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크라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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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17대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
Bruno Kreisky


파일:Bruno_Kreisky.jpg

출생
1911년 1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마르가르텐
사망
1990년 7월 29일 (향년 79세)
오스트리아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묘소
빈 중앙 묘지
임기
오스트리아 외무부 장관
1959년 7월 16일 - 1966년 4월 19일
오스트리아 총리
1970년 8월 21일 - 1983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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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빈 대학교 (법학 / 박사)
가족
배우자 페라 퓌르트[1], 자녀 2명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2]
소속 정당

약력
주 스웨덴 오스트리아 대사
오스트리아 연방 하원 의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당수
오스트리아 외무부장관
오스트리아 총리

1. 개요
2. 생애
2.1. 외교관으로서
2.2. 전후 최장수 총리로서
2.3. 말년
3. 업적
4. 성향
5.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의 외교관 출신 총리. 무려 13년간 오스트리아의 총리를 역임한 인물로, 오스트리아 역대 총리중 가장 오래 집권했으며,[1] 오스트리아의 좌파 계열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오스트리아를 넘어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등과 더불어 1970년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지도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2. 생애[편집]


오헝제국 말기에 오스트리아 빈의 마르가르텐 구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섬유제조업 공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체코-슬로바키아계였다. 그는 15세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는데, 여기에는 고된 노동에 혹사당하던 아버지와 인종차별을 당하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1929년에는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졸업하였으며, 이 시기 유대교를 떠나 무종교에 귀의했다.

1930년대에는 엥겔베르트 돌푸스 정권의 파시즘적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가, 1935년 1월 체포되어 구금형을 당했다가 1년 뒤 석방되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독일에 합병되자 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적 정책을 피할 목적으로 스웨덴으로 망명해 나치독일이 패전할때까지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2.1. 외교관으로서[편집]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하여, 독일어 뿐만 아니라 스웨덴어도 모어 수준으로 하고 스웨덴의 정치 상황에도 너무 익숙해져있던 그는 아예 법조인의 꿈을 접고 전문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오스트리아에 귀국했을때, 크라이스키만큼 스웨덴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바로 스웨덴의 오스트리아 공사가 되어 출세의 길을 걷는다. 이후 귀국하여 1956년 오스트리아의 연방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9년 율리우스 랍 내각에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율리우스 랍 총리가 사퇴한 이후 들어선 알폰스 고르바흐 내각에서도 전문 외교관으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유임되었다. 이후 고르바흐 총리가 총선 패배의 책임으로 사퇴한 이후 요제프 클라우스 내각에서도 또다시 유임되며 그는 3명의 총리를 둔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는 유럽자유무역협정 체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제3세계 국가를 위한 마셜 플랜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1966년 총선에서 요제프 클라우스가 이끄는 인민당이 단독 과반을 확보하자, 사민당과의 연정이 파기되면서 크라이스키도 장관직을 잃었다.


2.2. 전후 최장수 총리로서[편집]


1967년 크라이스키는 클라우스 총리의 독단적 정책 결정을 비판하면서 사회민주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요제프 클라우스 총리는 자신이 추진했던(...) 언론 개혁법으로 인해 훨씬 자유로워진 언론의 난타를 당하면서 인기를 잃었고, 1970년 치러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전후 최초로 1당에 올라섰다. 요제프 클라우스 총리는 이를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받아들이며 총리직을 브루노 크라이스키에게 넘겼고, 그렇게 전후 최초의 사회주의자 오스트리아 총리가 탄생했다.[2]

크라이스키는 총리로서 연방 하원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의석수를 165석에서 183석으로 늘리고, 소수 정당들도 의석을 확보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제적인 요소들을 선거법에 추가하였다. 이후 그는 바뀐 선거법에 따라 의회를 바꾸기 위해 1971년 조기 총선을 실시했는데 50.1%를 득표하여 오스트리아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한 정당이 단독으로 50% 이상의 득표율을 받아가는 성과를 얻었다. 1975년 총선에서도 50.4%, 93석을 얻어 3선을 기록했으며, 1979년 총선에서는 51.1%, 95석을 얻어 4번의 선거중 무려 3번의 선거에서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다. 가히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인기가 좋은 총리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

