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제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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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지에로 1세.jpg
Ruggero I
가문
오트빌 가문
생몰년도
1031년경 ~ 1101년 6월 22일
출생지
노르망디 공국
사망지
시칠리아 백국 밀레토
매장지
시칠리아 백국 밀레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재위
기간
시칠리아 백작
1072년 – 1101년
아버지
오트빌의 탕크레드
어머니
프레센다
친형제
로베르 기스카르, 마우게르, 기욤, 알베리크, 웅프루아, 탕크레드, 프레센다
이복형제
셀로 1세, 베아트릭스, 고프레도, 무쇠 팔 기욤, 드로고, 웅프루아
배우자
데브뢰의 유디트(첫번째 아내), 모르탱의 에렘부르가(두번째 아내),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세번째 아내)
자녀
마우게르, 펠리키아, 시모네, 루지에로 2세, 조르다노(사생아), 고프레도(사생아) 등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오트빌 가문의 일원이자 시칠리아 백작. 노르만족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시칠리아, 몰타를 정복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이 탄생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2. 생애[편집]


1031년경 오트빌 가문의 가주인 탕크레드와 두번째 아내 프레센다의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탕크레드는 노르망디 공국의 코탕텡 반도를 영지로 다스렸으며, 첫번째 아내 무리엘라로부터 셀로 1세, 베아트릭스, 고프레도, 무쇠 팔 기욤, 드로고, 웅프루아 등 5남 1녀를, 두번째 아내 프레센다로부터 로베르 기스카르, 마우게르, 기욤, 알베리크, 웅프루아, 탕크레드, 프레센다, 루지에로 1세 등 7남 1녀를 낳았다.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상속받지 못한 형제들이 살 길을 찾기 위해 해외로 떠나는 동안,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렀다.

26세 때인 1057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형제들이 자리를 잡은 남부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아풀리아 백작에 막 취임한 형 로베르 기스카르의 부관이 되었고, 형의 칼라브리아 원정에 동행해 60명의 기사와 함께 산봉우리 중 하나를 점거한 뒤 니스포로(Niceforo) 산채를 지었다.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주변 지역을 수시로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역사가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그는 이 기간 동안 인근을 지나가는 상인이나 순례자들을 상대로 강도처럼 굴었다고 한다.

그 후 로베르가 아풀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돌아갔다. 그는 한동안 칼라브리아에 남아서 약탈을 이어가 상당한 전리품을 모았다. 이후 로베르에게 가져가서 군자금에 쓰게 해 반란 진압에 공헌했다. 이후 레지오 공방전을 벌이던 로베르는 루지에로에게 그라체 주변 일대를 약탈하게 했다. 루지에로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뒤 대부분의 전리품을 로베르에게 바쳤다. 레지오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고 칼라브리아 북부로 철수한 뒤, 루지에로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급하기 어려워지자 로베르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 동안 전리품을 충실히 바쳐왔건만 이런 식으로 나오는 형에게 화가 난 루지에로는 60명의 기사와 함께 또다른 형제인 기욤에게 귀순했다.

1058년 초, 루지에로는 기욤으로부터 칼라브리아에 있는 스칼레아 성을 봉토로 받았다. 그는 그곳을 기반으로 로베르의 칼라브리아 영지를 끊임없이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로베르는 스칼레아를 공략하려 했지만, 공성전을 벌일 여력이 되지 않아 후퇴했다. 그 후 루지에로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인근 지역의 농촌을 약탈하고 순례자들과 상인 행렬을 습격했다.

가뜩이나 흉년으로 인한 기근에 시달리던 칼라브리아 주민들은 노르만족의 이같은 행태에 반감을 품었다. 그러다 니카스트로 시에서 현지인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그곳에 주둔한 노르만 수비대를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칼라브리아 주민들은 대거 봉기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루지에로에게 니스포로와 스칼레아 사이의 칼라브리아 영토 절반을 봉토로 내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루지에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반란 진압을 도왔다. 그러나 로베르는 약속을 당장 이행하지 않았다.

