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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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피소드
1412년 ~ 1420년
1화 ~ 12화
펠로폰네소스 원정
1420년 ~ 1421년
13화 ~ 45화
아테네-이피로스 정복 전쟁
1421년
46화 ~ 59화
정변기
1422년 ~ 1423년
60화 ~ 124화
제1차 대오스만 전쟁
1423년 ~ 1428년
125화 ~ 176화
1차 전간기
1428년 ~ 1432년
177화 ~ 225화
세르비아 십자군
1432년
226화 ~ 247화
제2차 대오스만 전쟁
1432년 ~ 1435년
248화 ~ 277화
2차 전간기
1435년 ~ 1436년
278화 ~311화
나폴리 전쟁
1436년 ~ 1438년
311화 ~ 356화
제3차 대오스만 전쟁
1438년 ~ 1445년
357화 ~ 377화
재건기
1446년 ~ 1448년
378화 ~ 407화
맘루크 전쟁
-
408화 ~ 410화
그 후
1. 개요
2. 중부 그리스의 전후처리와 정치적 변화
3. 각 인물들의 반응 및 변화
4. 전면적 개혁과 중앙집권적 국가를 향한 발돋움
5. 공동황제 지명과 대관식
6. 모레아 개혁 이후의 문제 개선
7. 아나톨리아 원정과 오스만의 개혁안 도입
8. 모레아 개혁의 성과 검토



1. 개요[편집]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오스만-모레아 간 전간기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1423년부터 1428년에 해당하는 시기를 담고 있다.


2. 중부 그리스의 전후처리와 정치적 변화[편집]


자신의 선택이 스노우볼링이 되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본 요안니스 8세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아버지인 마누일 2세를 만나뵈러 수도원으로 향한다. 퇴위당해 이제는 늙은 수도사가 된 마누일을 보며 요안니스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자신이 황제로서의 재목을 지니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제위를 돌려주려 한다. 하지만 그런 그를 마누일은 그저 위로해주고, 요안니스가 주인공과 방향성이 달랐을 뿐 무능한 건 아니었다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그는 요안니스에게 이슬람의 검과 맞서싸울 칼날이 될 주인공의 검집이 되어 예기가 녹슬지 않도록 지켜줄 것을 부탁하며, 이에 요안니스는 하느님에게 맹세코 주인공을 지킬 것을 결의한다.

오스만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주인공은 토마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어 중부 그리스를 장악하러 나서고, 중부 그리스들의 도시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저항을 완전히 포기한다. 네에파트레 화공과 예니체리에 대항한 엄청난 교환비의 승리, 이스트모스 전투까지 주인공이 하나같이 기적 수준의 전공을 보여준 점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들이 관망하고 좀 더 적은 도시들이 주인공한테 붙은 상황에서 몇몇 도시만이 병력을 이끌고 모레아에게 대항할 것을 결의했고, 이는 주인공이 그들을 일소해 본보기로 삼게 해주었다.

주인공이 진두지휘한 중부 그리스의 평정은 데미클레오테스와 니키포로스의 활약을 통해 지역민들과 제노바인들과의 제휴에 힘입어 손쉽게 끝났고, 특히 데미클레오테스의 경우 제노바 용병에 대한 물자보급을 감당하는 대신 제노바가 물자의 운송비용을 절감 및 일부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주인공이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또한, 대주교좌가 설치될 경우 첫 대주교가 될 법한 니키포로스의 영향력과 권위 또한 주인공이 인정하게 되었다.

중부 그리스 평정을 끝으로 전쟁이 완전히 막을 내리고, 주인공은 첫 번째 전후처리로 탈영병들에 대한 대사면령을 내린다. 탈영병들이 산적 등으로 돌변하지 않고 제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치안이 유지될 것을 기대한 주인공은 그 다음으로 아나톨리아 반란 진압에 종군할 토마스를 파견하고, 오스만과의 재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십자군의 주요 결성 국가로 왈라키아, 세르비아, 헝가리 3개국을 지목하며, 그중에서도 헝가리를 중시해 만약 십자군이 도래할 시에 그들과 합류할 수 있는 육로에 대해서 고민에 잠긴다. 넓은 전장으로 인해 기동이 유리하지만 적들도 그러한 불가리아와 기사 운용이 힘들지만 산지가 많아 선공을 당할 가능성이 낮은 마케도니아, 각각의 장단점을 가진 양쪽 중에서 주인공은 후자 쪽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러한 전략을 위해 알바니아를 다음 결전에 대비한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생각의 배경에는 얀 지슈카에 이은 또다른 동유럽의 명장인 스칸데르베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 또한 존재했다.

주인공이 모레아의 다음 진출지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신하들 또한 그를 돕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특히 데미클레오테스가 알려준 라틴 기사들이 탈영병들을 다시 수습하고 있다는 소식에 대해 주인공은 프란시스코가 생존해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가장 반가워했고, 그를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는 라틴 기사들에게 새로 얻은 영토의 일부를 세습이 불가능한 장원으로 분배하려 한다. 한편, 오스만의 압박에 의해 모레아에게 손을 벌린 베네치아는 라리사에 대한 함대 정박권과 주재상인의 거주권을 요청하고, 주인공은 베네치아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기 위해 데미클레오테스에게 베네치아와의 회견을 담당할 것을 명한다. 그동안 제노바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 주인공은 베네치아를 견제할 수단으로 제노바를 사용했고, 그렇게 에게 해를 둔 싸움은 제국과 오스만, 베네치아의 삼파전에서 제노바가 끼어들어 네 세력 간의 혼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제노바와는 별개의 문제인 튀르크인들에 대해, 주인공은 튀르크인들에 대한 동화 정책 및 통제력 강화의 일환으로 그는 온건한 형태의 개종을 요구하기로 마음먹으며, 흔히 개종의 수단으로 사용되던 종교세를 이용해 모든 이교도들에게 종교세를 매기는 대신 제국 정부에 협조적인 이들에 한정해 세금을 환급해주기로 한다. 환급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더 많은 세수가 필요해지는 등 할일이 태산처럼 쌓여가자, 주인공은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는 동안, 주인공에겐 상상도 못한 일이 닥쳐온다. 발칸 전체가 황폐화되는 전란 속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모레아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고, 무려 4만 명에 달하는 알바니아 출신 난민들이 모레아로 향하면서 국력에 큰 보탬이 된 상황에서 무려 교황이 서신을 전해온다.

현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교황권을 회복하고 오스만을 몰아내기 위해 오로지 동서대분열을 종결시키는 데에만 눈길이 향해 있었고, 그리스에서 오스만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이변을 일으킨 주인공에 대해 주목한다. 어린 나이에 교회에서 권장하는 여러 미덕들을 두루 갖추고 튀르크인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 주인공에 대해 교황은 십자군의 결성에 있어 분열을 봉합하는 데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인 주인공의 의중을 알아보려 하고, 이를 위해 그에게 자신이 직접 지지함을 통해 제위를 차지하게 해주고, 동서교회의 통합 또한 지원함은 물론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1]을 열어주겠다고 결정한다. 그는 주인공에게 가톨릭 교회가 어떻게든 힘을 더 실어준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을 작성한다.

