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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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慕尼夫人[1]
생몰년도 미상

백제의 인물. 국내에는 기록이 없고, 일본 측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주석으로 인용된 백제신찬에서 언급되는 인물이다.

'부인(夫人)'으로 호칭된 점을 볼 때, 당시 백제의 귀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

일본서기에 주석으로 달린 백제신찬에 의하면 개로왕이 즉위한 후 천황이 아레나코라는 사람을 보내 여자를 물색하게 했고 백제는 모니부인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이라 하고 보냈다고 한다. 적계여랑은 일본 측에 의해 이케츠히메(池津媛)라는 별명이 주어졌는데 못의 여인 혹은 못의 공주라는 뜻이다.

『백제신찬(百濟新撰)』에는 "기사년(己巳年)[3]

[4]에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레나코(阿禮奴跪)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모니부인(慕尼夫人:무니하시카시)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適稽女郞)[5]이라 하고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百濟新撰云, 己巳年蓋鹵王立. 天皇遣阿禮奴跪, 來索女郞, 百濟莊飾慕尼夫人女, 曰適稽女郞, 貢進於天皇.

- 일본서기 권 14 大泊瀨幼武天皇 雄略天皇 2년(458년) 가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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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어 독음으로 '무니 하시카시'로 읽힌다.[2] 의자왕의 왕후였던 은고부인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는데, 아이부인 진씨, 팔수부인처럼 삼국시대 백제의 왕후들이 부인으로 호칭되기도 했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며, 신라는 특히나 귀족 여성들에게도 부인이라 불렀다. 삼국시대 한반도에서는 전반적으로 그랬음을 알 수 있다. 백제도 귀족여성을 부인이라 불렀는지는 명확하진 않지만 보통 왕후보다는 귀족으로 추정한다[3] 5세기에 기사년은 429년489년이 있는데, 489년 시점에서 개로왕은 14년 전인 475년 한성 함락 때 죽었으므로 전자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4] 그러나 이 시기는 개로왕의 아버지인 비유왕(재위: 427년 ~ 455년)이 재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록상 오류가 있다.[5] 챠쿠케이에하시토라는 훈이 달려있는데 챠쿠케이는 적계를 그냥 그대로 음독한 것이고 에하시토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 훈이다. 즉 이는 '적계 에하시토'가 되는데 현대어로 바꾸면 '적계(適稽) 아가씨'란 뜻이 된다. 여기서 에하시토야 당연히 존칭이고 적계는 본명이거나 별명 혹은 존칭을 나타낸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