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돈치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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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BA 이전[편집]



1.1. 레알 마드리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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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세르비아계 슬로베니아인이자 선수 출신 농구 감독이었던 사샤 돈치치와 미용실을 운영하던 슬로베니아인인 미리암 포테르빈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1] 어릴 때부터 여러가지 운동을 했는데 키가 너무 커서 농구로 선회, 7살이 되던 해에 고향에 위치한 농구팀인 유니언 올림피아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했고 그때 이미 몇 살 많은 형들과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아버지의 슬로베니아 국가대표 후배인 고란 드라기치에게 어린 시절부터 조언을 받기도 했다.

16세가 되던 해에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으며 5경기를 뛰며 평균 1.6득점을 기록했다. 2015-16 시즌에는 리그에서는 평균 12.9분을 뛰며 4.5득점, 2.6리바운드, 1.7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유로리그에서는 3.5득점, 2.3리바운드, 2.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016-17 시즌에는 리그에서 42경기(11선발)로 뛰면서 7.5득점, 4.4리바운드, 3.0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유로리그에서 7.8득점, 4.5리바운드, 4.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다. 마침내 2017-18 시즌에 포텐셜이 터져, 돈치치는 리그에서 12.5득점, 5.7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리가 ACB MVP를 수상했다. 유로리그에서는 33경기 16.0득점, 4.8리바운드, 4.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유로리그 파이널 4 MVP, 유로리그 시즌 MVP를 석권하고 NBA 진출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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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전부터 대부분의 유럽 선수들이 그렇듯 평가가 엇갈렸는데 몇몇 전문가들은 돈치치를 저평가 하는가 하면 극소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아예 1픽으로 뽑아야 한다는 등 엄청나게 고평가 했다. 주로 저평가 측의 입장은 몸이 너무 둔하고 운동 능력이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거친 NBA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봤고 고평가 측에서는 이미 스킬적으로 완성된 선수며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당장 NBA에 와도 적응 문제 없이 잘 할 것이라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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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신인 NBA 드래프트에서 애틀랜타 호크스에 1라운드 세 번째 픽으로 뽑혀 NBA 진출이 결정됐다. 그러나 소문난 유럽빠(...)인 마크 큐반이 5픽으로 뽑은 트레이 영과 2019년 1라운드 지명권을 주고 돈치치를 받아오게 된다.

더 자세한 내용을 읽고 싶다면 점프볼 편집장 손대범이 쓴 칼럼을 읽어 보도록.

그간의 공을 인정 받아 레알 마드리드 명예 클럽에 헌액되었다.#


2. NBA 경력[편집]



2.1. 댈러스 매버릭스[편집]



2.1.1. 2018-19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루카 돈치치/선수 경력/2018-19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2. 2019-20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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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2020-21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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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2021-2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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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2022-2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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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가대표[편집]


성인 대표팀으로 슬로베니아, 스페인 등이 연결됐으나 2016년에 슬로베니아를 선택했다.


3.1. FIBA 유로바스켓 2017[편집]



파일:돈치치17유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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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스몰 포워드로 낙점받은 돈치치의 슬로베니아는 4번 시드로 헬싱키에서 진행되는 A조에 포함됐다.

개막전 폴란드전에 선발 출전해 11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고란 드라기치의 30득점에 힘입어 첫 승을 따냈다.

2차전 개최국 핀란드를 상대로 선발 출전해 슈팅 난조로 8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했으나 드라기치의 맹활약으로 승리.

3차전 그리스를 상대로 그동안 부진하던 슛이 들어가며 22득점 5리바운드로 6점 차 승리에 기여했다.

4차전 약체인 아이슬란드에게 13득점 6리바운드 2스틸을 기록하고 조기 퇴근했다.

5차전 제일 강한 프랑스를 만나서 15득점 9리바운드 2스틸을 기록했고 경기 내내 프랑스를 압도하며 4번 시드에서 5전 전승으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 비교적 약체인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14득점 9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올리며 에이스인 드라기치가 부진했음에도 24점 차로 대승했다.

8강에서 라트비아를 상대로 27득점 9리바운드로 맹활약하며 팀을 4강으로 올렸다.

