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 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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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목천 돈씨(木川 頓氏)는 한국사의 명장인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시조로, 중시조를 을지수(乙支遂)로 두고 있는 성씨이다.
2. 기원[편집]
돈씨가보(頓氏家譜)에 의하면, 을지씨는 원래는 을(乙)씨였는데, 고구려 을지문덕 때에 '을지(乙支)'씨로 바뀌었다가 후에 '돈씨(頓氏)'로 변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을지문덕의 16세 후손 을지수(乙支遂)가 동생인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등과 함께 고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에 의병장으로 서경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졌고 돈(頓)씨를 사성 받았다. 이후 을지수의 증손인 돈예숭(頓禮崇)이 목천(木川)[1] 으로 이주해 살면서 본관을 목천으로 하였다고 한다.
3. 집성촌[편집]
평양시 평남선 대평역(大平驛) 근방에 을지묘라고 전해 오는 큰 고분이 있는 이 인근에 돈뫼(頓山)라 하는 동네가 있고 이 곳에 을지문덕 장군의 후손들이라는 돈씨 집안 30~40호 가량이 있어 이 일대가 돈산군(頓山君)의 봉토로 여겨지고 있다.
4. 동국여지승람의 유래[편집]
동국여지승람에는 목천 돈씨에는 재밌는 설화가 하나 전해져 내려오는데, 본래 돈씨 집안은 백제 유민으로 고려에 누차 반기를 들어 태조 왕건의 미움을 사 돼지를 뜻하는 '돈(豚)'씨 성이 됐다가 뒤에 복성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자주 소란을 피워 그 지방 주민들에게 돈(豚)·상(像·코끼리)·우(牛·소)·장(獐·노루) 등 짐승 이름을 성으로 삼게 했다. 이들 성은 후에 돈(頓)·상(尙)·우(于)·장(張)씨로 한자를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설화가 실린 동국여지승람은 편찬되었던 시기가 이미 고려 태조 때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조선 성종 때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 지역에 구전되던 민간 설화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을지씨 가문이 보덕국의 고구려인들같이 구 백제령으로 이주했다가 후백제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상씨 외의 다른 성들이 후백제에서 주요 인물로 활약한 기록은 전무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역시 그리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2]
5. 을지문덕이 목천 돈씨의 조상인가?[편집]
혹자는 목천 돈씨가 숭조 사업을 통하여 족보를 부풀린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숭조사업은 보통 비슷한 성씨의 인물을 이용한다.[3] 그런데 돈씨는 을씨가 을지씨로 또 을지씨가 돈씨로 개성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의 부연설명을 첨가해가면서도 굳이 목천 돈씨가 을지문덕을 시조로 만들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장 한나라 시대 효자로 유명한 인물인 돈기(頓琦)를 시조로 하는 것이 더 간편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나 중세시대에는 지역명을 따서 성씨를 짓는 경우가 흔했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국의 당씨(唐氏)는 중국(원나라)에서 도래한 성씨가 아니라 다원리(茶阮里)라는 지명이 당(唐)과 발음이 비슷해서 생겨난 성씨이다.[4]
평양 인근에는 목천 돈씨 가보와 관련된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1935년 10월 1일~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준연의 답사기' 그리고 별건곤 34호참고에 연재된 을지문덕 묘 참배기에 따르면 을지문덕 묘의 위치와 그 묘 근처에 사는 돈씨를 인터뷰한 내용을 볼 수 있다.[5] [6]
결론은 목천 돈씨가 을지문덕의 후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인구[편집]
돈씨는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황해도 안악군, 황주군 등 북한 지역에만 36가구가 있었다.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985년 16가구 69명이었고, 2000년에는 38가구 115명, 2015년에는 117명으로 조사되었다. 그 가운데 목천 돈씨는 86명이었다. [7]
7. 인물[편집]
- 을지문덕 - 영양왕 대의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를 지켜낸 불세출의 명장으로 목천 돈씨의 시조이다.
- 을지수(乙支遂) - 중시조. 을지문덕의 16세손으로 동생인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등과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의병장으로 참여해 큰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고 돈씨 성을 사성받았다고 한다.
- 돈정신(頓貞臣) - 평양 출신의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조방장(助防將)[8]
- 돈지철(頓志轍, 1778 ~ ?) - 1813년(순조 13) 별무사(別武士)로서 증광 무과에 병과 84위로 급제. 당시 거주지는 평안도 평양부였고 아버지는 학생(學生) 돈치황(頓致晃)이었다.
- 돈지문(頓志文, 1794 ~ ?) - 1813년(순조 13) 장교(將校)로서 증광 무과에 병과 134위로 급제. 당시 거주지는 평안도 평양부였고,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한 돈치로(頓致魯)였다.
- 돈지덕(頓智德) - 축구선수(은퇴)
- 돈종권(頓宗權) -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유공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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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2] 후백제에 우봉이라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한자가 又奉이다.[3] 신라의 김씨 왕실도 자신들의 선조를 김일제(金日磾)로 숭조한 기록이 문무대왕릉비에 등장한다.[4] 신라 단산(端山)의 석굴에 보관되어있던 고문헌들을 참고하여 조선 명종 시기에 제작된 야사집인 삼한습유기(三韓拾遺紀)에 의하면 조선의 당씨(唐氏)와 독씨(禿氏)는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예맥계 부족 국가인 행인국(荇人國)의 출신 성씨이다.[5] 돈씨 문중의 일원인 돈종각(頓宗珏) 씨에 따르면 평남 강서군 잉차면 2리 현암산 동쪽 기슭에 을지문덕의 묘가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6] 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 호에는 '조만식, 최윤옥, 김병연, 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잉차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하여 현재는 어떻게 되었을지 알 길이 없다.[7] 목천 86명, 함평 12명, 태평 11명, 을지 5명, 기타 3명[8] 평양 10장사중 한명이었다고 하며,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도중 장렬히 전사하였다.[9] 1882년 ~ ?.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대평외리 출신. 1919년 3월 경 평남 대동군 대보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6개월의 징역형을 처분받았음. 201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