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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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제5대 연방총리
헬무트 하인리히 발데마어 슈미트
Helmut Heinrich Waldemar Schmidt


파일:800px-Verteidigungsminister_Helmut_Schmidt.jpg

출생
1918년 12월 23일
바이마르 공화국 함부르크 바름베크
사망
2015년 11월 10일 (향년 96세)
독일 함부르크 랑겐호른
정당


병역
독일 국방군 공군 중위 전역
재임기간
제5대 연방총리
1974년 5월 16일 ~ 1982년 10월 1일
모교
함부르크 대학교 법과대학
종교
개신교 (독일 개신교회)[1]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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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군복무
2.3. 정치입문
2.4. 연방총리 시절
2.4.1. 1980년 전후 동서독 핵우산 경쟁
2.5. 정계 은퇴 이후
2.5.1. 논란
3. 어록
4. 동시대인들의 평가
5. 여담





독일연방공화국 제5대 연방총리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독일연방공화국의 제5대 총리.

재무장관 시절이던 1974년 당시 현직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간첩 사건과 섹스 스캔들로 사임하자 총리직을 승계했다. 총리 계승 후 두 번의 총선에서 모두 CDU/CSU에 패하며 제2당에 머물렀지만 전임자 빌리 브란트와 마찬가지로 연정을 통해 총리직을 이어갔다.[2] 이후 1982년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의회에서 불신임이 가결되어 그 자리에서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CDU/CSU헬무트 콜이 즉시 총리에 취임했다.

빌리 브란트,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달리 슈미트는 사민당 총재로 선출된 적이 없다. 슈미트가 총리직에 있을 때도 당 총재는 빌리 브란트였다. 다만 오늘날 빌리 브란트 등과 함께 독일 사민당을 대표하는 총리 중 한명이긴 하다. 21세기에도 독일 최고의 총리를 묻는 여론조사 등에서 1위도 제법 할 정도로 인기가 좋은 모양.[3]

사민당에 소속되어 있긴 했지만, 경제 관료 출신인 그는 중도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상당히 우파적인 정책을 추진했던 총리였고 특히 경제 정책과 관련해서 당내 주류에 맞서 본인의 소신을 주장한 편이었다. 때문에 당내 강성 주류에게 많은 갈등과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사민당 정치인 중 대중적인 이미지와 인기가 단연 탁월했기에 당내 주류는 슈미트가 내심 못 마땅해도 태클만 걸 뿐 그를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고 계속 선거에서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4]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1918년 12월 23일 독일함부르크에서 교사인 구스타프 루트비히 슈미트와 루도비카 코흐의 2남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헬무트 슈미트의 아버지는 부모(=헬무트 슈미트의 조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사생아 출신이었다. 사실 헬무트 슈미트의 생물학적 친할아버지는 유대인 사업가이자 은행가 루트비히 그룸펠이었다. 젊은 시절 그룸펠은 사업차 방문한 함부르크에서 만난 웨이트리스 프리드리케 벤첼과 짧은 만남을 가졌고 이들 사이에서 헬무트 슈미트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루트비히 슈미트가 태어났다. 그러나 루트비히 그룸펠은 자신의 혼외 아들인 구스타프에 대한 어떠한 법적인 책임과 부양도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룸펠은 이후 헤트비히 라이저라는 젊은 여성과 정식으로 결혼한 후 자신만의 가정을 꾸렸다. 구스타프 루트비히 슈미트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부두 노동자인 구스타프 슈미트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의 가정에 입양되어 길러졌다. 헬무트의 이러한 출생의 비밀, 특히 그의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반유대주의 때문에 그의 가족들만이 아는 비밀로 오랜 시간 동안 묻혀 있었다.[5] 헬무트의 생물학적 친할아버지인 그룸펠은 1900년 은행을 창업하였다. 그러나 1935년 유대인 그룸펠은 나치에게 은행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다.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룸펠과 그의 가족들은 수용소로 끌려가지는 않았고 모두 타지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이미 75세의 고령이었던 루트비히 그룸펠은 얼마 후 자연사했다.

슈미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에게 유대인의 혈통이 흐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무렵은 10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Thomas Karlauf의 저서에 따르면 헬무트의 나이 15 ~ 16세 무렵에 헬무트의 양할머니 카타리나 슈미트가 가족들에게 구스타프 슈미트의 친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독일공영방송 ZDF의 전기 다큐멘터리에서 묘사된 바로는, 다른 종류의 가정 통신문인것처럼 위장해서 아버지의 서명을 받아 당시 한창 청소년 사이에서 세를 불리고 있던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려고 하다가 딱 걸려서 그대로 불꽃 싸다구행(...) 이후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가 유대계 혈통을 타고난 걸 전해듣는다.

슈미트의 회고에 따르면 10살 무렵 자신의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슈미트는 자신이 나치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치에 대한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훗날 말했다.

하지만 슈미트는 부모의 반대에 불구하고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다. 이후 그는 14세 때 그는 그룹 리더(Scharführer)가 되었고, 18세때 징집되어 입대할 때까지 계속 활동했다.