4강에서 유럽 최강이자 NBA 선수들이 대거 합류한 스페인을 11득점 12리바운드 8어시스트로 경기를 찢어버리며 20점 차 승리, 슬로베니아 최초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 보그단 보그다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를 상대로 3점슛이 고장나며 8득점 7리바운드로 부진했으나 드라기치의 35득점 맹활약으로 슬로베니아 첫 우승 멤버가 됐다.

9경기 29.1분 14.3득점 8.1리바운드[2] 3.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토너먼트 팀을 수상했다.


3.2. 2020 도쿄 올림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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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나스에서 진행되는 올림픽 예선 20인 예비명단에 포함됐고 매버릭스의 1라운드 탈락 후 대표팀에 합류할 것을 직접 발표했다.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에이스로서 최종 명단에 포함됐다.

첫 경기 앙골라를 상대로 13득점 6리바운드 9어시스트 5스틸을 기록하며 50점 차로 대승했다.

리투아니아의 최종 결승에서 31점 11리바 13어시스트라는 충격적인 스탯으로[3] 사상 첫 올림픽 진출을 이끌었다. 이 경기 활약은 압도적인 양민학살이었고 월드클래스 슈퍼루키의 위용을 뽐내며 다른 아름다운 경기를 펼쳤다. 올림픽 단골 리투아니아는 사보니스, 발렌슈나스라는 NBA 정상급 선수들을 가졌음에도 돈치치라는 슈퍼스타에게 제대로 농락당하며 소련에서 분리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진출 실패라는 굴욕을 맛봤다.

올림픽 본선에서 슬로베니아는 스페인 아르헨티나 일본이랑 C조에 속하게 되었다. 스페인과 아르헨티나는 FIBA 랭킹 각각 2, 4위의 메달 후보였으며 일본은 홈 코트의 이점과 NBA 리거의 가세로 전력이 급상승[4]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조 편성인 가운데 아르헨티나와 첫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파일:올림픽첫경기돈치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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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아르헨티나 수비진을 유린한 끝에 48득점[5] 11리바운드 5어시스트라는 충격적인 스탯으로 118-100으로 대승을 하여 슬로베니아의 올림픽 첫 승을 이끌었다.이것이 진짜 NBA 스타

이어 일본전에서는 3쿼터 중반에 파울트러블로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25분을 뛰며 25득점 7리바운드 7어시스트의 스탯으로 116-81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슬로베니아의 토너먼트 8강행을 확정지었다.[6]

조 1위가 걸린 스페인전에는 1쿼터에 파울 3개를 적립하면서 파울트러블에 걸렸고 슬로베니아는 스페인의 수비와 3점포에 고전하면서 끌려 다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돈치치는 자신한테 더블팀 수비를 몰리는 것을 이용해 다른 선수들에게 오픈 찬스를 많이 만들어내는 게임을 가져 갔으며 찬차르와 마이크 토비 같은 동료들의 활약에 힘입어서 4쿼터 막판에 역전을 이뤄냈다. 결국 95-87로 승리를 거두고 슬로베니아는 조 1위를 차지했다. 이날 돈치치는 12득점 14리바운드 9어시스트의 스탯을 기록했고, 올림픽 남자 농구 역사상 3번째 트리플더블 달성까지는 아깝게 어시스트 1개가 모자랐다. 어쨌든 조 1위를 차지한 덕분에 8강에서 미국을 피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더 수월한 독일을 만나게 되었고 반면 스페인은 미국을 만나게 되었다.

8강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야투율 80% 20득점 11어시스트 8리바운드라는 트리플더블급 활약을 선보이면서 슬로베니아의 24점차 완승을 이끌고 4강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4강전 상대는 에반 포니에루디 고베어가 버티는 프랑스이다. 이번 대회 8강 종료 시점 기준으로 4경기에서 평균 26.3점(1위) 10.8리바운드(2위) 8.8어시스트(2위), 1.3블록(2위)을 기록하고 있는데, 트리플더블에 가깝다. 그리고 슬로베니아 남자농구 대표팀은 루카 돈치치가 국가대표로 출전한 경기에서 17승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준결승 프랑스전에서는 16득점 10리바운드 1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림픽 남자농구 역사상 3번째 트리플더블 달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에이스인 돈치치가 클러치 때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팀은 89-90으로 패하며 아쉽게도 조국을 결승으로 이끌지 못하였다. 그렇게 루카 돈치치의 성인 국가대표 합류 이후 A매치 17연승 무패 행진을 달리던 슬로베니아도 연승 행진이 종료되었다.