1059년,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동로마 제국이 소유했던 칼라브리아의 도시인 로사노와 그라체를 공동으로 공략했다. 1059~1060년 겨울, 루지에로는 칼리브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레지오 시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대거 활용해 맹공을 펼쳤지만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으로 조기 함락에 실패했다. 1060년 봄 아풀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기스카르가 동생과 합류해 공세를 펼쳤다. 결국 그해 여름 레지오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칼라브리아는 노르만족의 손에 넘어갔고,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비로소 칼라브리아를 나눠가졌다. 루지에로는 밀레토를 새 본거지로 삼고 그곳에서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다.

1061년 2월, 카타니아와 시라쿠사의 에미르 이븐 알 툼나가 엔나의 통치자 이븐 알 하바스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 자칫하면 자기 영토를 잃게 생기자, 그는 칼라브리아의 밀레토(Mileto)에 머물고 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해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안 그래도 풍요로운 시칠리아를 공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로베르에게는 이보다 좋은 명분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과 현지인들의 반란에 대처해야 했기에, 동생 루지에로에게 시칠리아 공략을 맡겼다.(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루지에로는 160명의 기사단과 이븐 알 툼나가 이끄는 아랍군과 함께 메시나 북쪽의 파로 항 인근에 상륙하여 시칠리아의 북쪽 해안을 따라 이동해 내륙으로 진출했다. 그는 로메타와 밀라초를 습격해 상당한 전리품을 확보한 뒤 파로 항으로 돌아와서 전리품을 배에 실었다. 메시나의 아랍 수비대는 화물을 배로 옮기느라 분주하던 노르만인들을 기습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현장에 이르렀을 때, 마침 악천후 때문에 적재가 중단되어서 모든 노르만인이 해안에 있었다. 루지에로 1세는 즉각 아랍군의 정면으로 돌진했고, 그의 조카 셀로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측면을 요격했다. 아랍인들은 이내 크게 패했고, 메시나로 도주하다가 상당수가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승리에 고무된 루지에로는 다음날 아침 메시나 공성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메시나 주민들이 완고하게 저항하면서 쉽사리 함락되지 않자, 이븐 알 하바스가 파견한 아랍군이 도착할 것을 걱정한 루지에로는 퇴각을 명령했다. 하지만 폭풍이 닥치는 바람에 항해가 불가능했고, 그는 사흘 동안 해안에서 아랍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그러다가 폭풍이 잠잠해지자 신속히 배를 타고 칼라브리아로 출항했지만, 메시나 해협에서 아랍 함대의 요격을 받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레지오 항구에 가까스로 상륙한 루지에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주셨다"라며 모든 전리품을 레지오 교회 건설에 기부했다.

1061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원군을 이끌고 레지오에 도착했다. 로베르와 루지에로 형제는 2천 가량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시칠리아에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2번째 원정을 감행했다. 로베르가 메시나 북쪽 해안에 상륙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적 함대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이, 루지에로는 500 기사들을 이끌고 새벽 무렵 메시나 남쪽 해안에 기습 상륙했다. 당시 이븐 알 하바스는 메시나 북쪽 해안에 전군을 집결시켰기 때문에, 메시나는 텅 비어 있었다. 루지에로는 즉시 메시나에 입성하여 깃발을 꽂았다. 날이 밝자 메시나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바스는 섬 깊숙이 철수했고, 메시나 해협을 감시하던 아랍 함대 역시 팔레르모로 철수했다.

뒤이어 1,500 병사들을 이끌고 메시나에 도착한 로베르는 아랍인들을 도시에서 추방하고 오직 기독교도들만 그곳에 있게 한 뒤 도시를 요새화하고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 후 이븐 알 툼나를 앞세워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군해 로메타와 파자노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점령했다. 기독교도들은 노르만인들을 해방자로 여기고 성대하게 환영했고, 현지 아랍인들 역시 자신들의 주군인 이븐 알 툼나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왔다고 여기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만인들이 메시나와 로메타에 수비대를 배치하면서, 가용 가능한 전력은 700명으로 줄어들었다. 엔나 지방의 센투리페에서 처음 저항에 직면했을 때, 이 정도 병력으로는 도시를 함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베르는 공성전을 포기하는 대신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고 아랍인들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시장에 팔았다.