이처럼 슈미트는 10대 시절 히틀러 유겐트의 그룹 리더였고 나치와 관련하여 매우 불분명한 행각과 입장으로 인해 나치 가입 떡밥들이 나돌았다. 하지만 슈미트가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가 적극적인 나치 활동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들이 드러나지는 않았기에 슈미트는 아슬아슬하게 이런 논란을 비켜가곤 했다. 하지만 이는 나치에 저항했던 경력이 분명했던 전임자들과는 차이나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그가 정책적으로 중도 실용주의를 추구했다는 점과 결부되면서 우파 뿐만 아니라 좌파들 사이에서도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슈미트의 나치 관련 논란은 2014년 관련 저서가 발간되며 다시 한번 논쟁이 되었다. 1942년에 작성된 나치 문건을 근거로 그가 충설한 나치 당원이었다는 것. 하지만 슈미트가 고령으로 투병하던 시점이었고 몇 개월 후 그가 사망하면서 그냥 묻혀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슈미트의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내각불신임결의를 맞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인 1982년으로, 그와 단순히 정치적 동반자 관계를 넘어서 친구관계로 평생 우정을 나눈 프랑스의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6]이 밝혀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2.2. 군복무[편집]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슈미트는 21세였기 때문에 징집되었다. 초기에는 브레멘 지역에서 대공 근무를 맡다가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비롯한 동부전선 초창기의 몇몇 전투에 참가한다.[7] 이후 독일로 귀환한 슈미트는 재정부 및 법무부[8]에서 근무하다 1944년 12월 독일 공군 소속으로 벌지 전투의 서막을 장식한 독일군의 아르덴 공습에도 참가한다. 이 때의 공로로 철십자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심하게 기울어진 전세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없었고 1945년 4월, 그는 뤼네부르크에서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같은 해 8월 석방된다. 최종계급은 중위.[9] 1958년, 독일 연방군 예비역 대위로 진급하였다.


2.3. 정치입문[편집]


종전 후 1945년 슈미트는 사민당에 입당하였다. 서독에서 우파 정치인들은 1949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지도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있었던 반면, 지하 조직이 건재했던 사민당은 독일이 항복한지 두어달만에 조직을 재건했다. 과거에 나치에서 출세하려다가 유대인 혈통 때문에 좌절했던 슈미트는 이번에는 신속하게 사민당에 입당했고, 덕분에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는 이미 사민당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진 청년 정치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온 슈미트는 함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 경제학과 국제정치학을 공부하였다.[10] 특히 당시 함부르크대 교수였던 칼 쉴러(Karl Schiller)의 총애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칼 쉴러는 교직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민당 소속의 정치가로도 활동했는데, 그는 당시 당내 기반이 약했던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이 되면서 사민당의 지도부로 성장해 나간 인물이었다. 칼 쉴러는 자신의 제자인 슈미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슈미트가 당내에서 고속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여담으로 칼 쉴러와 헬무트 슈미트는 사제지간이지만 나이 차이는 7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슈미트가 21세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8세에 수용소에서 풀려나 대학에 들어간 반면, 칼 쉴러는 만24세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수재였고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슈미트는 1947년 독일 사회주의자 학생 동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 의장이 되면서 사민당 내에서 청년 선두 주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49년 경제학 디플롬(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 칼 쉴러 밑에서 함부르크 시청 경제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52년 칼 쉴러 밑에서 함부르크시 경제교통부 간부가 되었다. 1952년 이후 칼 쉴러가 빌리 브란트의 핵심 측근이 되자 슈미트도 함께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1953년 연방하원에 당선되었다. 1957년 사민당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58년 사민당 국가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1년부터는 함부르크시정회로 자리를 옮겨, 함부르크시청에서 제2인자인 내부참사관(Innensenator)으로 일하였다. 1962년 2월 16일과 17일에 엘베강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는, 월권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재난대책을 진두지휘하고 경찰과 군병력을 신속히 투입하여 함부르크시의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줄였다. 딱부러진 일처리,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호리호리하고 핸섬한 외모로 매스컴을 통해 그는 이때부터 전국적인 명성과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1963년에는 독일 내 수구반공세력들에게 내란음모자로 누명을 뒤집어쓰는 등 곤욕을 치렀으나, 1965년에 무혐의로 수사가 종결되었다.

