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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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
1.2. 북한측 자료
1.3. 리처드 쏜턴 교수
1.4. 맥아더의 중공군 확전 유도
2. 학계에서



1. 개요[편집]


6.25 전쟁 이후 미군의 개입이 스탈린의 의도였다는 가설이다.


1.1.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편집]


김일성의 남침 의욕과 스탈린의 승인에 따라 6.25 전쟁이 터진 뒤,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군의 침략 문제를 내놓는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UN은 북한군을 침략군으로 규정한 뒤 침략군을 막기 위해 유엔군을 조직한다.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해 이를 막았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소련이 불참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후에 공산 정권 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첫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는 이것에 대해 스탈린한테 항의를 했다. 스탈린은 이 항의를 받고 편지로 답변한다. 이 편지 내용은 당연히 기밀이었으며 몇 년 후에 밝혀졌는데 거기에 충격스런 내용이 담겼다.

그건 바로 스탈린이 미군이 개입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로 유도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기고, 그 사이에 유럽을 안정적으로 공산화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목적이라는 내용이다. 박태균 교수가 말하길 해당 편지 내용이 사실이라면 "6.25전쟁에 대해 미국에 의한 남침유도설이 아니라 소련에 의한 '미국개입유도설'이 제기되어야 한다"고 했다.[1] 리처드 쏜턴 교수는 미국이 북한군의 침략전쟁을 알고있으면서 방조해서 남침을 유도했고, 이를 알고 있던 소련 역시도 미국과 중공군의 개입을 유도했다고 한다.

해당 원문이다.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1950. 8. 27)

-최고비밀문서

프라하, 소련 대사.

고트발트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구두로 전달하시오. 만약 그가 글로 쓴 문서를 원한다면 그에게 복사본을 하나 주어도 됩니다. '6월 27일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표를 철수한 일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고트발트 동지의 의견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여하지 않은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소련과 새로운 중국의 연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입니다. 둘째, 그들이 국민당 정부의 허수아비를 안전보장이사회의 대표로 인정한 반면 중국의 진정한 대표가 이사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정책의 부조리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셋째, 거대한 두 나라의 대표가 부재함으로써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이 합법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입니다. 넷째, 미국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미친 짓을 하도록 놔두고, 이를 통해서 세계 여론으로 하여금 미국 정부의 진정한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이러한 모든 목적이 이미 달성 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철수한 이래로 미국은 한국의 군사적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수렁에 빠져버렸고, 군사적,도덕적으로 그 위신을 깎아 먹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한국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적이자 침략자라는 점과 함께, 그들의 군사적 힘이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점과 동시에 미국이 그들의 관심을 유럽에서 극동으로 옮겼음이 분명합니다. 전 지구적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우리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미국 정부가 계속해서 극동에 묶여 있고, 한국의 해방을 위한 투쟁과 독립을 위한 싸움에 중국이 끼어 들어간다면, 이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미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같이 거대한 갖고 있는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스스로 힘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둘째 단기적으로 볼 때 미국이 여기에 묶여 있다면 제3차 세계 대전은 무기한 연기될 테고, 유럽은 사회주의를 공고화하는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 아시아와 극동 전체에서 혁명을 불러올 것 이라는 점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계적 차원의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까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여하지 않은 일이 자연스럽게 예상되지 않으며, 또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 진영이 안전보장이사회를 떠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떠나느냐, 남느냐의 문제는 특별한 상황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다시 떠날 수도 있고, 또는 다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국제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왜 다시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여 했는가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자신의 침략 행위를 숨기기 위해 안전보장이사회의 빛나는 깃발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6.25전쟁에 이미 개입한 이상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그들의 목적을 더 용이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필로프 1950. 8. 27.[2]

- 사회정치사를 위한 러시아 국가 자료원, fond. 558, opis, 11, delo, 62, lifty. 71~72[3]


이것들은 스탈린의 허세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스탈린은 공산주의권 전체에서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숭배를 받던 인물인데, 6.25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이 이를 저지하러 나서는 상황에서 '미국의 개입을 예상 못한 오판을 했다'고 인정하면 스탈린 자신의 권위를 크게 훼손 시키기 때문이다. [4] 다시 말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정신승리 항목의 '낚시 사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논리로는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또 다른 의견으로, 스탈린은 한반도가 적화통일되면 그거대로 좋고, 미군개입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하면, 중국군이 순망치한으로 개입할테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중국을 소모시키면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게 되니까 어떻게 되더라도 좋았으리라고 계산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스탈린 생전에는 계속 딴죽걸면서 휴전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탈린이 죽고나서 매우 빠르게 휴전협상이 진행되어서 전쟁이 끝났다.

