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찰 복강안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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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察 福康安
(1754년 ~ 1796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청나라의 인물. 만주 양황기 출신이다. 만주어로는 푸차 푹앙안.

건륭제의 처남인 부찰 부항[1](傅恒)의 3남으로, 명문가의 자손이 능력과 총애까지 갖추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


2. 생애[편집]


부찰 씨는 고조부 합시칠(哈什屯), 증조부 미사한(米思翰), 백부 마제(馬齊)가 모두 의정대신을 지내고 아버지 부항과 큰형 복령안, 둘째형 복륭안은 모두 군기대신을 지내는 관력을 자랑하는 명문가였다. 복륭안은 건륭제의 부마, 복령안은 건륭제의 사촌의 부마가 되어 혼맥까지 든든하게 갖춘 것은 덤.

여자 쪽은 어떤고 하니, 건륭제의 첫 황후인 효현순황후가 된 고모를 필두로 하여 복강안의 누이 중 한 명은 건륭의 11황자 영성(永瑆)[2]의 적복진, 다른 한 명은 철모자왕인 예친왕 도르곤의 후손 순영(淳穎)의 적복진이 되어 이쪽 역시 이보다 높은 지위를 생각하기 어려운 위치에 이르렀다.

여기에 복강안 본인도 무술이 뛰어나고 건륭제의 총애까지 더해지니 이미 10대에 벼슬을 시작하여 20대 초뱌에 온복을 따라 2번에 걸쳐 대금천, 소금천을 공격하여 승리한 공으로 삼등가용남(三等嘉勇男)이 되었으며, 외직으로는 몽군기와 정백기의 도통, 정백기 만주도통이 되고 내직으로는 내대신, 어전대신 태자태보를 거쳐 공부상서에 이르는 출세가도를 달린다.

30대에는 병부상서 총관내무부대신(1784년)을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상서와 대신 직위를 맡으며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대만과 서장의 반란을 거듭 진압하면서 작위가 일등가용공을 넘어 가용충예공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네팔 구르카 족과 전투를 벌였다.

40대에 접어들어서도 묘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황족만이 봉해지던 고산패자에 오르는 등 왕성하게 활약했으나 가경제 원년, 42세에 병으로 진중에서 죽었다. 사후 문양(文襄)이라는 시호와 가용군왕(嘉勇郡王)에 추봉되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군왕 역시 오아이신기오로 씨만 받을 수 있었던 영예였다.



3. 기타[편집]


건륭제 통치 기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그 유명한 화신도 복강안과는 겨룰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푸차 가문과 니오후루 가문의 차이도 있고, 군부의 거물인 복강안과 함부로 다투기 힘든 것도 있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내정을 맡던 화신과 외정을 맡던 복강안이 마주칠 일도 적고.

건륭제 재위 내내 신하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오죽하면 건륭제가 부항의 부인과 간통하여 나은 사생아 아니냐는 야사도 있다. 부항의 다른 아들들도 황실과 거듭 혼사를 치렀는데 정작 이 집안에서 건륭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복강안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은 복강안이 사생아라 공주들과는 배다른 남매가 되기 때문에 결혼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낭설일 뿐이다.

외정에서는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취했는데, 양광 총독으로 있을 때부터 외국 상인에 대해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조지 매카트니 사절단이 왔을 때는 사신들에게 황제를 알현할 때 삼궤구고두례를 올리라고 했다.




여담으로 황제의 딸의 주연 복이강이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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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륭의 정후였던 효현순황후의 동복 동생이다.[2] 조선인 출신 김신다리의 후손인 숙가황귀비 금가씨 소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