* 드라가시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제국의 황제로 인정해주는 대관식을 치룰 의향이 있다.[2]
* 황제와 달리 독자적으로 공의회에 참석할 권한을 주겠다.[3]
* 서방 교회는 그대를 지지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그대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겠다.[4]
* 바로 이번에 있을 십자군[5]에 군대없이 혼자라도 참가하기를 요청한다.

뜻밖에 일어난 상황에 당황하는 주인공이었지만, 그는 네 가지 제안을 담은 서신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그 내용이 완전한 헛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교황이 주인공을 제국의 대변자로 인정했다는 점과 십자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힘을 원한다는 점, 그리고 그가 그리스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세 가지 정보를 서신에서 이끌어내고 서신 그 자체 또한 이용해 다시금 대관식을 위한 모레아 대주교좌의 설치를 요구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수도에 요청을 보내면서, 모레아에게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내전을 택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모레아가 오스만을 꺾으면서 유폐되었던 보수파 인사들은 노타라스의 지시 하에 해방되었고, 그렇게 쿠데타를 일으켰던 주전파 세력과 실각당했던 보수파 세력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채 블라헤르네 궁전에서 불편한 만남을 갖는다. 완전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주인공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무력화되진 않은 주전파 인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렇게 두 파벌이 집결한 상황에서 주인공의 대주교좌 설치 요청 안건이 나오자 좌중은 개판이 된다. 하지만 이미 주인공을 끝까지 지켜줄 것을 신에게 맹세한 요안니스에게는 그런 반발이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주인공이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거나 모레아의 대주교좌 설치를 허락받아 제국을 분열시키는 걸 막기 위해 주인공을 공동황제로 만든 뒤 총대주교가 대관식을 치러준다라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내놓아 좌중을 벙찌게 만든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사건은 제국뿐만이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도 소식이 퍼져나갔고, 특히 오스만은 이에 주목했다. 에디르네로 귀환하기 위해 베네치아와 불가침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협상을 체결한 무라트 2세는 심기가 불편해진 상태였고, 내전의 극복과 토후들의 세력 격파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그의 앞에 아직까지 충성을 유지하던 일부 공신 세력을 결집시킨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는 주인공의 계략을 파훼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3. 각 인물들의 반응 및 변화[편집]


사내는 아나톨리아의 공신 세력 중 무라트 2세에게 충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의 예시로 이스하크 파샤를 들고,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비록 군사력에서 열세에 처해있긴 하지만 공신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이윽고 그는 이번 기회에 제노바가 베네치아라는 공동의 적 때문에 무라트의 편에 서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테살로니카를 얻고 그리스로 다시 진출하기 위함이라 밝힌다. 이후의 대책으로 그는 기독교인들의 오스만에 대항한 코올리션을 무너뜨리기 위해 왈라키아 회유를 첫 번째 목표로 언급하고, 그 이후 선택지로 십자군의 와해를 위해 세르비아를 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사내는 주인공을 세르비아 원정에 종군하게 해 묶어놓을 필요성이 있다 하면서, 기독교 국가들을 기만해 개입을 크게 늦추고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보다 헝가리를 위협적으로 보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이 이뤄진 순간이 무함마드의 예언이 실현될 때라고 말하는 사내에게 무라트는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이에 사내는 찬다를르 할릴이라고 대답한다. 평범한 중년의 남자처럼 보이지만 강력한 열정을 마음속에 품은 그는 충성파 공신세력의 대표자로서 무라트를 섬기기로 맹세한다.

할릴의 구상을 듣고 아나톨리아로 출정하기 전 무라트는 이피로스군과 제노바군을 합쳐 4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증원받고, 신병들을 편성하고 부대들을 다시 편제함과 동시에 모레아와 벌인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한다. 병력은 어떻게든 채웠지만 물자가 부족했던 무라트에게 할릴을 중심으로 한 충성파 공신들이 아낌없이 많은 재산을 쾌척했고, 이를 통해 무라트는 급히 군수물자들을 수매하는 데에 성공해 원정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 전쟁 준비 과정에서 할릴을 신뢰하게 된 무라트는 그에게 한 인물을 보여주려 하고, 이에 명을 받은 투라한이 데려온 인물은 다름아닌 행방불명된 제국의 제2황자,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였다. 그는 사실 망명했던 것이었고, 테오도로스를 가장 잘 활용할 방법으로 할릴은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무라트 스스로가 기독교인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제안하는 대신 적당한 시기에 테오도로스를 교황이 가톨릭식으로 대관식을 열어 황제로 추대하게 만들라 요구하라고 말한다. 그의 놀라운 계책에 감명받은 무라트는 할릴을 그 자리에서 사드라잠[6]의 직위에 임명하곤 전시에 에디르네를 맡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렇게 무라트에게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자리를 받는 데에 성공한 할릴은, 알라가 오스만을 시험하는 듯한 별들의 변화에 대해 오스만의 진정한 힘인 국력을 증명해보이겠다고 다짐한다.

수도와 오스만의 반응과는 별개로 주인공의 관심은 대사면령 이후 합류한 프란시스코만을 향해있었고, 그와 다시 만난 주인공은 이어서 가신들이 맡은 각각의 분야들의 진척에 대해 검토에 들어갔으며, 친오스만 세력 등 중부 그리스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을 빠른 시간 내에 모조리 축출해내는 것, 플레톤이 과거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혀 허송세월을 보내던 수많은 학자들을 직접 하나하나 찾아가 설득하는 데에 쉽게 성공해 수많은 인재들을 영입한 것, 베네치아와의 외교관계 재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을 확인한다. 그와 동시에 평화조약 당시 이피로스군과 제노바 용병을 종군시키기로 약속한 그는 토마스를 지휘관으로 떠나보내고, 소피야와의 관계 또한 재편에 들어간다.

모레아와 오스만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새 반 년이 지났고, 그새 무라트 2세가 이끄는 아나톨리아 원정군은 에디르네를 떠나 출병한다. 1만 2천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원정군으로 편성한 오스만은 끝내 모레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데에 실패했고, 주인공을 가장 가까이에서 도운 소피야는 과거 이피로스에게 첩보를 전했을 때 들은 소식을 떠올리면서 주인공의 도움을 어떻게든 얻으려 한다. 약 1년의 시간만에 주인공이 미스트라로 돌아와 개선식을 갖고, 그는 이내 소피야와 마주해선 인내하면서 둘의 정략결혼 관계를 재편하려 노력한다. 주인공은 원래 소피야에게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반 년간 마음껏 바람을 피우라고 제안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던 도중 소피야에게서 자신이 공동황제로 지명되었음에 대해 알게 된다. 그 사실이 주인공을 당황시키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관계의 긍정적인 재편에는 성공하고 소피야가 "믿음은 선불이란 걸 기억해두세요." 라고 말하며 주인공 하렘 멤버로 들어온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주인공은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피야가 하렘과 관련해서 한 말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다. 끝내 주인공은 수도가 자신을 진짜로 공동황제로 만들려 하는 건지, 아니면 수도로 소환해서 방심한 틈을 타 구금하려는 건지 확신하지 못한 채, 과거 요안니스 8세가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구금되었을 경우라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셋째 형인 구 테살로니카 황제 안드로니코스에게 도움을 청하려 한다. 오스만을 견제한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테살로니카를 아무런 대가 없이 베네치아에게 넘겨준다는 주인공의 계책에 대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안드로니코스만은 동의했고, 그동안 모두에게서 반쯤 잊혀진 채 외롭게 싸워온 그는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주인공에게 많은 조언을 해왔던 점 때문에 주인공은 도움을 청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4. 전면적 개혁과 중앙집권적 국가를 향한 발돋움[편집]


주인공이 모레아로 귀환한 지 3주째, 주인공은 비로소 모레아와 새로운 영토들, 그리고 알바니아 난민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전부터 시행했던 민회의 개선과 함께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하나하나 시행해나간다.