그러던 중 이븐 알 하바스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인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선제 공격을 하기로 하고, 하바스의 본거지인 엔나를 향해 진격했다. 하바스는 엔나에서 수성전에 임하려 했지만, 적군이 엔나 주변 지역을 닷새간 약탈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밖으로 출진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노르만군은 700명인데 비해 아랍군은 1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무장한 노르만 기사들은 가볍게 무장한 아랍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투력을 선보였고, 아랍군은 반나절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참패해 엔나로 도주했다.[1] 하지만 엔나 공략은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다.

이윽고 겨울이 다가오자,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메시나로 철수한 뒤 지금까지 정복한 영토 중 로메타 등 시칠리아 북동부 지역을 직접 관할하면서, 나머지 영토는 동맹인 이븐 알 툼나에게 맡겼다. 로베르가 이탈리아 본토로 떠난 뒤, 메시나에 남은 루지에로는 1061년 12월 다시 아랍인들을 습격하여 아그리젠토까지 진출했다가 귀환하던 중 트로이나 주민들의 귀순을 받아들여 그곳에 수비대를 남긴 뒤 메시나로 이동했다. 이후 칼라브리아로 가서 칼라브리아에 남겨둔 약혼자 데브뢰의 유디트와 재회해 1062년 초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후 이븐 알 툼나와 함께 페탈리아를 공략해 시칠리아 내 영토를 굳건히 한 후 칼라브리아로 돌아온 루지에로는 로베르에게 칼라브리아를 자신의 영지로 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와 갈라설 수 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로베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루지에로가 머물고 있던 밀레토를 습격했다. 루지에로가 그라체(Gerace)로 도주하자, 그라체 주민들은 그를 숨겨줬다. 하지만 그라체의 유지였던 바실리가 로베르에게 루지에로의 망명 소식을 전했다. 이에 로베르는 한 밤중에 그라체에 잠입해 바실리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도중에 정보가 새면서 로베르가 그라체에 잠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주민들은 바실리의 집에 쳐들어가서 바실리를 잡아 죽였다. 로베르가 집 문을 걸어잠그고 대항하자, 그들은 집을 봉쇄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뒤늦게 주군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된 로베르의 군대는 루지에로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루지에로는 그라체의 장로들을 만나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로베르는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범죄했으니 그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이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봉쇄를 풀자, 루지에로는 집안에 들어가서 로베르와 대면했다. 두 사람은 오랜 이별 끝에 재회한 형제 마냥 서로를 끌어안고 화해했다. 이후 그들은 칼라브리아를 동등하게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렇듯 로베르와 루지에로가 한바탕 갈등을 벌이다가 화해했을 때, 시칠리아에서 노르만인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이븐 알 툼나가 적의 습격으로 살해당하고 트로이나와 페탈레아의 노르만 수비대가 메시나로 철수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지에로는 즉시 시칠리아로 돌아가서 트로이나를 다시 점령한 뒤 그곳에 새 수비대와 아내 유디트를 남겨두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니코시아로 향했다. 그러나 처음에 노르만인들을 해방자로 여기고 환대했던 트로이나의 그리스 주민들은 노르만인들이 약탈을 일삼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루지에로가 떠난 사이에 노르만인들을 쓸어버리고 유디트를 인질로 삼기로 마음먹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유디트는 노르만 수비대를 소집한 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저항했고, 루지에로는 즉각 트로이나로 돌아와서 아내를 구했다.

트로이나 주민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인근 마을의 아랍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루지에로는 사방에서 아랍인들이 몰려오자 아내와 수비대를 이끌고 도시 성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훨씬 더 많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했다. 그리스인과 아랍인들은 성채를 포위하고 4개월 동안 공격했고, 노르만인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타고 다니던 모든 말을 잡아먹어야 했다. 게다가 따뜻한 옷도, 장작도, 담요도 없었기에, 겨울이 닥치자 얼어죽는 병사가 많았다. 이러다가는 모두가 죽겠다고 판단한 루지에로는 야간 기습을 감행했다. 포도주를 마시며 경계를 게을리하던 아랍인들은 노르만인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모조리 제압되었다. 다음날 아침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한 노르만인들은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그 후 루지에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칼라브리아로 가서 새 군마를 모았고, 유디트는 트로이나의 수비대를 통솔했다. 그녀는 밤에도 요새를 순회하고 병사들의 기강을 몸소 점검해 주민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여지를 주지 않았다.