1965년에는 다시 연방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행정경험과 탁월한 정치 감각,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슈미트는 사민당의 브레인으로 활동했다. 1968년부터 연방사민당의 부의장직을 맡기 시작했다.[11] 그리고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하자 '당연히' 내각에 입각하였다. 빌리 브란트 정권 초기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1972년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스승 칼 쉴러가 경제 정책을 두고 빌리 브란트 총리와 대립하다가 결국 브란트에 경제 정책에 항의하며 사퇴를 하자, 쉴러의 후임으로 슈미트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슈미트는 스승 쉴러와 마찬가지로 브란트 총리와는 상당한 성향 차이가 있던 인물이었다. 기본적으로 슈미트는 쉴러와 마찬가지로 사민당에서 상당히 우파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되어 왔고 때문에 사민당 내에서 비주류였고 적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슈미트는 브란트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전임자이자 스승인 쉴러와 마찬가지로 브란트 총리와 잦은 마찰을 빚어왔다. 대표적으로 슈미트는 브란트의 핵심 정책인 동방정책(Neue Ostpolitik)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했다. 슈미트는 동방정책 자체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브란트 총리가 너무 성급하게 동방정책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경제 원조는 서독의 이익보다 동독과 소련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준다고 비판해 왔다.

특히 재무장관으로서 슈미트는 강력한 분배 정책을 추구하는 브란트와 여러 마찰을 빚어왔다. 함부르크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함부르크 시청 경제통상부에서 경력을 쌓아왔던 관료 출신 슈미트는 경제 정책에 대한 나름의 주관이 확고했기 때문에 브란트 총리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특히 슈미트는 브란트 총리가 경제 문제를 항상 정치적으로 다루려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자주 표출했다.

그래도 브란트 총리와 인간적으로 갈등한 것은 아니었고, 브란트 총리가 귄터 기욤 스캔들에 휘말려 사임을 선택할 때도 본인이 후임 총리로 가장 유력한 상황임에도 브란트의 사임을 강력하게 만류한 각료 중 한 명이었다.

2.4. 연방총리 시절[편집]



파일:Bundesarchiv_B_145_Bild-F048808-0033,_Bonn,_Neubau_Kanzleramt,_Schmidt_im_Arbeitszimmer.jpg


1974년 빌리 브란트슈타지의 요원이 간첩임무를 맡고 자신의 비서로 활동한 것이 적발된 귄터 기욤 간첩 사건과 섹스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미 사민당 수뇌부는 심각하게 이미지가 실추된 브란트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차기 총리로 슈미트를 내정한 상태였다. 결국 브란트가 사민당 내부의 사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하자 브란트의 뒤를 이어 슈미트가 서독의 총리 자리에 오른다.[12][13]

그가 총리 자리에 취임했을 때 서독은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독일의 가을이라 불리는 시기였다. 68혁명 이후 온건파와 분리된 강경 학생 운동 세력들이 적군파가 되어서 사회 주요 인사들에 대한 납치 및 암살과 테러를 자행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독일 경제를 강타하여, 서독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귄터 기욤 간첩 사건이 터지자 기민당의 공세 속에 사민당은 큰 위기에 봉착했고, 설상가상으로 브란트 총리의 섹스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당은 절체절명의 당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슈미트는 사민당에서 매우 우파적인 인물이었고,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경제학적으로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슈미트는 자신의 브란트에 대한 신뢰와 호감과는 별개로 브란트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동방 정책 및 경제 정책 등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미국소련 사이에서 독자 노선을 추구하던 브란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소위 대서양주의 성향을 띄는 정치인이었다. 이것 때문에 중남미의 군사정권들도 은밀히 대거 지원했다.

총리가 된 슈미트는 좌우파 이념을 초월해 각각의 문제들에 접근했다. 이런 그의 태도가 와해될 뻔한 사민-자민당 연립정부를 장장 13년 간 유지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실용적 중도노선은 좌파들이 보기에 불만이었고 때문에 사민당 내에서도 상당한 반대 세력을 형성했다. 특히 68 혁명 출신으로 브란트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입당했던 급진 좌파들이 당내 독자 세력을 형성하면서 그의 임기 후반에는 슈미트 총리와 강력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총리 취임 직후 수감중인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행해진 야당 정치인의 납치에 굴복하는 실수를 범한 후, 독일 내부에서는 각종 납치와 테러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교훈을 얻은 슈미트 내각은 이후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기본 기조로 내세우며 일괄적인 강경대응을 펼쳐나간다.

이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바로 1977년 소말리아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루프트한자의 민항기를 납치하자 특공대를 파견해서 민간인 피해없이 테러리스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사건.[14]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에서 엉성히 대응하다가 최악의 결과를 빚어냈던 불과 6년전 독일 특공대의 모습과 비교하자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 진압작전의 성공 이후 안도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슈미트는 후일 진압작전이 잘못됐을 경우 총리직에서 물러날 각오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상기한 바와 같이 케인즈주의 신봉자였던 슈미트는 취임 초기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 속에서 적극적인 확장 재정정책을 실시하여 실업율을 낮추고자 했다. 아울러 변동환율제 실시와 적극적인 수출장려를 통해 물가상승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다. 그는 확장 재정적책을 통해 경제성장과 복지라는 상반되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선언했고 실제 70년대 후반에는 경제가 회복세로 들어서면서 효과를 보기도 했으나 이에 수반된 심각한 재정적자가 결국 후일 그의 실각을 불러오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1975년 그는 "거주지 변동의 자유, 의사소통의 자유, 인권 보장"을 내세우면서 소련으로 하여금 헬싱키 협약에 서명하게 했고, 이는 이후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정작 슈미트의 임기중에는 1980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망했어요