1. 행정 구역 변화: 넓어진 모레아 영토를 미스트라를 중심으로 한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구 아테네 공국령, 라리사를 중심으로 한 테살리아, 이 3개의 구역으로 나눈다. 각 구역에 속한 도시들은 민회를 설립하게 될 것이며, 각 민회의 의석은 총 13개이다.[7]

[8]


2. 각 권역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와 소수민족과 이교 대표, 그리고 도시들의 민회 대표로 구성된 참사회가 구성된다.


3. 사법 제도 정비: 도시에 법원을 재편하거나 새로 건설하여 준법 체제를 구축한다. 도시를 이끌어나갈 민회에서는 각 도시의 사정에 맞는 '도시법'을 제정한다.[9]

또한 도시법이나 민회의 재판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중대한 사항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각 권역마다 하나의 '고등법원'을 설치한다.[10]


4. 종교적 조화: 점령지에 남은 투르크 계열과 이슬람 교도들을 탄압하는 대신 그들의 종교를 존중해 주어 이슬람 교도들이 일정 숫자 이상으로 사는 도시에 새로운 이슬람 사원을 축조한다. 다만 과거에 기독교인들에게 인두세를 부가했던 것처럼 반대로 종교세[11]

를 물거나 10년의 군역을 짊어지게 한다. 또한 이슬람 교도 사이의 법인 샤리아도 존중하여 투르크인에 한하여 샤리아 법관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그 법관은 절대로 비 투르크인 시민의 법정에 참여할 수 없다.


5. 세제 개혁: 다양한 명목으로 징수되었던 세금들을 크게 '정부세'[12]

[13] , '방위세'[14][15] , '종교세'[16], '관세'[17][18]로 통폐합한다.


6. 성직자 개혁: 인원이 15명 미만인 수도원들은 주교와 수도회로 구성된 심문회의 심사를 받게 되어 존폐 여부를 결정짓게 한다. 또한 이전 화에서 여러 번 폐단이라고 언급된 적이 있던 교회의 토지 상속이나 기부가 합당한지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고 심문을 받는다.


7. 난민 문제: 모레아로 피난온 4만명의 알바니아 난민들은 각자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 머물 수 있게 하며, 만약 테살리아와 아테네에 정착한다면 향후 3년 동안 군역과 세금을 면제한다.


군제 개혁: 중구난방이었던 모레아군의 편제를 명확히 하며, 기존의 병력 편제를 새롭게 바꾼다.

* 보병부대 : 5백 명 규모의 편제단위가 파라모네, 두 개의 파라모네를 합쳐 1천 명 규모의 편제단위가 알라기아[19]

가 된다. 현재로 따지면 각각 보병대대와 보병연대 정도의 포지션. 각 파라모네/알라기아는 스쿠타토이, 차코네스, 가스뮬리, 무르타티로 구성된다.

* 스쿠타토이[20]

: 기존의 장창과 사슬갑옷을 무장으로 하여, 전선의 주축이 될 자들이다. 하나의 알라기아를 단독적으로 운용할 경우, 이들을 400명 편제한다. 중앙에서 전선을 구축하는 역할을 맡는다.

* 차코네스[21]

: 기존의 경보병 부대를 새로히 재편해, 보조병으로서 예비대 역할을 맡을 자들이다. 단창과 방패, 가벼운 경장을 무장으로 하여 하나의 알라기아를 단독으로 운용할 시 200명 편제한다. 무너지는 전선을 잠깐동안이라도 지탱하거나, 기동력을 바탕으로 우회하는 역할을 맡는다.

* 가스뮬리[22]

: 라틴인들이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자들로 구성될 혼성부대이다. 하나의 알라기아를 단독적으로 운용할 시 이들은 200명 편제되어 양익을 맡는다. 검과 방패, 사슬갑옷 혹은 중갑을 입고서 양익의 붕괴를 맡는다.

* 무르타티[23]

: 종교세 대신 군역을 택한 자들로, 하나의 알라기아를 단독적으로 운용할 때엔 200명 편제되어 양익을 돕거나 난전을 벌이기에 앞서 궁시로 상대방을 제압할 때에 쓰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비에 따른 무장 준비를 원칙으로 하며, 활을 주무장으로 한 궁병대의 역할을 맡는다.

* 민회는 100명의 중무장한[24]

차코니케 필락시스, 민병대와 정부가 지원하는 경비대로 구성된 지방군을 운영할 수 있으며, 이 부대를 민회는 치안 유지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악용할 수 없다. 다만 해군은 재건하는데 어마어마한 국력이 소모되며 한 번의 해전으로 끝장날 수 있기에 이번 개혁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주인공의 개혁안이 선포되자 모레아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방대해진 세금들은 단 4종류로 통폐합되었고, 제국의 토지와 재산을 잠식해가던 수도원들 또한 태클이 걸렸으며 관세도 비교적 정상적인 방향으로 변경되었고 이교도 또한 지나치게 우대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관대한 처우를 내려 행정 및 경제 면에서 모레아 정부에 큰 이득이 발생한다. 이에 반발할 만한 계층에 해당하는 악성 기득권층이 몇 차례의 개혁과 전쟁을 거치면서 일소되었기 때문에 저항은 없다시피 했고, 특히 제국 중앙정부에 강한 회의를 품고 있던 모레아 본토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레아와는 달리 민회의 실효성을 오랫동안 지켜본 것도 아니고 50퍼센트에 달하는 무거운 세율이 매겨진 아테네 및 테살리아 행정구역의 사람들은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이들 또한 각각의 개혁안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추세였기에 저항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개혁안이 모두 선포되고 한 달이 지난 뒤, 주인공은 후속조치로 인사 발령에 나선다. 행정구역의 재정비와 민회의 설치를 데미클레오테스가 맡는 것을 필두로 니키포로스는 수도원의 존폐를 결정지을 심사회의 구성 및 심사 담당에 앉히고 라틴 기사들과 관련해서도 프란시스코를 담당자로 앉혀 추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 라틴인 기사 편제 : 모든 라틴인 기사는 충성서약에 앞서 능력을 요구받는다. 랜스, 갑옷, 검과 같은 무장들과 종자들이 그 능력의 기준이다. 능력을 통과한 이들에 한해 서임을 약속하며, 이들은 기존의 프로니아[25]