1063년 루지에로가 군마를 구해 시칠리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곧 심각한 난관에 부딪쳤다. 노르만인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압둘라 이븐 하우칼과 이븐 알 하바스는 힘을 합치기로 했고, 명목상 주군으로 섬기던 지리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지리 왕조 술탄 티민은 아들 아이유브와 알리 왕자가 이끄는 두 군대를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각각 팔레르모와 아그리젠토에 상륙한 아이유브와 알리의 군대는 시칠리아 토후들의 병력과 합세한 뒤 노르만군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루지에로와 조카 셀로는 136명의 기사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에 비례하는 보병을 더하면 대략 500~600명 가량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출진한 아랍군은 기병만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아랍군의 전력이 적어도 4대 1로 우세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양측은 1063년 6월 체라미(Cerami) 마을 인근을 흐르는 강 양쪽의 언덕 꼭대기에 진을 치고 사흘간 대치했다. 그러다가 적군이 진영을 걷고 철수하자, 루지에로는 약 13km 떨어진 트로이나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노르만군이 떠나자, 지리 왕조군은 철수한 지 4일만에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뒤 강을 재빨리 건너 체라미 마을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지에로는 전군에 체라미로 행진하라고 명령했다. 노르만군이 절반 정도를 이동했을 때, 아랍군이 이미 강을 건너 체라미 마을에 대한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체라미가 이대로 함락된다면, 트로이나가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메시나와 트로이나 간의 연락로가 차단당할 위험이 컸다.

이에 루지에로는 조카 셀로에게 36명의 기사와 함께 체라미로 앞서 가라고 명령했다. 셀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3,000명의 기병과 다수의 보병대가 마을을 에워싼 채 숙영지를 세운 광경이 눈에 띄었다. 그는 적군이 인근에 노르만군이 온 줄 모르고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들의 진영을 즉시 공격했다. 셀로가 격노한 사자처럼 진영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자, 아랍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도주했다.

그 후 나머지 군대와 함께 체라미에 도착한 루지에로는 이곳에 남아서 농성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당시 루지에로의 부관이자 훗날 동로마 제국의 용병대장을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될 루셀 드 바이욀이 "적을 쫓지 않고 여기서 겁쟁이처럼 숨어 버린다면 더 이상 당신을 돕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다른 노르만인들 마저 동조하자, 전군을 이끌고 아랍군과 정면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노르만군은 셀로, 루셀 등이 이끄는 선봉대와 루지에로가 직접 지휘하는 후위대로 나뉜 채 출진했다. 한편 아랍군 역시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자 진영에서 출진해 3개 사단으로 이뤄진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접근했을 때, 팔레르모 콰이드(Qaid)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가 이끄는 지리군 선두 부대가 노르만군의 위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선점한 뒤, 셀로의 선봉대를 우회하여 루지에로가 이끄는 노르만 후위대를 급습했다. 루지에로는 즉각 행군을 멈추고 전군에 방향을 틀어 아랍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한 뒤 말을 몰아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라테라에 따르면, 성 게오르기우스가 돌연 출현해 노르만인들보다 앞서 말을 타고 아랍군의 대열이 가장 밀집한 곳에서 아랍인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루지에로의 창 끝에 성자의 깃발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노르만인들이 앞장서서 돌격하는 주군의 뒤를 따라 용맹하게 돌진한 것만은 분명하다.

루지에로는 적진 깊숙이 침투해 아르카디우스를 사살했다. 그러나 아랍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활용해 루지에로와 부하들을 에워쌌다. 노르만인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아랍군은 그들을 포위섬멸하고자 역공을 가했다. 이렇듯 양측이 격투를 벌이고 있을 때, 셀로의 선봉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지리군의 양 측면을 요격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주군이 전사한 데다 노르만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시달렸던 아랍인들은 사기가 꺾여 팔레르모로 달아났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다른 지리군 2개 사단은 전우들이 패주하자 공포에 질려 도주했다. 노르만인들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한 뒤 텅 비어버린 적 진영을 점령했다. 이후 세라미 주빈 지역에서 낙오병들을 사냥하다가 전리품을 싣고 트로이나로 귀환했다.