다만 크라이스키의 고령이 문제가 되었다. 1981년에 크라이스키는 70세 생일을 맞이했고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서나 야당에서나 심지어는 동료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크라이스키의 업무 수행 능력을 우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크라이스키가 거의 13년 가까이 이끌었던 좌파 단독 정부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보수파의 반발을 샀고 국민들도 크라이스키의 독주에 피로감을 가지게 되었다. 1983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또다시 1당 지위를 차지하였지만, 과반 의석을 상실했다. 크라이스키는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5선을 포기하고 후임자에게 총리직을 양보하였다.


2.3. 말년[편집]


이후 크라이스키는 사회민주당의 명예 당수로서, 가끔씩 보수 야당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던 여당 사회민주당의 정책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남기면서 정치 논객으로 활동했다. 총리 퇴임 1년 이후에는 건강 악화로 신장 이식을 받기도 했다.

1990년 7월 빈에서 사망했다.


3. 업적[편집]


크라이스키는 현재의 오스트리아를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임기중에 선거법이 개정되어 소수정당의 원내 입성이 유리해졌으며, 여성에 불평등했던 법안이 수정되고, 사생아에 대한 차별이 금지되었으며, 주당 근무 40시간법의 통과,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계 소수 주민들을 배려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석유 파동을 겪은 이후에는 화석 연료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시행하는 등 때에 따라 유연한 모습도 보여줬다.[3] 이 외에도 크라이스키의 집권기에 통과된 법은 수없이 많은데, 그중 일부만 제시해도 다음과 같다.

  • 성평등법 제정
  • 4주간의 연차 휴가법 제정
  • 무료 건강검진법 제정
  • 학생을 위한 선택적인 건강보험 제도 도입
  • 육체노동자에 대한 조기 퇴직연금제도 도입
  • 자영업자 여성에게 16주간의 출산 수당제도 도입
  • 주택 재산법 제정
  • 출산 전후 근로 중지 기간을 8주로 확대
  • 소비자 보호법 제정

그의 개혁 정책들은 이전까지 가톨릭 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의 낡은 악습만들 답습해오던 오스트리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으며, 보다 오스트리아가 68혁명의 영향으로 현대화될수 있는게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크라이스키는 현대 오스트리아에서 좌우파를 막론하고 가장 훌륭했던 총리로 자주 꼽히곤 한다.


4. 성향[편집]


그는 사회주의자였으나 동시에 민주주의자였기에 소련과 같은 권위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대단히 경멸, 혐오하였다. 이 때문에 197~80년대 소련의 반체제 인사들을 지원하고,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에게 직접 민주화 운동가를 석방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대인이면서도 시온주의를 반대하였다. 오히려 그는 팔레스타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협정을 맺고, 이스라엘의 리쿠드를 파시즘이라고 맹렬히 비난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크라이스키는 유대인이면서 네오나치 논란(...)이 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크라이스키의 내각에 총 4명정도의 나치당 출신 인물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을때, 크라이스키는 "젊은 날에는 누구나 다 실수한다"면서 이들을 유임시켰다.[4] 시몬 비젠탈은 크라이스키를 이스라엘과 홀로코스트를 모욕한 혐의로 고소하기도 하였다.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사민당
]]

1925 - 1990
정계 입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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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위인 프란츠 프라니츠키(Franz Vranitzky)도 그와 같은 사민당 출신이다.[2] 엄밀히 말하면 카를 레너 이후 첫번째이나 이때는 거국내각이었다.[3] 다만 원전 발전은 1978년 국민투표 결과 부결되었다.[4] 실제로 요제프 클라우스 등 역대 오스트리아 총리중 나치당에 부역한 사례가 적지 않긴 하다. 다만 이들은 주로 보수 우파 성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