들과 같이 경작권을 부여받으며, 세습이 불가하다. 이를 세습하기 위해선 15년 이상의 복무를 인정받거나 마땅한 상속세를 납부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라틴 기사는 최소 2명 이상의 종자를 대동해야 하며, 모든 무장을 자비로 갖춰야 한다. 대신 라틴 기사는 세금을 면제받을 것이다. 반대로 재정이 궁핍해 앞서 말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경우엔, 10년 동안 기병으로서 복무를 마친 뒤 기사 서임을 받는 동시에 경작권을 부여받는다, 그때까지 이 경우에 속한 병력의 편제는 새로이 편제할 '스트라디오테'[26]에 속한다. 또한 라틴 기사들은 독립적인 부대를 구성하며, 스트라디오테들은 기존의 파라모네에 편성된다. 독립적으로 운용될 라틴 기사들을 이끄는 직책으로는 새로이 라틴 지휘관[27]의 지위를 신설한다.

* 스트라디오테 : 요구하는 장비를 구하지 못한 라틴 기사들이나 알바니아 인들 중 자원자들로 구성 되는 기병대로 경기병으로 분류된다. 카타프락토이를 모레아의 제정 사정상 편성하지 못하기에 편성되는 기병. 실제 역사에서는 16세기에 베니스등에서 활약하는 알바니아인이나 로마인들로 구성 되는 경기병대가 더 유명하지만 실제 14세기 이후에 프로니아를 보유한 로마 기병을 스트라티오테라 불렀고, 라틴 제국의 멸망 이후 영지를 받아 정착한 라틴 기사의 경우 카발라리(Karvallarioi)라고 칭하며 후기로마 제국의 기병 편제에서 스트라디오테의 상위호환으로 들어갔기에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일련의 인사발령을 해둔 뒤 주인공은 아드리아노스의 부재에 못내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이바니아를 호명한다. 주인공은 이바니아와의 계약 갱신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녀에게 지휘관이자 군사 자문가로 종신계약을 체결하고 싶다고 하며 최초의 30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줄어들은[28] 용병단원 전원를 부사관으로 재고용하고 그들에게 언제든지 귀화를 허락하겠다 말한다. 군사개혁의 마지막 요소로 스트라디오테에 대해 추가적인 사안을 발표한 뒤, 주인공은 개혁안에서 해군의 재건이 완전히 배제된 점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게 개혁안 선포가 끝나고 나자, 비로소 모레아에 주인공의 공동황제 지명을 알리는 사신인 디칸이 찾아온다.


5. 공동황제 지명과 대관식[편집]


공동황제 지명 이야기가 나온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주인공은 개혁과 관련된 정야의 불안정을 우려해 대관식 문제는 미뤄두고 모레아의 통치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모레아와 수도는 서로 공동황제 즉위와 관련해서 계속해서 연락하고 있었고, 끝내 디칸이 수도의 정치인들의 의견을 전할 대표로 모레아로 향하면서 주인공은 1423년 9월 23일 수도로 상경한다. 주인공은 베네치아의 배편을 빌려 여정에 나서고, 수도로 바로 향하는 대신 잠시 중간 기항지로 테살로니카에 들른다. 공물 등과 관련해서 (그들 입장에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줬던 안드로니코스의 치세가 끝나고 이방인에 해당하는 베네치아인들이 도시를 통치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자 테살로니카 시민들은 익숙치 않아하면서도 환호했고, 이에 주인공은 베네치아가 오래 버텨주길 바라면서[29] 쓴웃음을 짓는다.

며칠간의 항해 끝에 주인공은 수도에 도착하고, 이전에 수도에 왔을 때 보였던 체념과 절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굳은 각오가 들어섰음을 곧바로 파악하곤 수도 또한 변했다며 이바니아와 이야기를 나눈다. 블라헤르네 궁전에 도착한 뒤 주인공은 요안니스, 안드로니코스와 삼자대면을 하게 되고, 안드로니코스의 중재 하에 셋은 대화를 이어나간다. 주인공은 나머지 둘에게서 수도가 그를 공동황제로 세우기 위해 내린 큰 결단에 대해 듣게 되고, 그동안 미뤄뒀던 문제인 요안니나 또한 직접 대면한다. 요안니나와 만난 뒤 그는 아버지인 마누일을 만나 과거 마누일이 겪었던 여러 일들[30][31]에 대해 듣고, 오스만을 반드시 몰아내기로 맹세한다.

제국의 쇄신의 시발점으로 노황제 마누일 2세는 공동황제의 자리를 두고서 후계자들 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난 책임을 혼자서 짊어진 채 은퇴했고, 이에 맞춰 새 공동황제가 된 주인공의 대관식 절차는 빠르게 준비되어갔다. 원래대로라면 타국에 사신들을 보내 각국의 대표들을 불러모아 권위를 높였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거 없이 대관식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주인공은 정식으로 황제가 되는 절차를 밟게 되었다. 기름부음을 받으며 자신이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 뒤, 제관을 쓴 주인공에게 하기아 소피아 성당 안에 있던 모든 이가 드라가시스를 연호하며 열광한다.


6. 모레아 개혁 이후의 문제 개선[편집]


공동황제에 등극한 주인공의 이름은 본인이 의도했던 대로 드라가시스로 알려지고, 제위 관련 문제가 일단락된 뒤 주인공은 개혁의 유지와 자꾸 달라붙는 소피야라는 두 가지 문제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한다. 라틴인들이 장원을 받음에 있어서 세습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일부러 토지의 규모는 작지만 중앙정부에 영향력을 갖춘 새로운 계층으로 거듭나고자 함을 노렸음과 스트라디오테 편제를 위한 군마 충당이 힘들다는 두 가지 개혁 관련 문제를 접한 주인공은 각각 장원의 지급 지역 제한과 마시장 통제 및 군마 사육 정책 등을 적용하기로 하고, 책임자로 데미클레오테스를 임명한다.

한편 중소규모의 수도원 철폐에 대한 안건 또한 열정적으로 임한 주인공은 수도원 심사에 불만을 품고 요청을 넣는 것을 거부하는 수도원들에게 '강경한 조치'로서 수도원의 전재산 몰수, 수도사들을 비롯한 거주자들을 새로 얻었거나 황폐화되어 복구가 필요한 땅들에 강제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펼치면서 교회의 거센 반발을 산다. 주인공을 알현하는 데에 성공한 수도사들은 영세 수도원들에 대한 핍박을 하는 이유를 추궁하며[32] 비난하지만 끝내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는 데에 실패하고, 대신 주인공은 당근과 채찍 중 당근 쪽에 해당하는 요소로 공정한 심사를 통한 불만 억제와 동시에 수도원에 대한 기부에 있어서 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어 교회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하지만 그 이면엔 교회의 권위를 점차 떨어뜨리려는 주인공의 숨은 의도가 들어있었는데, 일부 성직자들이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기부 행위의 절반을 꿀꺽할 수 있다는 걸 악용해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만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이상 교회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고단수의 계책이 있었던 것이다.