루지에로는 체라미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시칠리아 북동부의 지배를 확고하게 굳혔지만, 병력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영토 확장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064년 로베르가 시칠리아에 상륙해 동생과 합세하면서 전력이 증강되었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가모 시를 공략한 뒤 팔레르모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팔레르모가 해상 수송 덕분에 굳건히 버티자, 해군이 없어서 항구를 봉쇄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팔레르모 공략은 요원하다고 판단해 메시나로 철수했다. 이후 아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로베르는 시칠리아 문제를 동생에게 일임하고 섬을 떠났다.

루지에로는 1064년부터 1068년까지 아랍인들의 영역에 기병대를 파견해 약탈을 자행했지만, 형이 이탈리아 본토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이 이상의 공세를 벌이지 않고 성을 새로 건조하는 등 지배 영역의 방위를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칠리아의 아랍 세력은 적이 소극적으로 나오는 상황을 이용하기는 커녕 심각한 내분에 휩쓸렸다. 지리 왕조의 간섭이 심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븐 알 하바스가 주민들을 선동해 지리 왕조의 왕자 알리, 아이유브를 공격한 것이다. 이 내전은 1067년이 되어서야 이븐 알 하와스가 패사하고 아이유브가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이유브는 시칠리아 토후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뒤 1068년 미실메리(Misilmeri) 시 인근에서 약탈하던 루지에로의 노르만군을 요격했다. 루지에로의 노르만군은 이번에도 수적으로 훨씬 열세했지만,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해 아랍군을 압도했다. 아이유브와 추종자들은 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시칠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고 튀니지로 도주했다. 그 후 시칠리아의 아랍인들은 자기들을 이끌어줄 지도자 없이 노르만인들의 침략에 개별적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하지만 루지에로 역시 정복 전쟁을 신속하게 완료하거나 점령지를 통제하기에 충분한 인력이 없었다. 게다가 형 로베르로부터 바리 공성전을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그곳으로 가야 했기에, 시칠리아 정복 전쟁은 바리가 함락되는 1071년까지 미뤄졌다.

1071년 4월 바리를 함락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루지에로와 함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재개했다. 노르만군은 카타니아를 공략한 뒤 1071년 8월 팔레르모를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했다. 팔레르모 항구에 있던 아랍 함대는 해상 봉쇄를 돌파하려 했지만 하루 종일 이어진 해전에서 패퇴했다. 이후 수비대와 주민들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린 끝에 1072년 1월 노르만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시칠리아 토후국이 다스린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였던 팔레르모가 노르만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1072년 1월 6일 팔레르모에 입성한 뒤 팔레르모 내 모스크들을 교회로 개조했다.

그 후 루지에로는 형 로베르에 의해 시칠리아 백작에 선임되었고, 형이 이탈리아 본토의 지배를 굳히는 동안 자신은 시칠리아 원정을 꾸준히 이어갔다. 다만 대규모 원정을 벌이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영지에 소규모 부대를 파견해 약탈을 벌이는 방식을 추구했고, 그렇게 약탈을 해서 모은 자금을 토대로 용병들을 고용한 뒤 성채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1075년 튀니지의 해적들이 마차르(Matzar)에 상륙하여 포위 공격을 가하자, 루지에로는 야밤에 요새에 잠입한 뒤 날이 밝자마자 해적들을 습격해 모조리 몰살했다.

1077년,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서쪽에 남아있는 2개의 사라센 요새 중 하나인 트라파니를 포위 공격했다. 그의 사생아 조르다노는 야밤에 100명의 기사와 함께 초원에 풀어놓은 양떼를 지키고 있던 수비대를 습격해 모조리 몰아내고 가축들을 탈취했다. 이로 인해 식량을 공급할 길이 막막해지자, 트라파니는 곧 항복했다. 1078년, 루지에로는 타오르미나 시를 포위한 뒤 인근에 도시의 연락망을 차단하는 22개의 요새를 건설한 후 아랍 함대가 타오르미나 만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해상 봉쇄를 실시했다. 지원군이 올 가망이 없자, 타오르미나의 에미르는 루지에로에게 항복했고 에트나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이렇듯 시칠리아의 아랍 세력은 서서히 쇠락했지만, 마냥 힘없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말라테라에 따르면, 베나르베트라는 인물이 시라쿠사의 에미르로서 저항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 이름의 실제 이름은 이븐 알 와르디(Ibn al-Wardi)일 가능성이 있지만, 아랍 자료에 명시되지 않아서 불확실하다. 1081년, 베나르베트는 루지에로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한 발칸 원정을 감행한 로베르를 돕기 위해 떠난 틈을 타 카타니아를 공격해 그곳의 유지의 호응에 힘입어 손쉽게 공략했다. 그러나 조르다노와 2명의 사령관 로베르 드 수르빌, 엘리아스 카르토멘시스의 반격으로 카타니아에서 축출되었다.

