뵈귀 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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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ögü qaghan(모우가한, 牟羽可汗)
재위기간 (759 ~ 780)

1. 개요
2. 재위



1. 개요[편집]


위구르 제국의 제3대 가한. 구당서에는 텡그리 카간(등리가한, 登利可汗)이라 압축해 지칭하였다. 이름은[1] 이르킨 뵈귀(이지건, 移地健).


2. 재위[편집]


759년에 그가 즉위하자마자 위구르 내에선 복상 문제로 갈팡질팡하였다. 위구르 사람들은 위구르의 예법에 따라 전 가한의 카툰(황후) 당나라 공주 출신의 영국공주를 순장 해야 한다고 했으나 영국공주는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중국의 예법대로 상복을 치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영국공주는 마침 아이가 없어서 결국 당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때는 안사의 난(사사명의 난) 당시로써 762년, 호연사조의(史朝義)가 아직 당군과 대치하고 있어서 당 조정은 다시금 위구르의 도움을 받으려 중사 유청담을 파견한다. 그런데, 사조의가 앞서 뵈귀 카간에게 당 황제가 없으니 당의 창고를 약탈하라고 말한다.[2] 유청담은 카간에게 위구르군와 당군이 힘을 합쳐 양경(장안, 낙양)을 회복한 것, 광평왕 이숙카를륵 카간이 서로 형제관계를 맺었다는 것, 당이 위구르에게 매년 비단을 보냈다는 것 등 지난 과거의 일을 잊을 수 있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뵈귀 카간은 삼성(三城)[3]에 병졸이 없는 것을 보고 당이 빈약하다고 판단해 선우도호부에 있는 창고를 털어 식량을 약탈했다.

사사명(사조의)의 난에서의 오랜 대치상황에서 위구르 칸국사조의와 힘을 합치면 당나라는 끝장이었기에 당나라는 이 충격과 공포의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위구르와 안면이 있고 철륵 복골 출신인 복고회은을 재차 파견해 설득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때 동관을 지나가다 뵈귀 카간은 반란군을 목격해 전투를 치룬다. 대승이었지만 뵈귀 카간은 이 계기로 다시 당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마음 먹는다. 대종은 원수 옹왕과 복고회은 등을 보내 뵈귀 카간을 섬주에서 만나게 하였다. 그런데 뵈귀 카간은 옹왕이 춤을 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럭 화를 냈다. 이에 대해 약자앙이 숙종과 현종의 장례가 끝나지 않아서 춤을 출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뵈귀 카간은 옹왕의 숙부니 뭐니 해서 안 춘것에 대해 끝까지 추궁하였다.

이윽고, 뵈귀 카간은 병사를 시켜 당의 신하들을 채찍으로 쳐죽였다. 그리곤 다시 본영으로 돌아갔다. 옹왕은 이 사건으로 크게 격노하였고 황제가 된 이후에도 위구르를 항상 멸시하게 된다. 한편, 복고회은과 여러 절도사들은 사조의의 잔당을 토벌하고 있었다. 그런데 뵈귀 카간이 하양에서 진을 쳐 수개월 동안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절도사들은 하북을 모두 수복하였고 위구르군은 사조의의 수급을 베어 마침내 안사의 대란을 평정하였다. 당의 만인은 모두 난이 평정된 일에 축하를 다하였으나 뵈귀 카간은 오히려 당을 욕하였다. 낙양의 백성들은 위구르군의 난폭함이 두려워 성선사(聖善寺)와 백마사(白馬寺)에 피신하였다. 그런데 뵈귀 카간은 이 사찰들을 불태워 버렸고 불에 사망한 백성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불은 열흘이 지나도 꺼지지 않았다고 하니 위구르군의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뵈귀 카간은 여주(汝州)와 정주(鄭州) 등 하남성을 전전하며 약탈하고 보이는 가옥을 불태웠다.

얼마 뒤 대종은 모우가한에게 아이 텡그리데 볼미쉬 일 에트미쉬 알프 퀼릭 영의건국 빌게 카간(등리힐돌등밀시함구록영의건국비가가한, 登里頡咄登密施含俱錄英義建功毗伽可汗)의 벼슬을 내린다. 대종도 분명 백성들이 위구르군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당시 당나라는 내부의 하북삼진(노룡, 성덕, 천웅)의 절도사도 막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조정은 복고회은에 명하여 위구르 카간과 군대의 귀환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위구르와 복고회은이 결탁하여 변경의 우환이 될 것이라는 조정과 변신의 의견이 있어 의심을 받다가 763년, 복고회은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대종에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복고회은의 난이 발발한 것. 복고회은은 위구르와 토번, 당항 등 여러 이민족의 등에 업어 일으킨 난이었지만 복고회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패한다. 위구르군이 이 반란에 개입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곽자의가 나서서 뵈귀 카간의 동생에게 책망하였다. 그러자 뵈귀 카간의 동생은 즉시 사죄하였다.

771년, 위구르는 당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납치하였다. 해당 관리가 찾으려 갔으나 뵈귀 카간은 오히려 화를 내었고 장안의 문을 부셨다. 이후에도 뵈귀 카간과 위구르군의 악질 행각은 더욱 깊어져갔다. 자신들의 말을 강제로 비단과 바꾸었고 당은 말이 필요없는데도 계속 바꿔주어야 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775년에는 장안성 내 시장에서 사람들을 죽인 위구르 병사가 옥에 갇혔다 도리어 탈출했는가 하면 778년에는 태원으로 쳐들어가 섬서를 혼란시켰다.

779년, 당대종 이예가 죽고 당덕종 이괄이 즉위하였다. 덕종은 위에서 나왔던 옹왕으로, 위구르와 연합작전을 펼칠 때 섬군에서 뵈귀 카간에게 굴욕을 받은 일 때문에 그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대단했다. 그래도 일단 덕종이 즉위한 사실을 알렸으나 뵈귀 카간은 이마저도 무시해버리는데, 토번이 발호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당나라와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은 위구르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이에 위구르 재상 톤 바가 타르칸(돈막하달간, 頓莫賀達干)이 뵈귀 카간에게 간언하였다.

“당은 큰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잘못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태원에 쳐들어가 양과 말을 만여 마리 잡아온 것은 큰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이 아주 험해 나라에 도착해보니 상해서 못쓰게 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한다면 장차 어찌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신당서 회흘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귀 카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톤 바가 타르칸은 이러다가 두 국가가 파탄 나겠다고 생각하여 위구르 백성들의 민심을 등에 업고 정변을 일으켰다. 780년, 폭정과 약탈을 일삼았던 뵈귀 카간은 재위 21년만에 사망하였고, 톤 바가 타르칸이 알프 쿠틀룩 빌게 카간으로 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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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군주 즉위 이전 투르크족관직 작위이다.[2] 이 해에 숙종 이형이 피살되고 대종 이예가 즉위하였다.[3] 중수항성, 동수항성, 서수항성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