슈미트는 과거 장관 시절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가하기도 했었지만, 동방정책 자체의 필요성에는 찬성했기에 기본적으로 동방 정책을 계승하면서 동독과 서독 사이의 교류를 증대시켰다. 다만 브란트의 맹목적인 동독 퍼주기에 대해 비판했던 만큼 동독 경제 지원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액수의 동독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1976년 총선을 3일 앞두고 치러진 토론회

사민당은 1976년과 1980년 치러진 총선에서 모두 CDU/CSU에 패배하며 제2당에 머물렀지만 자민당과의 연정을 유지해 집권에 성공하였다. 1976년 총선에서는 1975년에 서독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경제분야에서 최악의 성적을 보이고 있어서 기록적 참패가 예상되었으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찾아온 TV 토론에서 특유의 냉철함과 명민함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론을 반전시켰고, 결국 순전히 헬무트 슈미트의 개인기로 참패를 면했다.[15]

1980년의 총선에서는 헬무트 슈미트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사민당의 지지율도 지극히 저조한 가운데 선거를 치루었지만, 1976~1979년의 독일경제가 회복세로 접어들었던 데다가 슈미트 총리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지지도를 바탕으로 선전하면서 자민당과의 연정을 다시 수립,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연정을 통해 판을 뒤엎으며 정권을 이어갔지만 사민당은 7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의석수가 감소한 반면,[16] 연정파트너였던 자민당의 의석수는 증대했다.[17] 이에 따라 연정 내에서 자민당과의 알력이 심화되는 그림자가 있었고[18] 여기에 두 선거 다 야당인 기민당이 원내 제 1당이었던 점은 덤.[19] 제1당임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된 기민당의 파워는 사민당 정권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연정은 1982년 마침내 파국으로 치달았다. 제2차 오일쇼크로 서독 경제는 다시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슈미트 정권이 그간 펼쳐온 확장 재정정책이 역효과를 불러와 재정적자로 심화되었고, 서독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20] 재정적자 문제가 심해지면서 1차 오일쇼크 때보다 더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결국 악화되는 재정적자 문제를 두고 사민당 당내 분열이 생기고 말았다.

68혁명을 전후해 사민당에 입당한 학생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사민당 내 강경 좌파그룹을 형성하며 노조와 연대하여 대대적인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 인프라 투자확대, 대기업 국유화 등 이른바 '체제극복적 개혁(systemüberwindende Reformen)'을 주장하는 등 슈미트 내각을 압박했던 것. 게다가 사민당 의원 대다수는 퍼싱-2 미사일의 서독 배치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21] 그리고 사민당 총재였던 빌리 브란트는 강성 좌파 그룹에 우호적인 스탠스였다.

물론 슈미트 내각은 이러한 당내 반발에 계속 강경하게 맞섰지만, 당내 강경 좌파그룹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자 사민당-자민당 간의 연대는 점점 약화되었으며 자민당도 사민당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거두기 시작했다. 이때 기민련의 총재였던 헬무트 콜은 끊임없이 자민당에게 연립 정부 구성에 대한 러브콜을 날렸다. 자민당은 고민 끝에 사민당과의 연정 이탈 및 기민-기사 연합과의 연정 구성에 합의함과 동시에 내각불신임결의안이 연방 하원 의회에 상정되면 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9월 17일 자민당 소속 각료들이 모두 사퇴하면서 사민당-자민당의 연정은 붕괴되었다. 자민당 출신 장관들의 사퇴로 인해 슈미트는 불신임될 때까지 2주간 외무부 장관까지 겸직해야 했다.

1982년 10월 1일 연방 하원 의회에서 내각불신임결의안이 가결되면서 그 자리에서 슈미트는 실각했고 헬무트 콜이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22] 총리가 불신임된 것은 독일연방공화국 헌정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슈미트는 의회의 불신임으로 물러나게 된 첫번째 독일 총리가 되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 표결이 통과되면서 헬무트 콜이 신임 총리로 선언되는 장면

불신임안 통과 직후 슈미트[23]는 신임 총리 콜에게 축하인사를 건내자마자 언제 총선을 실시할 것이냐는 날선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이에 콜은 국민들에게 직접 신임을 묻기 위해 내년 3월 6일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답했다.[24] 이어 콜은 3일안에 서둘러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간 사민당이 제2당임에도 불구하고 집권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연정 파트너 자민당 총재인 겐셔에 대해서는 "다시는 겐셔와 사진을 찍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뒤끝을 보여주었다.[25]

참고로 겐셔는 1974년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면서부터 외무장관을 맡았다가 1982년 불신임 2주전 장관직을 잠시 사퇴했다가 다시 기민-기사 연합과의 연정에서 외무장관에 재취임하면서 독일 재통일이 이뤄진 뒤인 1992년까지 무려 18년 간 외무장관을 맡으며 동서독 통일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공인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슈미트가 국민들에게 총리로서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가 모든 일을 그렇게 나쁘게 처리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였다. 8년간 총리로서의 평가가 나쁜 편이 아니고 선거로 심판받은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로 물러나게 된지라 억울한 마음도 있었을텐데도 겸손한 소감을 남긴 것.

