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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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영어: Norman conquest of Sicily

시기
1061년 ~ 1091년
장소
시칠리아, 몰타
원인
시칠리아 토후국의 내분을 틈타 비옥한 시칠리아를 공략하려는 로베르 기스카르루지에로 1세 형제의 공세
교전국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노르만
시칠리아 토후국
지리 왕조
지휘관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로베르 기스카르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루지에로 1세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데브뢰의 유디트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셀로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루셀 드 바이욀
파일:로베르 기스카르.png 조르다노
이븐 알 툼나†
압둘라 이븐 하우칼
이븐 알 하바스†
알리 왕자
아이유브 왕자
베나르베트†
←이븐 하무드
결과
노르만족시칠리아, 몰타 정복.
영향
시칠리아 왕국의 탄생.

1. 개요
2. 배경
3. 경과



1. 개요[편집]




1061년 ~ 1091년, 로베르 기스카르루지에로 1세가 이끄는 노르만족시칠리아 토후국 치하에 있던 시칠리아몰타를 정복한 전쟁. 시칠리아 왕국이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가 된 전쟁이다.


2. 배경[편집]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이래, 시칠리아아랍인들이 건설한 시칠리아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다. 시칠리아 토후국은 지중해 해안 지역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러면서도 지중해 해상 무역을 주관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고, 이를 발판삼아 이슬람 문화를 시칠리아에서 꽃피웠다. 그러나 아랍인과 베르베르간의 인종 갈등으로 인한 숱한 내전, 종교적으로 불이익을 주고 개종 후에도 막대한 지즈야를 부과하는 정책에 반감을 품은 기독교인들의 연이은 반란, 파티마 왕조지리 왕조의 시칠리아 진출로 인한 혼란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시칠리아 토후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4세는 이 상황을 틈타 무슬림에게 빼앗긴 시칠리아 속주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1038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중심으로 하는 원정군을 시칠리아에 파견헀다.(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 동로마군은 마니아케스의 탁월한 지휘 아래 2년간 시라쿠사 등 시칠리아 동부 일대를 단숨에 석권했다. 그러나 마니아케스가 미하일 4세의 매제였던 스테파노스를 심하게 모욕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스테파노스가 마니아케스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마니아케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후 스테파노스가 새 사령관에 올랐지만 변변찮은 지휘력을 보이다가 얼마 안가 사망했다.[1] 환관 바실리오스가 뒤를 이었지만 역시 변변치 않았고, 원정군은 힘을 잃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04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 용병대가 베네벤토 공자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한 뒤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를 생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시칠리아에 투입되었던 원정군 일부가 그쪽으로 긴급히 투입되면서 원정군의 전력은 한층 더 약화되었다. 아랍군은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동로마군을 밀어붙였고, 1041년에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이 도로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갔다. 최후의 전초기지였던 메시나 역시 1042년에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원정은 허망하게 실패했고, 동로마 제국은 두 번 다시 시칠리아에 손 대지 못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토후국은 시칠리아의 패권을 되찾았지만, 이후에도 아랍인과 비 아랍인간의 극심한 내분을 수습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세 개의 주로 나뉘었다. 팔레르모, 트라파니, 마자라 등 시칠리아 북서부는 압둘라 이븐 하우칼이 다스렸고, 카타니아, 시라쿠사 등은 이븐 알 툼나가 다스렸으며, 엔나 등 시칠리아의 중심부는 이븐 알 하바스가 다스렸다. 이들은 상대방을 꺾고 섬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런 혼란상에 지친 주민들은 누군가 시칠리아에 와서 저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주기를 소망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시칠리아 원정에 가담했던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온난한 기후와 풍요로운 물산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장차 시칠리아를 공략할 야심을 품었다. 1053년 치비타테 전투에서 교황 레오 9세랑고바르드 귀족들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면서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인정받은 노르만인들은 아풀리아 백작 로베르 기스카르를 중심으로 뭉쳤다. 1057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인 카리아티 시를 포위 공격해 수 개월만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교황 니콜라오 2세와 밀약을 맺었다.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교황령을 지켜주는 대신, 교황은 그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아풀리아에서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동생 루지에로 1세에게 칼라브리아 제패를 맡겼다. 1059~1060년 겨울, 루지에로는 칼리브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레지오 시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대거 활용해 맹공을 펼쳤지만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으로 조기 함락에 실패했다. 1060년 봄 아풀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기스카르가 동생과 합류해 공세를 펼쳤다. 결국 그해 여름 레지오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칼라브리아는 노르만족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던 1061년 2월, 카타니아와 시라쿠사의 에미르 이븐 알 툼나가 엔나의 통치자 이븐 알 하바스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 자칫하면 자기 영토를 잃게 생기자, 그는 칼라브리아의 밀레토(Mileto)에 머물고 있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의 최고 통치자로 인정해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안 그래도 풍요로운 시칠리아를 공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로베르에게는 이보다 좋은 명분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과 현지인들의 반란에 대처해야 했기에, 동생 루지에로 1세에게 시칠리아 공략을 맡겼다. 이리하여 노르만인들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경과[편집]