유럽 대륙에서 곧 미-소 간 전쟁이 곧 임박 했으며 미국의 군사적 역량을 한반도에 묶어 두는 것이 유럽 대륙에서 곧 발발할 전쟁에서 소련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은 스탈린은 중공 지도자들과 북한 지도자들이 한국전쟁을 지속하는 작전에 대해 우려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다. 1953년 5월에 이르면 소련 내부의 공산당 지도자들 모두가 한국에서 지속되는 전쟁을 중단해야만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스탈린의 사망은 소련의 고위 지도자들로 하여금 일련의 정치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것이었다. 소련의 외교 정책의 전면적인 선회와 그로 인한 중대한 국제 체제의 변화는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의 고위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가능했다. 1953년 봄과 초여름, 특히 소련의 지도자들은 이제 한반도에서 스탈린이 고집한 ‘잘못된 정책’을 중단할 수 있었고 동시에 신속한 사태 종결을 추구했다. 1953년 봄과 초여름 소련의 정책은 얼마전 스탈린 지배 하에 견지되었던 정책 기조와 비교해 급격히 변화했다. 따라서 휴전 협정은 7월 26일 체결될 수 있었다.

Stalin’s Death and the Implications for Ending the Korean War(스탈린의 사망이 한국전쟁 휴전에 미친 영향) #


1.2. 북한측 자료[편집]


북한측 자료인 조선노동당 역사 문헌 자료실에서도, 소련이 미국의 개입을 유도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한다.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한 탈북자 장진성이 당 역사문헌자료에서 확인한 김일성 발언에 의하면, 소련이 고의로 북한군의 작전을 방해했다고 한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3일 동안이나 지체했는데, 이는 소련의 방해때문이었고, 결국 미군 개입전에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김일성이 간부들 앞에서 스탈린에 대한 증오를 역설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문건은 1976년 경 외무성에서 기록 정리한 것 이었는데 그 교시 내용이란 것에서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조국전쟁 이후 국방 공업을 우선적으로, 그 다음에 농업과 경공업을 다 같이 발전시키자는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스탈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조국 통일을 방해하고 가장 치명적 상처를 남긴 제일 나쁜 사람이다. 내가 늘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가슴을 치며 통탄하는 것이 바로 서울 점령 3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서울에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그 기세로 쭉 밀고 나갔다면 미국 놈들의 생각도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주겠다던 무기를 주지 않았다. 그때 가진 것으로만 밑까지 쭉 내려가기엔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소련 놈들은 서울이 그렇게 빨리 점령 당할지 몰랐다고 후에 변명을 했지만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애당초 스탈린은 미국이 무서워 무기를 줄 생각을 안 했다. 그 무기를 기다리며 3일 동안 서울에서 엎어져 있는데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스탈린은 장사꾼이다. 전쟁 이전에 준 무기들도 그냥 지원한 것이 아니다. 일본 놈들이 남기고 간 발전소, 제철소, 주요 설비들과 설계도면을 대신 다 가져갔다. 심지어는 철도 레루(레일)까지 뽑아가겠다는 것을 내가 안 주었다. 조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 3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밤잠을 자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자주 국방 공업만이 조국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국가의 제일 정책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황장엽 선생도 작고 하시기 전 한국의 보수 대표 논객인 조갑제 씨에게 비슷한 비화를 들려 주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남침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것은 서울을 점령한 뒤 바로 한강을 건너지 못한 때문이라고 아쉬워하더란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김일성은 스탈린 탓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탈린이 도하 장비 등 군수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갑제 씨는 얼마 전 제가 쓴 글과 6.25전쟁 관련 해외 자료들을 근거로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먼저 2000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의 리처드 C. 소른턴 교수가 쓴 <왕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모택동, 그리고 한국전의 기원>이란 책을 소개했는데요, 소른턴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6•25 남침전쟁이 김일성의 공산 통일 야욕으로 일어난 듯이 보이지만 스탈린의 더 큰 전략 구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 뒤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국을 미국과 중국의 대결장으로 만들려는 의도 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과 적이 되면서 소련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스탈린의 악몽 이던 미,중 접근은 차단된다고 타산한 것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씨 일가의 실체]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동안 축제를 한 이유#


북한은 미국의 폭격으로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황폐화되고 인구 수가 격감하면서, 제발 좀 휴전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스탈린은 휴전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계속 전쟁을 지속하도록 밀어붙였다. 중국측 사료가 공개되면서 선즈화 교수의 <마오, 스탈린과 6·25전쟁 : 1950년대 공산권 국가 삼각관계> 라는 저서를 국방일보에서 소개한다. 스탈린이 중국과 미국과 북한을 이용해 먹었다고 한다.#


