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리페르트

덤프버전 :


파일:미하엘 리페르트.gif

이름
Michael Hans Lippert
미하엘 한스 리페르트
출생
1897년 4월 24일, 독일 제국 오버프랑켄 현 쉔바르트
사망
1969년 9월 1일, 서독 부퍼탈
복무
슈츠슈타펠 (1931년 ~ 1945년)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령 (연대지도자)
루프트바페 중위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초기 행적
3.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입대
5. 작센하우젠 수용소장
7. 전후 전범 재판과 최후



1. 개요[편집]


나치 독일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령


2. 초기 행적[편집]


오버프랑켄 현 쉔바르트에서 태어난 리페르트는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 대전바이에른 왕국 기병연대에 지원해 서부전선동부전선에 종군해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7년 10월에 고향으로 돌아온 리페르트는 조종사를 지망해 노이슈타트 제2 항공학교에 입학했다. 1918년 10월에 비행기조종사 자격을 취득했지만 종전으로 인해 참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1920년에 레겐스부르크의 바이에른 주 경찰에 들어가 1929년까지 근무했는데 1921년 10월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3.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입대[편집]


1930년 6월 1일나치당에 입당한 리페르트는 1931년 3월 10일친위대에 입대해 1933년다하우 강제수용소의 부소장으로 취임했다.


4. 장검의 밤[편집]


1934년장검의 밤 사건에서 돌격대 지도자였던 에른스트 룀의 처형을 명령받은 테오도어 아이케와 동행하여 룀이 구금된 뮌헨의 슈탄델하임 형무소를 방문한 리페르트는 히틀러의 명령에 근거하여 한 발의 총알이 들어간 권총을 룀에게 주어 자결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총성이 울리지 않자 아이케와 리페르트는 룀의 독방으로 들어갔다. 아이케는 리페르트에게 룀을 사살하라고 명령해 리페르트는 룀을 쏘았다.


5. 작센하우젠 수용소장[편집]


그 후 리페르트는 1934년 9월에 친위대 중령으로 승진해 1936년 7월부터 10월에 걸쳐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소장을 지냈다.


6.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39년에 제3 SS 기갑사단 토텐코프의 예비역 장교가 된 리페르트는 1942년 7월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전상자 은장을 받았다.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1943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프랑스에서 편성된 제10 SS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의 사단장으로 임시로 취임해 4월 20일에 대령으로 승진했다.


7. 전후 전범 재판과 최후[편집]


의용척탄병 여단의 제83연대장으로 부임해 패전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던 리페르트는 전후 1950년네덜란드의 아넴에서 벌어진 시민학살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3년서독으로 강제송환 후 1956년요제프 디트리히와 함께 룀 이하 돌격대원에 대한 살인죄로 징역 1년 6개월 형에 처해졌다가 석방되어 1969년에 부퍼탈에서 사망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06:25:15에 나무위키 미하엘 리페르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