이어진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호주를 상대했고 3점슛 3개 포함 22점 8리바운드 7어시스트 1스틸 8턴오버를 기록했으나, 107-93으로 패배하면서 최종 4위로 대회를 마감하게 되었다.

비록 목표로 했던 메달 획득은 무산되었지만 대회 종료 후 올스타5에 선정되었다. 대회 평균 23.8점 9.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위를 떨쳤다.


3.3. FIBA 유로바스켓 2022[편집]



파일:돈치치22유로.jpg


조별리그 1차전 리투아니아전에서 14득점 6리바운드 10어시스트 3스틸로 슬로베니아의 승리를 이끌었다.

조별리그 2차전 헝가리 상대로도 20점 7리바운드 7어시스트로 맹활약했다. 놀라운 점은 돈치치가 단 19분 만을 뛰고 이런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돈치치의 위력을 앞세운 슬로베니아는 3쿼터에 일찌감치 가비지 타임을 만들어내며 15점차 완승을 거둘 수 있었다.

조별리그 3차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전에서는 16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4스틸을 기록하며 트리플더블급 활약을 펼쳤지만, 3점슛 시도 8개 모두 실패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조별리그 4차전 독일을 상대로는 36점 10리바운드 4어시스트의 맹활약을 펼치면서 88-80 승리를 이끌었다.

"돈치치 수준의 선수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머지 않아 MVP를 수상하게 될 것이다."

매직 존슨


"보통 대부분의 선수들이 처음 리그에 들어올 때는 덜 다듬어진 원석과도 같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과 노력이 쌓이면서 다음 단계로 발전해나간다. 하지만 돈치치는 다르다. 그는 처음 NBA에 입성했을 때부터 게임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이미 30대 베테랑 선수처럼 플레이했다. 그의 BQ는 어나더레벨 수준이다."

디르크 노비츠키


조별리그 5차전 프랑스전에서 무려 47점을 넣으며 팀 득점 88점 중 절반이 넘는 득점을 책임지는 엄청난 하드캐리를 보여줬다. 돈치치가 득점한 47득점은 유로바스켓 단일 경기 최다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7] 이 날 돈치치의 스탯은 47득점 7리바운드 5어시스트 3점슛 6개 자유투 성공률 91.7%(11/12)이다. 팀은 88-82 승리를 따내며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조별리그에서 평균 26.6점 7.6리바운드 6.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16강 벨기에전에서는 35분 41초를 소화하며 3점슛 4개 포함 35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 4스틸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이어가며 88-72 승리를 이끌었다. 3쿼터까지 3점차 접전이었으나, 팀원들이 4쿼터에 분발하며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요키치, 아데토쿤보 두 명의 MVP들이 16강, 8강에서 충격패를 당해 탈락하며 NBA 슈퍼스타 중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돈치치의 슬로베니아 또한 8강에서 폴란드에게 90:87로 패배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돈치치는 15득점, 11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4. 2023 FIBA 농구 월드컵 필리핀-일본-인도네시아[편집]


1 2차전 모두 30득점이 넘는 맹활약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강호 호주도 잡아내면서 8강에 진출했지만 심판과 트러블을 일으키며 퇴장당하면서 8강에서 마무리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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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은 2008년에 이혼하면서 돈치치는 엄마 손에 길러졌다.[2] 대회 4위[3] FIBA룰이기 때문에 40분 경기다. 40분 경기에서 NBA에서나 볼만한 충격적인 스탯을 찍은것.[4] 올림픽 직전에 펼쳐진 FIBA 랭킹 7위인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81-75로 승리를 거두었다.[5] 올림픽 단일 득점 역대 2위. 1위는 브라질 출신의 FIBA 명예의 전당 헌액자 오스카 슈밋의 1988 서울 올림픽에서의 55득점[6] 같은 날 스페인이 아르헨티나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7] 1위는 벨기에의 에디 테라스가 1957년 7월 1일 알바니아를 상대로 기록한 63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