7. 아나톨리아 원정과 오스만의 개혁안 도입[편집]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 주인공의 대관식이 치러지는 동안 무라트 2세 휘하의 1만 2천 명의 군세는 제노바 함대의 도움 하에 아나톨리아로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다르다넬스 해협 쪽을 장악하지 못한 소 무스타파는 그러한 움직임을 저지하지 못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마니사[33]의 총독인 이스하크 파샤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키러 북상했다. 이에 아나톨리아 서부 연안지대에 자리잡고 있던 토후들이 이스하크 휘하의 3천 병력을 조지려 들었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가고, 상륙에 성공한 무라트는 이스하크에게서 전황에 대해 전해듣는다. 비록 오스만군 본대가 도착하는 걸 막는 데에 실패하긴 했지만 카라만 술탄국은 봉기하면서 이코니온을 중심으로 한 이사우리아 지방[34]을 완전히 장악했고 거기에 칸다르 토후국[35]까지 가세하면서 오스만은 아나톨리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압박을 받게 된 상태였다. 이즈미르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각지의 토후들이 사태를 관망하면서 오스만에게 힘을 빌려주길 거부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점까지 알게 되자, 무라트는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수단으로 무력을 통한 실력행사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렇게 어언 1년이 지나, 1426년이 찾아온다. 오스만은 내전을 수습하기 위해 최대한의 역량을 투입했고, 그런 배경 속에서 주인공이 다스리는 모레아는 빠르게 중부 그리스를 재편해갔고 동시에 수도의 중앙정부 또한 오랜만에 비교적 긴 평화기를 갖는다. 그 틈을 타 요안니스는 오스만에 바치는 공물을 절반으로 삭감하고 그렇게 확보한 재정을 삼중성벽 보수에 투입한다는 큰 결단을 내리고, 이에 할릴은 즉시 동원령을 내려 2천 명의 병력을 확보해 제국령 트라키아를 압박하러 나선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한 주인공이 할릴을 엿먹이기 위해 1천여 명의 병력을 라리사 쪽에 전진배치했고, 만약 트라키아를 할릴이 침공할 시 주인공이 통수를 치고 마케도니아를 꿀꺽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그는 후방 안정을 우선으로 하고 군대를 물린다. 콘스탄티노플이 반오스만 정책의 첫 번째 행보로 공물 반감+삼중성벽의 보수를 택했다는 사실은 아나톨리아에서 토후들을 소탕하던 무라트 2세에게도 전해졌고, 이에 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별 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인다. 무라트는 과거 주인공이 협상장을 떠나면서 남긴 '다음엔 되찾으러 오겠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반란을 일으킨 토후들의 군세를 더욱더 철저하게 밟아놓는다.

마침내 무라트는 코니아 평원에서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소 무스타파 휘하의 1만 5천에 달하는 군세와 맞부딪혀 회전에 들어갔고, 대승을 거두면서 토후들을 극적으로 태세전환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들이 충성심 경쟁의 일환으로 자발적으로 많은 재물과 병력을 파견함과 동시에 원래 배신했지만 전투의 결과를 보고 마음이 바뀐 일부 토후들이 전투 한 번 없이 투항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변화하며, 결국 대부분의 지지자와 중립 세력을 잃은 소 무스타파는 패잔병을 이끌고 카라만으로 도망친다. 승전 축하연을 열 장소로 무라트는 오스만의 아나톨리아쪽 수도인 부르사를 선택해 아나톨리아의 정세가 안정되었음을 대대적으로 알리려 하지만, 이에 무라트의 승전에 있어서 중요한 두 선봉 중 한 명이었던 이스하크가 부르사가 아니라 자신의 근거지인 마니사에서 연회를 진행해줄 것을 청원한다. 이 청을 무라트가 끝내 들어주면서 연회는 마니사에서 진행된다.

연회가 물오른 뒤 이스하크는 마니사에서 연회를 진행해달라 한 이유로 한 어린아이를 무라트 앞에 데려왔고, 이에 그는 본능적으로 그 아이가 자신의 맏아들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이스하크는 무라트가 정변을 위해 에디르네로 출발한 날 그의 아내[36]가 자신이 인질이 될 것을 염려해 자살한 이후로 무라트의 아이의 양아버지이자 후견인이 되었고, 이에 무라트는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염두에 뒀던 아흐메트를 입에 담는다. 결국, 무라트는 아흐메트를 앞에 둔 채 더이상 견딜 수가 없어 그를 내보낼 것을 이스하크에게 부탁하고, 아버지인 메흐메트 1세가 느꼈던 아버지로서의 자신과 술탄으로서의 자신의 충돌을 처음으로 느끼면서 아흐메트가 계속 이스하크의 아들로 남는 것을 택한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라트는 축하연에서 공식적으로 아흐메트가 자신의 아들임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아흐메트가 다음에 있을 원정에도 참여할 것임을 밝힌다. 어쨌든간에 이러한 선언은 무라트의 후계구도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리게 되었고 동시에 오스만이 아직 쌩쌩하다는 것을 군세 전체에 각인시켰으며, 그 모습을 본 무라트는 정치적으로도 안정적이고 군대의 충성심과 규율도 완벽한 지금이 바로 소 무스타파의 배후에 있는 카라만을 비롯한 소국들을 칠 기회라고 확신한다. 모두가 찬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후방에서의 증원까지 합쳐 총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게 된 무라트는 부르사로 향해 원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지만, 그 대군이 아나톨리아 원정에 쓰이는 일은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자 최후의 명군인 아쉬라프 바르스바이가 개입해, 소 무스타파의 수급이 든 상자와 함께 서신을 전해와 오스만군의 출정을 저지한 것.

결국, 종교적 권위와 국력, 군사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맘루크를 이길 수 없다고[37] 이성적으로 판단한 무라트는 표정을 바꾸고, 주인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상황에서만큼은 물러서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무라트는 사신이 비웃는 모습을 유지하면서 아쉬라프가 전하는 마지막 전언으로 주인공이 상황의 급변에 대놓고 개입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끝내 폭발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넓은 그물을 주인공이 준비해뒀단 점에 전율하며, 이스하크와 투라한을 제외한 이들을 각자의 자리에 되돌려놓고는 더이상 이번과 같은 굴욕을 당하진 않겠다고 울부짖으며 대규모 군제개혁을 예고한다.

카라만 원정이 돈좌되자 무라트 2세는 즉시 에디르네로 귀환했고, 개선식이나 연회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할릴과 투라한, 이스하크 세 명을 개인적으로 불러 군제개혁에 즉시 착수한다. 내전을 통해 봉건화돼있던 당대 오스만군이 강하긴 해도 정말로 충성심이 확고한지 알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은 무라트는 제대로 된 중앙군을 갖추려 하고, 이에 셋 모두가 동의하는 반응을 보인다. 수많은 행정가들과 지휘관들을 궁정에 모아다놓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무라트는 순식간에 군제개혁안을 완성했고, 개혁안이 완성되자마자 이를 거리낌없이 즉시 발표하기에 이른다.

