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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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감독상
제15회
(1943년)


제16회
(1944년)


제17회
(1945년)

윌리엄 와일러
(미니버 부인)

마이클 커티즈
(카사블랑카)

레오 맥캐리
(나의 길을 가련다)

마이클 커티즈
Michael Curtiz


파일:마이클 커티즈.jpg

본명
마노 카르테즈 카미너
Mano Kertesz Kaminer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출생
1886년 12월 24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망
1962년 4월 10 (향년 75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가족
배우자 루시 도레인 (1918~1923)
릴리 더미타 (1925~1926)
베스 메러디스 (1929~1961)
자녀 2
직업
영화 감독
활동 기간
1912년 ~ 1961년
1. 개요



1. 개요[편집]


<로빈 후드의 모험>, <카사블랑카>, <화이트 크리스마스> 등 걸작 영화들을 감독한 것으로 유명하며 당시 할리우드에서 고평가 받는 감독 중 한명이었다.

대표적인 클래식 할리우드 고용 감독으로 꼽히는 감독이다. 자기 색도 그리 강하지 않았고 만든 장르도 다양했고, 심지어 다작이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총애했던 감독이기도 했다. 대표작 대다수가 당시에도 지금도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지금까지도 언급되지만 평단에서는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알프레드 히치콕, 오슨 웰스, 레오 맥캐리, 프랭크 카프라보다는 대접이 박했던 편이다. 하지만 고용 감독으로서 실력이 대단했으며, 특히 필름 느와르에서 나름 분명한 자취를 남겼기에 여전히 잊혀지지 않고 언급되는 편.

인성과 사생활에서는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성격이 괴팍해 현장에서는 폭군이나 다름없어 같이 일했던 배우들도 흉볼 정도였고, 경기병대의 돌격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이라는 영화에서 트립와이어로 말 스턴트한답시고 125마리 말 중 25마리나 폐사시켜 당시에도 승마 애호가로 말을 아꼈던 에롤 플린과 ASPCA에게 동물 학대로 욕과 소송을 바가지로 들어 먹었다.[1] 사생활도 복잡해 도미할 당시에도 혼외자식이 있었다고 한다. 사생아 딸은 거의 의절급으로 평생 사이가 안 좋았다고. 유대인이라 홀로코스트의 간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하다. 본인은 타이밍 좋게 빠져나와 미국 정착에 성공했고 워너브라더스 사장 잭 워너의 도움으로 어머니도 빼내서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누나네 가족은 빼내는 데 실패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매형과 두 자식은 사망했다고 한다.

비록 1933년 헝가리 국적을 포기해 쭉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살아갔지만, 헝가리에서는 국민 감독급 취급을 받아 전기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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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종 이방원(드라마)/말 학대 및 죽음 사고 논란에서 1939년 이후 할리우드에서 트립와이어로 말 쓰러뜨리는 게 금기시되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에롤 플린과는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이 둘은 로빈 후드의 모험에서 당시 같이 출연한 드 하빌랜드까지 포함해 다시 작업 하면서 평생 가는 대표작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