이후 슈미트의 요구를 콜이 받아들이면서 1983년 3월 6일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사민당은 한스요헨 포겔이라는 새로운 얼굴 내세웠지만 오히려 의석수가 줄어드는 패배를 당했고 CDU/CSU자민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헬무트 콜 총리가 제대로 국민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2.4.1. 1980년 전후 동서독 핵우산 경쟁[편집]


한편 1972년 미·중 간의 교류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독은 동독과 군축협상에 들어갔는데, 1976년 베트남 통일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하면서 다시 냉전의 기운이 유럽을 덮었다. 이때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에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지대지미사일을 배치했다. 이 탄도미사일은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 전체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고, 당시 유럽에는 이에 대항할 만한 동급의 핵무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26]

물론 소련이 실제로 서유럽에서 핵전쟁을 벌이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SS-20의 동독 배치가 당시에 가졌던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이는 유럽의 군사적 힘의 균형이 비대칭전력의 등장으로 사회주의 공산권으로 쏠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때쯤 갈수록 의석수를 늘리며 기염을 토해가고 있던 프랑스, 이탈리아의 공산당 세력, 서독 사민당 내의 좌파세력을 고무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27]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협상을 믿어볼 수도 있었지만, 1970년대 데탕트 시기 미소가 추진했던 전략무기 제한협정 등의 핵무기 군축은 주로 ICBM처럼 미국과 소련 영토를 직접 공격할 정도의 장거리 무기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SS-20과 같은 중거리 핵전력은 소련이 미국과의 군축협상에 영향 받지 않고, 서유럽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련의 도발에 대해 미국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난감해 하고만 있었는데,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직접 이러한 도발에 맞서기 위한 NATO 차원의 대응전력 배치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며 미국에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1977년 9월 그 유명한 '런던 연설'을 통하여 소련이 동독에서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키지 않을 경우,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회원국인 서독 역시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2를 자국에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소련이 동독에서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킨다면 퍼싱-2의 서독 배치도 필요 없는 것이었고, 서독정부는 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어쨌든 이로써 SS-20 미사일에 관한 외교적 협상의 주도권은 미국-소련에서 서독-소련으로 넘어왔으며, 미국과 소련이 진행하던 중거리핵전력협정(INF)과 관련한 협상은 중단되었다.

물론 서독에서는 퍼싱-2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소련-동독이 설마 핵전쟁을 일으키겠냐?' '미제국주의 호전광의 꼭두각시가 되겠다는 거냐?' '어차피 우리가 대응하지 않아도 걔네는 그냥 철수시킬 거다' 등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일부 사회주의 계열 운동권 학생들은 헬무트 슈미트의 암살을 공공연히 협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슈미트 정권은 이러한 결정이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키라는 서독의 요구에 소련은 응하지 않았고, 그 결과 1984년 서독에는 퍼싱-2 미사일이 결국 배치되고 말았다.[28]

그런데 이때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대소련 강경 노선이 펼쳐지고, 미국의 본격적인 군비증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유럽 내에는 반전, 반핵 여론이 불 붙기 시작하였다.[29]

참고로 이 핵우산 배치 경쟁의 경우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 초판 서독과 동독 파트에서 이 내용이 제법 언급된 적이 있으나, 냉전 종식 이후 개정된 부분에서는 빼버렸다.


2.5. 정계 은퇴 이후[편집]


총리 퇴임 후에도 사민당의 실권을 움켜쥐고 있던 빌리 브란트에 가려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연방하원에 남아있던 슈미트는 1987년 정치를 떠났다.

이후 언론계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차이트(Zeit)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고.

2010년 92세를 넘기면서 콘라트 아데나워가 갖고 있던 독일 총리 최장수 기록을 경신하였다.

1992년 빌리 브란트가 서거한 뒤 사실상 사민당의 큰어른 역할을 했는데, 게르하르트 슈뢰더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그가 16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는데 기여했지만, 당내 우파답게(?) 슈뢰더 총리가 주도한 하르츠 개혁은 열렬히 지지했지만 탈원전 정책과 다문화 정책에는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2011년에는 93세인데도 사민당 집회에 참가해서 한 마디 했다.




2015년 9월에 혈전 문제로 수술을 받고 퇴원했는데 2015년 11월 10일, 그의 몸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의식이 있는 상태가 드물다고 하며 주치의가 회복불능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심각한 모양. 결국 독일 현지 시각으로 11월 10일 부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 이에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비롯, 각계 유명인사들의 추모사가 잇따랐으며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독일 현지 시각으로 11월 23일 함부르크에서 장례식이 있었고, 공공기관에서는 조기를 게양하였다.