1.3. 리처드 쏜턴 교수[편집]


조지워싱턴 대학 교수 리처드 쏜턴 <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번역본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 에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 중국과 미국이 서로 싸워서 이이제이를 하려면, 북한이 남한을 점령하는 적화통일에 실패해야만 했고, 소련이 만들어준 전쟁계획, 전쟁의 수행, 제공된 무기와, 주지 않은 무기, 무기의 제공 시점에 대한 자료를 분석해보면, 스탈린은 북한군의 승리를 막으려 했다고 분석한다. 스탈린은 전쟁에서 한강 등을 건너는 도하 장비를 북한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또한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약속을 받아와야지만 김일성에게 전쟁을 허용해준다고 말했었고, 실제로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구했는데, 이는 김일성의 패배를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로도 스탈린은 북한군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마오쩌둥에게만 파병을 요구했다. 쏜턴 교수는 또한 미국도 미국 나름대로 NSC-68의 목적을 위한 군비증강이 필요해서 북한의 침략 전쟁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조해서, 남침을 유도했다고 한다.


1.4. 맥아더의 중공군 확전 유도[편집]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에서 맥아더 파벌이 소련의 계략에 완벽히 부응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로, 중국에 대한 롤백(rollback) 정책을 시행하여 중국 공산당을 몰아내고 자유주의 정권을 수립하길 원했다. 그래서 장제스를 한국전쟁에 끌어들이길 원했으며,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바로 다음날 대만에 가서 장제스를 만났으며, 1950년 7월 말 대만을 방문하여 장제스에게 한국전쟁을 기회로 중국을 수복해내겠다고 약속했다.

미 극동군 총사령부 특수정보관으로 은성 무공훈장을 3번이나 수훈한 KLO 첩보부대 장교 '연정'의 회고록 <캐논기관에서 드러난 증언> 국내 번역명 신간<6.25 전쟁 비화> 구판< 6.25동란 비화>에서 맥아더가 만주를 공략하고 싶어해서 중공군 개입 첩보를 일부러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연정은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신의주에 잠입해 이들의 참전을 확인하고 연합군에 보고한 신의주 작전을 완수했다. 맥아더 사령부 산하에서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의 지휘를 받는, 캐논 소령의 첩보부대는 한국인 첩보원들을 다이롄, 뤼순, 신의주로 침투시켜서 정보를 받았는데, 중공군이 대규모로 집결하여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한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한,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반도와 만주의 접경지역은 한국군이 점령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맥아더는 미8군과 10군단에게 국경까지 진격하라는 도발적인 명령을 내렸다.

제임스 하우스만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의하면,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 부대인 스미스 부대의 패전도 맥아더가 사단병력의 북한군에게 대대 병력을 투입하면서 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북한에게 알려서, 북한군이 재정비를 하여 진격속도를 늦추도록 하였다고 한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는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는데,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 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국군이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장군, 그는 중국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북진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원폭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심모는 참으로 탁월합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중국 개입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통은 맥아더의 답장이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관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원폭도 불사할 것입니다.” 편지의 날짜는 10월 13일이었다

정일권회고록, 고려서적, 1996, 305~306쪽


정일권의 회고록에 의하면,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고 있었다. 사실 오히려 중공군의 개입을 바라던 바였다. 맥아더는 일부러 중공군의 개입할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거짓말하면서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허가받았고, 중공군과의 전투가 벌어짐으로 인하여 확전을 통해 중국을 수복하여 롤백을 이루길 원했다. 정일권 회고록 뿐만이 아니라, NSC-68을 작성한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폴 니체의 맥아더 감청기록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1 #2 #3 #4 당시 조지 케넌은 38선 이북 진격을 반대하였는데, 만약 38선 이북 진격이 이뤄진다면 롤백이 되어버려서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군 참전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미 당국자들 사이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사건은 웨이크 섬 회담(Wake Island Conference)이었다.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이루어진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사이의 회담은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트루먼과 그 참모진들은 맥아더가 이 회담에서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고 후에 평가했다. 즉 중국군 개입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을 때 맥아더가 중국군 개입 시 발생할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왜곡하여 정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

국내에서는 이 회담을 둘러싸고 색다른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맥아더가 중국군 개입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축소·보고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강조한 인물은 바로 정일권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0월 13일자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의 전문을 들어 관련 사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일권의 회고록을 가지고 문제를 증폭시킨 것은 ≪월간조선≫이었다. 조갑제는 니츠(Paul Nitze)의 회고록[5]

을 동원하여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이승만-맥아더 사이에 중국군 개입을 통한 확전을 도모했다는 일종의 묵계를 주장했다.