루지에로는 형 로베르의 발칸 원정에 참여해 디라히온 공방전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1083년 4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캄파니아에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사주를 받은 귀족과 주민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서둘러 귀국해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기스카르는 할 수 없이 아들 보에몽에게 원정군 지휘를 맡긴 뒤 동생 루지에로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 반란을 평정하고, 산탄젤로 성에서 외롭게 농성하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했다. 그러던 중 사생아 조르다노가 루지에로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 몇 명과 함게 1083년 여름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루지에로는 시칠리아로 돌아와서 반란을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실명시키라고 명령했다. 다만 조르다노만은 실명당하기 직전에 용서받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고, 이후로는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충성을 바쳤다.

1085년, 베나르베트가 이끄는 함대는 칼라브리아의 도시 니코테라를 공격해 그곳의 수도원을 파괴하고 수녀들을 생포했다. 루이제로는 이에 보복하고자 함대를 이끌고 시라쿠사 해상을 봉쇄했고, 조르다노는 육상에서 포위했다. 베나르베트는 해상 봉쇄를 풀기 위해 출격했고, 두 함대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베나르베트가 루지에로의 선박에 올라타서 적장을 죽이려 했지만, 노르만 기사들의 반격으로 중상을 입은 뒤 물 속에 떨어져 익사했다. 아랍 함대는 지휘관을 잃자 패주했고, 시라쿠사는 1085년 9월 4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노르만군에 항복했다.

그러던 중 발칸 원정을 재개하려던 로베르 기스카르가 1085년 7월 17일 병사했고 로베르와 시켈가이타의 아들인 루지에로 보르사가 아풀리아 공국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배다른 형인 보에몽 1세가 이에 반감을 품고 내전을 일으켰다. 루지에로는 두 조카의 전쟁을 지켜보다가 1085년 9월 루지에로 보르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기스카르와 공동으로 소유했던 모든 칼라브리아 성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보에몽과 루지에로 보에사 간의 갈등을 중재해 보에몽이 루지에로 보르사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타란토, 올리아, 오트란토 등 솔렌티나 반도를 다스리는 '타란토 공국'의 공작이 되게 했다.

1086년, 루지에로는 엔나 토후국 소유의 아그리젠토를 공략하고 엔나의 에미르인 이븐 하무드의 아내와 자식들을 생포했다. 1087년 초, 루지에로는 엔나 성벽에 도착한 뒤 이븐 하무드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이븐 하무드는 그럴 의사가 있지만 무슬림들의 보복이 두렵다고 밝혔다. 이에 루지에로는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과 맞서는 모양새를 보이다가 군대를 탈영해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권했고, 이븐 하무드는 그 말에 따랐다. 에미르가 그렇게 투항해버리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아랍군 역시 항복했다. 이븐 하무드와 그의 가족은 세례를 받은 후 칼라브리아에서 영지를 수여받았다.