2.5.1. 논란[편집]


2014년 러시아크림 반도 점령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입장을 전적으로 이해한다(completely understandable)'고 밝혀 논란이 되었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는 서방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며,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또 서방이 러시아와 적대하려 하기보단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크림반도 합병 1년 후인 2015년에 병사해버려서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건 보지 못했다.

젊은 시절 불분명한 나치 행적에도 불구하고 전후 서독에서 지도자급 정치인으로 성장한 이례적인 케이스를 지낸 총리다. 2014년 12월 그의 젊은 시절 나치 행적을 폭로하는 저서가 출간되어 그의 나치 행적이 다시 한번 논란이 되었다.


3. 어록[편집]


미래에도 가장 중요한 독일 정치가의 의무는 개인의 존엄성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타협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쓸모가 없다.


나는 똑똑하다. 나를 제어할 수 있는 참모를 원한다.


국민은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체제에서는 국민이 정부를 비폭력적으로 교체할 수 있다. (...) 경제와 사회 그리고 국가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적합한 정치적 실천임을 포퍼로부터 배웠다. 급격한 변혁은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고 잘못될 경우에는 더 큰 희생을 치러야만 고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고도로 복잡한 산업민주주의 국가는 급격한 변혁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나치 시절 체험한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에 민주주의자가 되었고, 내가 겼었던 동지애나 연대감 혹은 형제애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나는 프로이센한자 동맹 도시 함부르크 출신이다. 내 자신이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니 만족하며, 다른 사람들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해준다면 더 기쁘겠다.

총리직에서 퇴임하면서



4. 동시대인들의 평가[편집]


헬무트의 정책 내용보다는 그의 인간됨에 매료되었다. 능력이 공격적 태도와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다. 전문성과 탁월함이 드러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30]


헬무트 슈미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유혹을 뿌리쳤다.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 약속을 했고 사실을 말해주었다.

페터 슐츠, 함부르크 시장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지상에서 이룰 수 있는 완전함에 도달했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바보라고 여겼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31]


그를 알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사람됨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강인한 인격과 충성심,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함의 소유자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내가 더 신뢰하거나 내게 더 분명한 판단력을 주는 정치인은 없다.

헨리 키신저


슈미트는 2차대전 당시 장교로 복무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함부르크 시 내무국장으로 홍수와 싸웠을 때의 밤이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골로 만[32]


곧 50년이 되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슈미트의 총리재직 시절을 특징지어 역사책의 표제로 들어갈 만한 뚜렷한 항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개인적인 비극이다.

페터 필립스, 언론인



5. 여담[편집]


  • 마도로스 모자(Lotsenmütze)를 공적인 자리에서도 자주 착용했다.[33] 그래서 그를 향한 존경이 담긴 별명 중 하나가 Der Lotse(선장)
  • 유대인 혈통인 것과 별개로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유대인 혈통인게 밝혀지기 전이었던 총리 재임기에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비판하는 인터뷰도 했는데, 홀로코스트라는 원죄로 인해 반 이스라엘 스탠스가 금기시되던 전후 독일 정계에서 슈미트의 이러한 발언은 큰 파장을 낳았고,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메나헴 베긴은 슈미트에게 "동부전선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범죄 조직에 속한 인간답다."라는 매우 거친 대응을 해서 한동안 서독-이스라엘 관계가 극도로 얼어붙기도 했다.
  • 대단히 박학다식했고 정치, 경제, 국방 등 많은 분야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최고 수준의 지식인인 데다가 언변까지 좋아서 그 어떤 상대와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았으며, 예리한 논점, 세련된 단어선택과 정확한 발음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다만 완벽주의적인 성격에 상당히 오만한 면이 있었고, 소속정당을 안가리고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인물에게는 조롱에 가까운 맹비난을 퍼붓기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이러한 언행으로 인해 정계에서 붙은 별명 중 하나가 Schmidt Schnauze(주둥이의 슈미트)였다.[34]
  • 첫 부인 로키 슈미트와는 유년 시절부터 만난 첫 사랑이었다고 하는데, 1942년 결혼해서 2010년 사별했고,[35] 2012년 22세 연하의 여성과 재혼했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 인터뷰하는 동영상을 보면 흡연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독일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버젓이 흡연을 해도 되는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통했다. 2008년에는 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대놓고 담배를 피웠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 경찰이 슈미트가 십년 이상 공공장소에서 금연법을 어겼다는 혐의로 소환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연초만이 아니라 코담배도 즐겼는데, 인터뷰 영상을 보면 연초를 피는 사이 사이에 코담배를 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파일:external/polpix.sueddeutsche.com/weil-schmidt-jauch.jpg
  •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총리 시절엔 영국의회에서 영어로 유려한 연설을 하여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36]
  • 피아노 연주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총리 퇴임 직후인 1982년에 국제사면위원회에 판매 수익금 일부를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EMI에서 프로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유스투스 프란츠,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7번과 제10번을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했다. 슈미트는 7번에서 제3피아노 파트를 맡아 연주했다. 1985년에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역시 프로 피아니스트들인 에셴바흐, 프란츠, 게르하르트 오피츠가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흐의 건반악기 다중 협주곡들을 녹음할 때 네 대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BWV 1065)에서 특별 초빙되어 제4건반 파트를 맡았다.