...

맥아더 본인이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은 그의 정보참모인 윌로우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의 저서에서도 엿보인다. 즉 맥아더사령부에서는 중국군의 이동 상황에 대해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워싱턴 당국에도 지속적으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윌로우비의 주장에 따르면 한 나라의 전쟁 참전 가능성에 대한 최종 판단은 정치가의 몫이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맥아더사령부의 정보 실패를 변명하고 있다.

...

1950년 10월 19일 오후 5시 30분, 제40군의 도하를 시초로 하여 중국인민지원군의 주력 부대는 당일 밤에 3개소의 도강 지점에서 압록강을 건너 남하했다. 중국의 참전은 이로써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인 G-2는 거의 정확히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8월 말, G-2의 윌로우비는 약 9개 군(25만 명)의 중국 병력이 만주에 이동했다고 보고했다. 인천상륙 이후에는 만주에 집결한 중국군의 수가 45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추가적으로 보고했다. 윌로우비에 의하면 8월 27일, 9월 8일 등 여러 번에 걸쳐 중국의 참전에 관한 보고서를 워싱턴 당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10월 5일 북한에 중국군이 개입하였다는 믿을만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극동군사령부 정보장교들은 만약에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공공연히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윌로우비는 워싱턴에 보내는 보고에서 최소한 38개 중국군 사단 중에서 9개 내지 18개 사단이 한만국경에 집결하여 월경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상호, 웨이크 섬(Wake Island) 회담과 중국군 참전에 대한 맥아더사령부의 정보 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2008 # [6]


브루스 커밍스는 맥아더가 중국군 개입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의 전쟁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녹취록, Tape 20: 브루스 커밍스>.

2012년 미 해군성이 발행한 '미 제7함대 역사'에 따르면, 맥아더는 1951년 4월7일 동해에 있던 7함대 소속 77기동대(Task Force 77) 의 두 항공모함을 대만 해협 중국 측 해안 근처로 파견하며 무력시위를 지시하였고, 4월11일 오전 11시경 구축함 존 보울호(USS John A. Bole)가 중국 해안에서 3마일 거리까지 접근하여 영해를 침범하였으며, 함재기들이 중국 항구 근처에서 위협비행까지 하였다. 바로 다음날인 4월 12일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경질했다.맥아더, 한국전쟁기간 중국연안 침공 확전위기 문서발굴 #


2. 학계에서[편집]


보다시피 최근 가설이기에 대중 교양서에는 잘 나오지 않은 가설이다. 일단 공식 학계에선 아직까지는 안보리에서의 소련의 불참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인정 문제 때문에 소련이 UN에서 보이콧을 벌이던 것의 연장선이라고 보고 있다. 혹은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이런 형태의 직접적인 개입 유도보다는, 미군이 개입한다 해도 크게 상관없다고 여기는 일종의 '미필적 고의'라는 학설이 강하다. 소련에게는 당시로선 일개 아시아의 소국인 북한 지역보다 유럽 지역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국방일보에서 조지워싱턴대학 교수 리처드 쏜턴이 2000년대 저술한 『 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을 소개하였는데,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이를 번역하여 출간한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에서도 나온다.

2008년 6월 베이징대 한국인 교수 김동길의 논문에서 처음 소개했다.

국내 대중 교양서 중에서는 박태균 교수가 2013년 쓴 책에서 최초로 소개했다.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한국 현대사의 그때 오늘, 역사비평사, 2013 참고 바란다.

국내에서 이런 해석을 내놓는 연구자 중 대표할 만한 사람은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가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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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2013, 190쪽[2] 필로프는 스탈린의 필명[3] 출처: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2013, 187쪽~189쪽[4] 출처: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2013, 191쪽)[5] Paul H. Nitze with Ann M. Smith and Steven L. Rearden, From Hiroshima to Glasnost: At the Center of Decision, A Memoir(New York: Grove Weidenfeld, 1989), pp.109~110.[6] 해당 논문은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예측했다는 증거가 관련자 증언밖에 없고 물증이 없다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애초에 예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 머리를 열어보지 않는 이상 물리적 증거를 찾기가 원래 어렵다. 예측만 하고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물증이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련자 증언이 교차검증이 되고 있는 상황인데, 이 정도면 법정에서도 증거로 채택된다.[7]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