1. 모든 군사편제를 술탄 직속의 카프쿨루와 토후 및 영주들 휘하의 제벨루로 구분한다. 카프쿨루는 이전까지의 전시 동원령을 통해 토후들에게서 징집하던 병력들과는 다른 상비병에 해당하며, 토지 대신 급료를 지급받고 에디르네를 비롯한 주요 요새 및 도시에 주둔한다.


2. 보병 : 모든 보병은 6개의 '오작'[38]

으로 세분화되며, 각자 다른 임무를 맡는다.

* 예니체리 : 앞으로 예니체리는 정확히 6천 명의 정원을 유지할 것이고, 이들은 가장 뛰어난 병사들로 구성된다.

* 아제미[39]

: 예니체리 중에서 정원이 가득차거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해 떨어진 자들로 구성된다. 예니체리에 결원이 생길 경우 이들 중에서 선발할 것이며, 전장에서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는 자들은 우선적으로 선발된다.

* 제베지[40]

: 제베지는 기존의 전투를 담당하는 병종이 아닌, 무기의 제작과 관리를 담당하는 장인을 일컫는다. 이들은 평시에 예니체리가 사용할 무장을 제작하고 관리하며, 전시에는 수송 업무까지 담당한다.

* 톱추[41]

: 톱추는 화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들로, 포격은 물론 화약의 관리법 등을 숙지하도록 하여 사고를 줄이는 데 힘쓰고, 궁극적으론 화포의 장전과 사격을 숙달시켜 공성속도를 올리는 데에 의의를 둔다.

* 훔바라즈[42]

: 화포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자들. 화포의 관리를 통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분해와 조립을 숙달하여 유연한 운용을 가능케 하는 것을 지향한다.

* 라음즈[43]

: 다른 오작들과 협력하여 다양한 공작활동을 전개하게 될 자들. 공략하기 어려운 성채들에 대한 공략법을 익혀 피해를 줄이는 것이 이들이 창설된 이유이다.


3. 시파히[44]

: 봉토를 수여받지 못한 시파히들과,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선발된 시파히들은 카프쿨루에 속한 카프쿨루 시파히로 재편된다. 이들은 인근 지역의 지방군을 원호하는 기동부대이자 원정에 참가하는 상비군으로서 주요도시인 이즈미르, 부르사, 에디르네에 주둔한다.


4. 제벨루[45]

: 봉토 혹은 경작권을 수여받은 시파히들이 전쟁에 있어 의무적으로 동원해야 할 병사들. 봉토나 경작권을 수여받은 시파히들은 앞으로 '티마르 시파히'[46]라고 불리며, 경작권의 경우 세습이 불가능하다. 이들은 봉토 및 경작권의 가치에 따라 동원해야 할 병사의 수가 정해져있는 대신 세금을 면제받는다.


5. 아킨지[47]

: 영토 내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중인 부족들과 토후들이 지닌 기병들 중 일부를 징집해 아킨지를 창설한다. 이들은 가벼운 무장을 바탕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등의 유격전을 담당한다. 이들을 지휘하는 권한은 투라한 베이가 맡는다.


6. 아잡라르[48]

: 전장에서 용맹을 증명하고 전리품을 얻기를 희망하는 자들은 술탄이 지급하는 장비를 받아 최전선에 서는 아잡이 된다. 이들의 지원자격엔 출신을 불문한다.


모레아보다도 훨씬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안건들을 다수 채용한 무라트는 갈리폴리 반도를 비롯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안전과 루멜리아-아나톨리아간 연결 강화를 위해 해협 양쪽에 2개의 요새를 건설하고, 덤으로 요새를 건설할 때 제국의 몰락으로 버려진 교회나 요새, 성벽 등의 과거의 잔재들을 거리낌없이 활용하라고 명한다. 주인공의 그물을 찢어발기고 제국을 철저히 박살내기 위해 이러한 과감한 결정을 내린 무라트의 시선에 할릴은 자신이 반드시 그물을 찢어내겠다고 맹세하며, 그 말에 만족한 무라트는 제국에게 어떠한 관용도 보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8. 모레아 개혁의 성과 검토[편집]


무라트가 카라만 정벌에 나서지 않고 그대로 철군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은 안도하고, 한편으론 아나톨리아쪽으로 진출하지 못한 오스만이 발칸쪽, 특히 제국을 향해 칼을 돌릴 것에 대해 걱정하며, 계속해서 고민한다. 토마스가 귀환한 뒤 이피로스의 통치를 위해선 군사쪽보단 행정쪽에 특화된 인물이 낫다는 판단 하에 주인공은 인재 풀에서 없어선 안 되는 인물들을 하나씩 지워나가고, 데미클레오테스가 이피로스로 향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하지만 그의 중책 때문에 정말로 파견해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도중, 주인공은 학원에서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플레톤이 강연 도중 테마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말을 꺼내자 다른 학자가 반박을 시도하고 그렇게 둘 사이의 논쟁이 격화되어 험악해지고 있다는 상황 보고를 들은 그는 논쟁에 개입하고, 그 학자가 필수적인 인재임을 직감한 주인공은 학자를 집무실로 데려간다. 학자는 자신의 이름이이 토마스 마기스트로스라고 밝히며, 민회를 통한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등 어느 정도 분권제를 채택하려 하던 주인공의 행보를 거론하면서 군사개혁에 있어서 서방의 발전한 군사학 및 무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직업군인모병제로 나아가는 게 물량 면에서 우위에 있는 오스만군을 질적으로 압도해 모레아를 구할 길이라 주장한다. 결국 그러한 인재를 놓치기 싫었던 주인공은 잠깐의 고민 끝에 마기스트로스를 등용해 테살리아와 아테네 일대의 개혁 담당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원래의 개혁 담당이던 데미클레오테스는 생각해뒀던 대로 이피로스로 보내기로 한다.