  • 그의 사후 고향인 함부르크에 위치한 함부르크 공항이 그의 사망 1주년을 추모하며 2016년 11월 10일부터 헬무트 슈미트 함부르크 공항(Hamburg Airport „Helmut Schmidt“)으로 명명되었다.

  • 2018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 해 동안 독일에서 발행되는 2유로 주화의 도안으로 선정되었다.

  • 홍준표가 본인의 핵 공유 주장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언급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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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례식은 독일 개신교회 소속 교단인 북독일 복음주의 루터교회 성 미카엘 교회에서 치뤄졌다.[2] 서독에서 제2당 출신으로 총리가 된 것은 전임자 빌리 브란트에 이은 2번, 3번째 사례였다.[3] 2005년 엠니드, 2013년 포사, 2015년 YouGov 조사 등.[4] 실제로 사민당은 70년대 중후반 선거에서 슈미트의 대중적 인기와 탁월한 토론 능력 등 슈미트 개인적 능력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연명해나간 측면이 컸다. 또 사민당내 반발을 무릅쓴 슈미트의 우클릭 경제 정책 덕분에 서독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빠르게 회복하며 선방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메르켈이 보고 반대로 한건가.[5] 나치의 혈통 기준에 따르면 조부모 4명 중 한 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취급했다.[6] 슈미트가 좌파정당 소속이었던 데 반해, 지스카르-데스탱은 우파정당 인사였다.[7] 훗날 총리시절 브레즈네프와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이게 소련측의 공격거리가 되자, 슈미트는 '낮에는 우리가 적으로 싸웠지만, 밤이면 나치의 멸망을 소망했다는 점에서 우린 동지였다.'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8]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벌어진 군 인사들의 재판에 참관인으로 참가했는데, 나중에 회고록에서 슈미트는 이 재판을 주관한 롤란트 프라이슬러에 대해 받은 인상을 단테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수문장으로 비유하기도 했다.[9] 참고로 그와 동년배인 1918년생 독일 남자 중 2/3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슈미트는 천운을 타고난 셈.[10] 당시 함부르크 대학교에는 Staatswissenschaft, 즉 국가학이라는 전공이 있었는데, 이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법학과 경제학의 융합전공이었다. 슈미트는 바로 이 Staatswissenschaft를 전공하였다.[11] 슈미트는 그 후 연방사민당 부의장직을 1984년까지 연임하였다.[12] 다만 슈미트 본인은 브란트의 사임에 대하여 '나도 총리를 해보고 싶긴 하지만 이렇게 당신이 물러나는건 말도 안 된다'며 강경히 반대 입장을 펼쳤다.[13] 이 때 사민당 중진들이 브란트의 총리직 용퇴를 유도하기 위해 브란트 종신 당대표, 슈미트 총리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이 때문에 슈미트는 역대 사민당 출신 총리 중에 유일하게 당권 없는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슈미트의 정치적 수제자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당정을 모두 휘어잡았고, 연정 파트너 녹색당과의 불화 없이 안정적으로 집권한 것과 여러모로 대조적.[14] 참고로 이 사건 당시 테러리스트들은 투옥된 적군파 간부들의 전원 석방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 승객만이 아니라 당시 적군파에 의해 납치된 서독 기업인협회장이었던 슐라이어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슐라이어는 결국 진압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15] 상대편 수장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역시 대단한 달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헬무트 슈미트한테는 역시 상대도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TV 토론 동영상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헬무트 슈미트가 한 마리 호랑이와도 같다면, 헬무트 콜은 한 마리 을 연상케 한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불독.[16] 빌리 브란트 시절인 1972년 총선의 경우 사민당은 지역구 48.9%, 비례대표 45.8%의 지지율로 전체 518석 가운데 24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1당을 차지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76년 총선에서는 사민당 의석이 214석으로 무려 28석이나 줄어들었으며, 지지율도 지역구 43.7%, 비례대표 42.6%로 하락하여 기민-기사연합에게 원내 제1당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다행히 1980년 총선에서는 228석으로 사민당이 의석수를 다시 늘렸으나, 기민-기사연합을 제1당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하였다.[17] 자민당은 1972년 총선에서 겨우 42석 밖에 못 얻었던 정당이었고, 1976년에도 40석밖에 못 얻고 있었으나, 1980년 총선에서는 54석을 얻는 등 약진하였다.[18] 1980년 선거 직후의 총리 신임투표에서도 자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서 사민당을 경악시켰다.[19] 1972년에 234석에 불과했던 기민-기사연합의 의석수는 1976년에 254석으로 늘어나, 이로써 기민-기사연합은 사민당을 다시 꺾고 제1당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1980년에는 기민-기사연합의 의석수가 줄어들었으나, 그래도 237석을 지켜서 여전히 제1당을 유지하였다.