1087년 루지에로 보르사와 보에몽간의 전쟁이 재발했다. 보에몽이 루지에로 보르사를 따르던 코센차 시를 공략하자, 루지에로 보르사는 삼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루지에로는 즉시 출진하여 코센차에서 보에몽을 몰아낸 뒤 두 사람을 중재했다. 그 결과, 루지에로 보르사는 코센차를 보에몽에게 내주는 대신 바리를 받았고, 그는 아풀리아 공국을 도운 대가로 팔레르모와 메시나의 공동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루지에로는 아랍인들이 여전히 다스리고 있던 시칠리아 남부 지역으로 공세를 펼쳐 1088년 부테라를 공략했고, 1090년 2월 노토를 복종시켰다. 1091년 몰타에서 활동하던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치고 몰타의 주요 도시인 므디나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와 몰타 전역이 노르만인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여기에 1098년 카푸아의 어린 조카 리카르도 2세가 카푸아를 되찾게 해주는 대가로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했다. 그는 이렇듯 시칠리아 정복을 주도하는 한편 형제와 조카들간의 갈등을 중재한 대가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남부 이탈리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루지에로는 시칠리아를 정복한 뒤 서유럽 기사와 라틴 성직자들을 섬에 재정착하도록 권장했지만, 대다수 인구가 무슬림과 그리스인이고 노르만족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시칠리아를 자신의 통치하에 유지하기 위해 국가적 및 종교적 관용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아랍어, 그리스어 및 라틴어는 공용어로 쓰였고, 기존의 법률은 효력을 유지했다. 자신에게 복종한 에미르와 콰이드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영지를 수여받았으며, 무슬림 병사들은 루지에로의 군대에 소속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다. 루지에로와 그의 후계자들의 지도하에, 무슬림들은 시칠리아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세금 및 관세 징수 역시 무슬림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루지에로는 다섯 개의 새로운 가톨릭 교구를 시칠리아에 세웠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시칠리아 무슬림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다. 본래 교회였다가 모스크로 개조된 건물들은 교회로 복원되었지만, 새로 지어진 모스크들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스인들 역시 정교회를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루지에로는 발데모네 일대에 12개 이상의 정교회 수도원을 건설하는 것을 후원했다. 이러한 조치에 만족한 아랍인과 그리스인들은 노르만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전란으로 쇠락했던 시칠리아는 빠르게 회복했다. 시칠리아 아랍인과 그리스인들은 프리드리히 2세 시대까지 국정에 상당한 영향력과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정복에 기여한 노르만 귀족들에게 영지를 골고루 나눠주면서도, 그들이 대규모 영지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감독했다. 여기에 자신의 가신들이 또다른 가신을 두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 내분의 여지를 없애려 노력했다. 그 결과, 가신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던 형 로베르와는 달리, 그는 가신들의 대규모 반란에 시달리지 않았다.

루지에로는 1101년 6월 22일 밀레토에서 사망하여 밀레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시모네가 백작위에 오르지만 얼마 안가 사망하고, 또다른 아들 루지에로 2세가 뒤이어 시칠리아 백작에 취임했다. 루지에로 2세는 1130년 왕을 칭하며 시칠리아 왕국의 건국을 전 유럽에 선포했다.


3. 가족 관계[편집]


  • 첫 번째 아내: 데브뢰의 유디트(1062년 결혼/1076년 사별)
    • 성명 미상의 딸: 위그 드 야제와 결혼.
    • 마틸다(1062 ~ 1094년 이전): 에우 백작 로베르, 툴루즈 공작 레몽 4세와 결혼
    • 아델리사(? ~ 1096년): 산탄젤로 백작 앙리와 결혼.
    • 엠마(? ~ 1120년): 필리프 1세와 잠시 약혼, 이후 오베르뉴 공작 기욤 6세와 결혼했고, 기욤 6세 사후 몬테스카글리오소의 로돌프와 재혼함.
  • 모르탱의 에렘부르가(1077년 결혼/1089년경 사별)
    • 마우게르: 트로이나 백작
    • 마틸다: 알리페의 라눌프 2세와 결혼.
    • 무리엘: 조스베르 데 루시와 결혼.
    • 콩스탕스: 요절.
    • 펠리시아: 헝가리 왕국의 국왕 칼만과 결혼.
    • 비올란테: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아들 로베르와 결혼.
    • 플란디나: 엔리코 델 바스토와 결혼.
    • 유디트: 로베르 1세 드 바순빌라와 결혼. 훗날 시아카에 클뤼니 수도원을 세움.
  •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3]
    • 시모네
    • 루지에로 2세
    • 막시밀라: 독일왕 콘라트[2]와 결혼.

  • 사생아: 조르다노, 고프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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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라테라에 따르면, 이날 아랍군의 사상자는 10,000명에 달한 반면 노르만인은 한, 두 명이 부상당한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2] 하인리히 4세의 장남.[3] 루지에로 1세의 사위인 엔리코 델 바스토의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