>에서 동남아시아 패자의 증표인 츈차크의 왕관의 츈차크가 바로 이 쯩짝이다.[3] 예주(豫州) 지역으로, 지금의 산동(山東) 연주부(兖州府) 영양현(甯陽縣) 동북쪽이다.[4] 지금의 베트남 녓남성 일대 당시로선 한나라의 최남단 지역이었다.[5] 196년은 조조가 허현으로 천도한 해이다. 이 시기에 표를 올렸다는 말은 실제로 중앙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임명하고 명분상 흉내를 내었다는 뜻이다. 원소, 공손찬, 유표 등 많은 군벌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으며, 조조가 연주목이 된 연유도 원소가 중앙 정부에 표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정작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진짜 연주목 금상은 조조에게 공격받아 쫓겨났다.[6] 현재 행정구역으로 따지자면 중국 광둥성 & 광서장족자치구베트남 북부에 걸친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대세력가가 된 것이었다.[7] 《배송지주》의 《이주춘추》(二州春秋)에 따르면 장진은 건안 6년(201년)에 교주목이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 직후 얼마되지 않아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8] <사섭전>에 따르면, 장진이 죽자, 형주의 유표는 영릉의 뇌공(賴恭)을 보내 장진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때 창오군 태수 사황(史璜)이 죽었으므로, 유표는 또 오거(吳巨)를 보내 그를 대신하여 뇌공과 함께 가도록 했다. 하지만 뇌공은 오거에게 살해당했다. 오거는 나중에 손권에 의해 봉해진 보즐에게 불복종을 이유로 유인되어 살해되었다.[9] 자신이 죽은 후 오나라가 교주를 탈취할 것이라 예상하고, 남만까지 아울러 오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하려 했던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0] 교주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사씨 일족을 배제하고 싶다는 의도.[11] 여담으로 사섭을 능가하는 삼국시대 장수의 끝판왕 중 1명. 소열제 유비랑 동갑이면서 그 손자뻘인 사마사보다도 나중에 죽었다. 향년 96세.[12] 여씨 가문도 사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후손 한 명 남기지 못했다는 뜻이다.[13] 물론 반란을 일으킨 이상 이정도 트릭은 용인될수도 있는 문제이기는 하다. 삼번의 난 당시의 청 성조 강희제 역시도 경정충을 항복시킬 때 그를 속인 바 있다.[14] 물론 유표나 유언처럼 자신이 통치하는 1개 주를 무난하게 다스리고 죽은 이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은 아얘 주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던 반면 사섭의 경우는 교주 일대의 태수 자리만 나눠먹기하였지 정식으로 교주를 다스리는 권한까지 쥐지는 않았다.[15] 그나마 오나라장강 이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첫 시작이 된 나라라서, 중국의 경제사를 논할 때 꽤 중요하게 다뤄진다.[16] 그나마 도교의 일파인 천사도(오두미도)가 이 시기에 널리 확산되기는 했다.[17] 사섭의 동생인 사일의 아들이다.[18] 특히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는 마등, 유장과 함께 칭제가 불가능한 주목임에도 칭제해버리는 경우가 많다.[19] 말이 미개발지역이지 기반은 다 갖춰져있어 식량이고 수입이고 여유롭고 오른쪽 남해는 논밭에 축사에 교역항까지 갖춰져있어 풍요롭기로는 장안과 낙양이 부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