한편, 모레아에 나타난 새로운 인재는 행정 인사뿐만이 아니었다. 프란시스코는 무르타티의 지휘관격 인물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고, 그는 무려 에브레노스 베이의 아들이었다. 오만하긴 하지만 명예를 위해선 같은 이슬람교도들도 거리낌없이 저버릴 수 있고 능력 또한 특출한 그는 자신의 이름이 할리드 무르타트고 밝히면서, 주인공이 십자가뿐만이 아니라 초승달 또한 마땅히 곁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곤 충성을 맹세한 뒤 열성적으로 무르타티 훈련 및 군사개혁 입안에 나선다. 그렇게 모레아엔 데미클레오테스, 플레톤, 프란시스코 등의 제1세대 인재들과는 별개로 제2세대로 분류될 만한 인재들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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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을 믿던 서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전성기 동로마 제국의 의전상으로도 그 서열이 신성 로마 제국 바로 다음에 위치하는 프랑스 왕국마저도 개창자인 피핀 3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샤를마뉴를 제외하면 교황이 직접 대관식을 열어주는 일은 없었다. 즉, 마르티노 5세는 제국의 차기 황제도 아니고 (후계가 될 가능성이 크긴 했지만)모레아의 일개 친왕에 불과한 주인공을 최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동급으로 인정하고 자기가 직접 대관식을 주관하겠다고 나선 셈.[2] 교황은 드라가시스가 제국을 위해 정략결혼 파기라는 초강수까지 둬가며 제위 분쟁으로 인한 내전을 피한 인물이란 걸 알고 있다. 근데 그걸 알면서 독단적으로 제국의 황제로 인정해주는 대관식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는 제국에 내전을 불러일으키고, 그동안 드라가시스가 쌓아온 인망까지 모조리 박살내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만 봐도 역대급 트롤링이다.[3] 역사적으로 공의회는 교리 통합의 현장이자, 동시에 교회의 분열 및 개싸움의 현장이기도 했다. 당장에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교회가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면서, 분노한 아리우스파가 레반트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고 당시 영향력을 크게 떨치고 있던 게르만 왕국들을 선동하면서 로마 제국 전체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서기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의 경우 단성론이 단죄되면서 오리엔트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가 크게 반발한 끝에 완전히 떨어져나가고, 이후 이슬람의 팽창 시기에 오리엔트 정교회가 힘을 크게 쓰던 이집트와 레반트 전역이 콘스탄티노플의 밑에 남느니 차라리 이교도인 이슬람과 손을 잡겠다! 라고 하면서 통째로 떨어져나가면서 수백 년간 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력이 레반트를 사이에 두고 힘싸움을 하고, 이집트는 끝끝내 수복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의 경우 교황 세력이 지리멸렬하게 분열해 결국 가톨릭 개혁에 실패하면서 마르틴 루터종교개혁을 불러오게 되었고, 이외에도 많은 공의회에서 여러 파벌들이 격렬한 충돌을 벌여가면서 많은 막장 선례들을 만들었다.[4] 만약 교황이 좀만 더 상식이 있었다면, 콘스탄티노스 친왕이 '방문'하는 걸 기대한다고 쓰는 게 아니라, 교황 명의로 특사를 보낸다고 알리거나 아니면 주인공 명의로 로마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식으로 썼어야 한다. 당시 한 나라의 국왕이 교황을 직접 찾아간다는 것은 '내가 교황보다 파워가 약하다' 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고, 이는 실제 역사에서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오스만 제국과 일선에서 직접 싸우고 있는데, 주인공이 로마를 방문한다고 영지를 비운 틈을 타 오스만 제국이 전면적인 공세를 가하기라도 한다면 어지간히 대비를 잘해놓고 가지 않은 이상 모레아는 큰 피해를 입거나 아예 멸망해버릴 수도 있다. 모레아가 망하면 그 다음은 수도, 그 다음은 세르비아와 헝가리, 그 다음은 바로 북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라는 건 이미 실제 역사가 증명했다.[5] 참고로 이슬람을 향한 십자군이 아닌, 후스파를 없애버리기 위한 십자군이다. 이 또한 십자군이 실패하기라도 했을 경우 알게모르게 사방에 적을 늘릴 수도 있으니 논란의 여지 없이 트롤링.[6] ṣadr-i A‘ẓam : 오스만의 대재상을 뜻하는 말. 셰이크가 담당하는 종교와 카자스케르가 담당하는 사법분야를 제외한 모든 행정, 군사, 인사, 문화 등의 업무를 총괄했으며, 동의어로 대 비지르(Grand Vizier)가 있다.[7] 5석은 친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들이며, 1석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법관이, 나머지 7석은 도시에서 자체적으로 선발한 사람들이 들어선다.[8] 이 정책은 옛날 테마 제도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직접 언급된다.[9] 이 도시법은 상위법인 제국법 아래에 있으며, 만일 상충된다면 이 도시법은 무효가 된다.[10] 현대의 항소 제도를 어느 정도 모방함.[11] 방위세의 1/4 수준[12] 기존의 '인두세'와 같은 세금으로 관료들을 등용 및 유지하고, 기반 시설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세금이다.[13] 기본적으로 각 시민의 수입의 30%로 책정된다.[14] 병사들을 먹여살리고 급료를 지불하는데 쓰이는 세금[15] 수입의 10~20% 정도로 책정되며 각 구역들의 경제사정에 따라 차등적용이 된다.[16] 이교도에게 적용되는 세금[17] 무역상품에 적용되는 세금으로, 기존의 세율을 따라간다.[18] 국내 교역에 종사하는 상공인은 면허를 인가받으면 관세가 면제된다.[19] 원래 명칭은 알라기온이고 뜻 또한 50명~100명 규모의 소규모 군부대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절에 알라기아라는 명칭으로, 중앙군을 나타내는 용어로 완전히 바뀌어 쓰인다. 영어로는 allagion/allagia이고 뜻은 '날개'이다.[20] Σκουτάτοι / skoutatoi : 직역하면 '방패를 든 장정'이라는 뜻. 이라클리오스 황제 시절부터 있었던 뿌리깊은 편제다. -캡틴 아메리카 아니다-[21] Τσάκωνες / Tsakones : 기원후 10세기경부터 생계유지가 어려운 자들을 중앙정부/지방정부에서 병사로 고용해 차코니케 필락시스로 편제했던 것에서 유래하며,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일반 시민들에게서 '비글리티아콘'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거두어 봉급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주로 지방군에 배치되었다.[22] Γάσμουλοι / Gasmouloi : 그리스인과 라틴인이 혼인 및 친교관계를 통해 피가 섞이면서 생긴 혼혈들로 편성된 부대로, 처음에는 함대에 배속된 일종의 용병 해병대였으나 미하일 8세 당시 해군 병력이 부족해 차코네스 병력을 끌어오기 시작한 이후 여러 황제들이 인력 및 자금 부족을 이유로 해군력을 점차 축소하면서 배치장소가 없어진 부대들이 점차적으로 육상전에 동원되면서 결국 육군 병력 중 일부로 편입되었다. 여담으로 원 역사에서는 석궁으로 무장한 석궁병이었으나 무르타티와 역할이 겹쳐 여기서는 중갑검보병이 된 듯 하다.[23] Μουρτάτοι / Mourtatoi : 무르타토이라고도 읽으며, 보병 궁수를 지칭한다. 