[20] 독일경제는 1980년에 1.3%, 1981년에는 0.1%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1982년에는 마이너스 0.8%의 성장률로 오히려 경제가 쪼그라들었다.[21] 실제로 1983년 11월 쾰른에서 열린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약 400명의 대의원 가운데 겨우 14명만이 퍼싱-2 미사일의 조건부 배치에 찬성했다. 사민당의 나머지 대의원들은 가급적 소련에 대해 SS-20 미사일의 철수를 읍소하되 만약 소련이 거부할 경우 SS-20의 동독배치를 용인하자는 입장이었던 것. 만일 자민당이 슈미트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어도, 슈미트는 1983년 자당 의원들의 배신 때문에 실각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22] 구 서독 및 현 독일은 의원 내각제이며 독일 기본법(헌법)에서는 내각불신임결의안 제출시 반드시 사전에 차기 총리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구 서독 및 현 독일 총리들은 재임기간이 비교적 긴 편이다. 보통 건설적 내각불신임결의로 불리며 해당 항목을 참조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23] 슈미트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단지 이렇게 물러나는 것(연정이 붕괴된 것)이 아쉬울 뿐"이라는 소회를 남겼다.[24] 이 질의가 왜 나왔냐하면, 선거가 아닌 불신임에 의한 정권교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이런 식의 정권교체가 정당한지 여부에 대해서 독일 내부에서 격론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불신임안의결이 의회에서 투표에 붙여지기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헤센 주 선거에서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대거 사민당과 녹색당으로 이탈하는 바람에 자민당은 아예 주의회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참사를 맛봤다. (참고로 선거 결과 자체는 기민당이 주의회 내 1당으로 등극했지만 과반에 미달해서 2당 3당인 사민당과 녹색당이 연정을 구성해버렸다.) 이러한 선거결과를 바탕으로 헬무트 슈미트는 불신임안 투표 직전 연설에서 자민당에게 "당신들의 처리 방식은 합법적이지만, 내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신임총리 헬무트 콜은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쿨하게 4개월 안에 총리직을 건 조기총선을 시행하겠다고 밝혔고, 조기총선 결과 압승을 거둔 콜은 16년 장기집권하면서 최장수 총리가 되었다.[25] 다만 이건 단순히 불신임만이 아니라 겐셔가 지속적으로 빌트 지를 포함한 보수일간지에 정부의 정책과 관련해서 불만을 털어놓면서 연정관계를 의도적으로 뒤흔든 것에 대한 분노도 섞여있었다. 불신임안이 상정되기 이전 내각회의에서 슈미트가 "사민당과 나의 정책에 불만이 있으면 빌트 지에 내뱉지 말고 여기서 우선 얘기해라."라고 화를 낸 적이 있을 정도.[26] 물론 유럽에서도 영국,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핵위협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직접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 국한되었다. 때문에 서독을 비롯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노리는 소련 핵위협에 맞설 핵우산으로 제공되지는 않았다.[27] 실제로 당시 서독 사민당 좌파세력과 서독 운동권 학생들은 SS-20의 동독 배치를 환영하며 이를 정당화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소련이 펼친 정당화 논의에 적극 찬동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28] 1983년 11월 기민련과 자민당의 찬성으로 퍼싱-2 미사일 배치가 의결되었다. 퍼싱-2 미사일의 배치는 본디 헬무트 슈미트의 아이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은 이때의 표결에서 퍼싱-2 미사일의 배치에 반대하였다.[29] 1983년 11월 헬무트 슈미트의 고향인 함부르크에서만 무려 40만 명의 인파가 모여 퍼싱-2의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물론 이러한 시위와는 별개로 서독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퍼싱-2의 배치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결국 고르바초프 시절인 1980년대 후반에야 미소는 SS-20, 퍼싱-2를 함께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30]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민당의 정치가이자 독일 7대 연방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아니라 동명의 50-60년대 아데나워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기민당 정치인이다.[31] 상단의 생애 항목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지극한 반어법이다.[32] 독일의 역사가.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호인 토마스 만의 아들이다.[33]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서도 묘사되었듯 함부르크를 비롯한 북독일 지역의 스테레오타이프처럼 통하는 복장이기도 하다. 이 모자는 '하인리히공 모자'(Prinz-Heinrich-Mütze)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독일 해군 사령관이었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에서 따온 이름이다.[34] 슈나우체(Schnauze)가 독일어로 "주둥이"를 의미한다. 개의 종류 중 하나인 슈나우저(Schnauzer)의 어원이기도 하다.[35] 둘 사이에는 자식이 둘 있었는데, 장남이었던 헬무트 슈미트 2세는 2차대전 말기에 태어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영아 시절 사망했고, 전후 태어난 장녀 수잔네는 녹색당의 정치가로 활동했다.[36] 참고로 그의 후임자인 헬무트 콜은 영어를 거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