어원은 '배교자' 혹은 '배신자'를 의미하는 투르크어 단어인 '무르테드' 혹은 '무르타트'에서 기원한 것이며, 기독교로 개종한 투르크인 혹은 투르크인과 그리스인의 혼혈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투르크인이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11세기 이후에 편제된 것은 분명하다.[24] 창과 사슬갑옷으로 무장.[25] Πρόνοια / pronoia : 프로노이아라고도 읽으며, 정식으로 정착한 건 알렉시오스 1세 시기이다. 중소 규모의 영지를 부여받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봉급을 대신하는 제도이며, 테마 제도의 붕괴와 동시에 시작되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까지 계속 이어진 제도이다. 기병대가 프로니아 제도의 수혜자 대부분을 차지했다.[26] Στρατιώται / stratiotai : 실제 역사에선 프로니아를 받았던 로마 기병들에 해당한다. 원래는 프로니아리라 불렸으나 14세기 이후부터 군인이라는 뜻을 가진 스트라디오테라 불렸다. 경기병이라 나오지만 실제 이들은 카타프락토이만큼 중무장이 아니었을 뿐이지 나름 사슬 갑옷, 방패등으로 무장하고 랜스 돌격을 하는 중(中)기병이었다.[27] 실제로도 로마 제국에는 라틴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는 메가스 코노스타블로스 라는 지위가 있었다. 이 지위가 모티브인 듯하며 이 자리에는 돈 프란시스코가 임명된다.[28] 전사, 부상으로 인한 퇴역, 귀향이 주된 이유다.[29] 실제 역사에서 무라트 2세는 테살로니카를 베네치아의 약점으로 삼아 공물을 뜯어내고 싶으면 허구한 날 봉쇄를 시전했고, 이에 참다못한 베네치아인들이 1430년 도시를 완전히 포기한다.[30] 1371년 9월 26일의 마리차 전투. 당시 스테판 두샨 사후 아무리 쇠퇴했다고는 해도 제국으로서의 국체 정도는 유지하고 있던 세르비아는 오스만을 철저히 밟아놓기 위해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봉건 영주들 간의 알력다툼도 있고 규율도 개판이라 단 800명의 오스만군 결사대에게 야습당해 학살당하다시피 하고 세르비아 황제와 친왕은 난전 중에 쥐도새도 모르게 전사, 수천 명의 병력이 마리차 강에 빠져죽는 추태를 보였다. 여담으로, 이 전투는 할리드 무르타트의 아버지인 에브레노스 베이가 처음으로 대활약을 펼친 전투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31] 1390년의 필라델파에아 함락. 당시 마누일 2세는 튀르크가 도래한 이후 수백 년간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아나톨리아 최후의 제국령으로 남아있던 필라델파에아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려야 했다.[32] 이때 수도사들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라.' 라는, 신약 누가복음 20장 25절에 나온 구절을 인용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신약성경에서 이 구절을 말한 의도는 세속과 교회 양대 세력의 상호간섭을 막는 것인데 이 경우 모레아의 수도원들을 비롯한 교회 세력이 세속 세력의 권리를 침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33] 그리스식 이름은 마그네시아(Magnesia). 자석과 마그네슘의 어원이 된 리디아의 도시이다.[34] 작중에선 이코니아 지방이라고 나오는데, 아마 작가가 이코니온의 다른 이름인 코니아를 지방 이름으로 착각한 듯하다.[35] 파플라고니아 지방에 위치하고 있던 토후국. 발음이 애매해서 칸다르, 찬다르, 잔다르, 찬다를르 등 부르는 방식이 여러 가지이다. 여담으로 이 나라에서 작중 등장인물인 할릴의 출신 가문인 찬다를르 가문이 시작되었다.[36] 아마시아의 예니. 카닉 토후국의 파샤자데 무스타파 베이의 딸이며, 대략적인 생몰년이 알려져있는 다른 아내들과는 다르게 생몰년이 알려져있지 않다.[37] 오스만이 맘루크를 완전히 제압한 것이 16세기 셀림 1세의 제위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까지 맘루크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를 보호하고 있는(몽골을 격퇴하고 난 뒤 아직 살아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손을 데려와 칼리파위에 앉혔다.) 이슬람 세계의 최강국가였다.[38] ocağı : 오스만 투르크의 확장기에 편성됐던 보병전력으로, 아제미/제베지/톱추/토파라바즈/라음즈/예니체리/훔바라즈 7개 구분이 있었고 예니체리는 다시 보스탄즈, 솔락, 페익, 오크추, 투페케지, 지르힐 네페르 6개 구분으로 나뉘었다. 다만 토파라바즈와 훔바라즈는 역할 구분이 안됐기 때문에 작품 내에선 통합된 듯.[39]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을 지칭. 예니체리 내에서 상대적으로 짬을 덜 먹은 훈련병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40] cebeci : 카프쿨루들의 무기 제조를 담당하던 부대.[41] topçu : 포병대.[42] humbaracı : 화포의 제작, 수송, 사용을 담당하던 부대. 실제 역사에선 예니체리가 타락하자 오스만군 내에서 최정예+높은 규율을 자랑하는 사실상의 주력부대가 되었다.[43] 단일 부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부대에 소속된 공병대로, 실제 역사에선 땅굴을 파서 성벽을 무력화하는 데에 특화되었고 두 번의 빈 공방전에도 투입되었다.[44] sipahi : 페르시아어로 '병사'라는 뜻을 갖고 있고, 오스만 제국의 중무장 궁기병 및 중기병 전력을 담당했다. 크게 루멜릭 시파히와 아나톨리아 시파히로 구분되었으며, 루멜릭의 경우 서양 기사대와 비슷한 무장을 갖췄고 아나톨리아의 경우 중앙아시아 풍의 궁기병의 장비를 사용했다.[45] jebelu : 봉토를 지급받은 시파히들이 필수적으로 동원해야 했던 병력으로, 일인당 최대 다섯 명(티마르)에서 스무 명(지아멧) 정도가 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시파히 본인의 아들, 남자 형제, 조카 등이 동원되었고, 그러한 특성상 일반적인 시파히들과 거의 같은 수준의 무장을 갖췄다.[46] 티말리 시파히를 지칭. 티마르는 정확히는 티말리 시파히가 지급받는 봉토인 티마르 및 지아멧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고증상으로는 틀린 셈.[47] akıncı : 비정규군에 해당하는 경기병 및 정찰기병 부대. 다만, 몽골의 기병과 같이 딱히 중무장 없이도 매우 잘 싸운 것으로 유명했으며, 16세기 후반~17세기 초 왈라키아가 오스만에게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활약하다 대재상 시난 파샤에 의해 토사구팽당하고 어이없이 공중분해된다. 참고로, 이들을 동원하는 데에 근거가 되었던 구역이 바로 티마리오트 제도에 기반한 에얄레트(eyalet)였다.[48] azap : 예니체리와는 별개인 징집병으로, 비정규군으로 활용됨은 물론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고, 전장에 보급품을 전달하며, 아예 총알받이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모 나라의 군대가 생각난다 참고로 실제 역사상 이들 중에선 바쉬보죽(başıbozuk)이라 불리는 죄수부대가 존재했는데, 부랑자들과 중범죄자들로만 구성됐으며 오스만군 내에서도 특히나 흉포하고 잔인하며 규율 따윈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약탈 및 근접전의 스페셜리스트 부대로 악명이 매우 높았다. 만약 작중에서 이놈들까지 나왔으면 말그대로 충공깽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예측되었고 이들은 실제로 보주쉬크라는 이름으로 3차 오스만 전쟁때 창설되어 선봉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가 불굴 특성 단 제국군이었던지라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리타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