1061년 2월, 루지에로 1세는 160명의 기사단과 이븐 알 툼나가 이끄는 아랍군과 함께 메시나 북쪽의 파로 항 인근에 상륙하여 시칠리아의 북쪽 해안을 따라 이동해 내륙으로 진출했다. 그는 로메타와 밀라초를 습격해 상당한 전리품을 확보한 뒤 파로 항으로 돌아와서 전리품을 배에 실었다. 메시나의 아랍 수비대는 화물을 배로 옮기느라 분주하던 노르만인들을 기습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현장에 이르렀을 때, 마침 악천후 때문에 적재가 중단되어서 모든 노르만인이 해안에 있었다. 루지에로 1세는 즉각 아랍군의 정면으로 돌진했고, 그의 조카 셀로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측면을 요격했다. 아랍인들은 이내 크게 패했고, 메시나로 도주하다가 상당수가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승리에 고무된 루지에로는 다음날 아침 메시나 공성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메시나 주민들이 완고하게 저항하면서 쉽사리 함락되지 않자, 이븐 알 하바스가 파견한 아랍군이 도착할 것을 걱정한 루지에로는 퇴각을 명령했다. 하지만 폭풍이 닥치는 바람에 항해가 불가능했고, 그는 사흘 동안 해안에서 아랍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그러다가 폭풍이 잠잠해지자 신속히 배를 타고 칼라브리아로 출항했지만, 메시나 해협에서 아랍 함대의 요격을 받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레지오 항구에 가까스로 상륙한 루지에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주셨다"라며 모든 전리품을 레지오 교회 건설에 기부했다.

1061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원군을 이끌고 레지오에 도착했다. 로베르와 루지에로 형제는 2천 가량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시칠리아에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2번째 원정을 감행했다. 로베르가 메시나 북쪽 해안에 상륙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적 함대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이, 루지에로는 500 기사들을 이끌고 새벽 무렵 메시나 남쪽 해안에 기습 상륙했다. 당시 이븐 알 하바스는 메시나 북쪽 해안에 전군을 집결시켰기 때문에, 메시나는 텅 비어 있었다. 루지에로는 즉시 메시나에 입성하여 깃발을 꽂았다. 날이 밝자 메시나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바스는 섬 깊숙이 철수했고, 메시나 해협을 감시하던 아랍 함대 역시 팔레르모로 철수했다.

뒤이어 1,500 병사들을 이끌고 메시나에 도착한 로베르는 아랍인들을 도시에서 추방하고 오직 기독교도들만 그곳에 있게 한 뒤 도시를 요새화하고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 후 이븐 알 툼나를 앞세워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군해 로메타와 파자노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점령했다. 기독교도들은 노르만인들을 해방자로 여기고 성대하게 환영했고, 현지 아랍인들 역시 자신들의 주군인 이븐 알 툼나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왔다고 여기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만인들이 메시나와 로메타에 수비대를 배치하면서, 가용 가능한 전력은 700명으로 줄어들었다. 엔나 지방의 센투리페에서 처음 저항에 직면했을 때, 이 정도 병력으로는 도시를 함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베르는 공성전을 포기하는 대신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고 아랍인들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시장에 팔았다.

그러던 중 이븐 알 하바스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인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선제 공격을 하기로 하고, 하바스의 본거지인 엔나를 향해 진격했다. 하바스는 엔나에서 수성전에 임하려 했지만, 적군이 엔나 주변 지역을 닷새간 약탈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밖으로 출진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노르만군은 700명인데 비해 아랍군은 1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무장한 노르만 기사들은 가볍게 무장한 아랍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투력을 선보였고, 아랍군은 반나절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참패해 엔나로 도주했다.[2] 하지만 엔나 공략은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다.

이윽고 겨울이 다가오자,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메시나로 철수한 뒤 지금까지 정복한 영토 중 로메타 등 시칠리아 북동부 지역을 직접 관할하면서, 나머지 영토는 동맹인 이븐 알 툼나에게 맡겼다. 로베르가 이탈리아 본토로 떠난 뒤, 메시나에 남은 루지에로는 1061년 12월 다시 아랍인들을 습격하여 아그리젠토까지 진출했다가 귀환하던 중 트로이나 주민들의 귀순을 받아들여 그곳에 수비대를 남긴 뒤 메시나로 이동했다. 이후 칼라브리아로 가서 칼라브리아에 남겨둔 약혼자 데브뢰의 유디트와 재회해 1062년 초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후 이븐 알 툼나와 함께 페탈리아를 공략해 시칠리아 내 영토를 굳건히 한 후 칼라브리아로 돌아온 루지에로는 로베르에게 칼라브리아를 자신의 영지로 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와 갈라설 수 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로베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루지에로가 머물고 있던 밀레토를 습격했다. 루지에로가 그라체(Gerace)로 도주하자, 그라체 주민들은 그를 숨겨줬다. 하지만 그라체의 유지였던 바실리가 로베르에게 루지에로의 망명 소식을 전했다. 이에 로베르는 한 밤중에 그라체에 잠입해 바실리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도중에 정보가 새면서 로베르가 그라체에 잠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주민들은 바실리의 집에 쳐들어가서 바실리를 잡아 죽였다. 로베르가 집 문을 걸어잠그고 대항하자, 그들은 집을 봉쇄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뒤늦게 주군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된 로베르의 군대는 루지에로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루지에로는 그라체의 장로들을 만나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로베르는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범죄했으니 그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이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봉쇄를 풀자, 루지에로는 집안에 들어가서 로베르와 대면했다. 두 사람은 오랜 이별 끝에 재회한 형제 마냥 서로를 끌어안고 화해했다. 이후 그들은 칼라브리아를 동등하게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렇듯 로베르와 루지에로가 한바탕 갈등을 벌이다가 화해했을 때, 시칠리아에서 노르만인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이븐 알 툼나가 적의 습격으로 살해당하고 트로이나와 페탈레아의 노르만 수비대가 메시나로 철수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지에로는 즉시 시칠리아로 돌아가서 트로이나를 다시 점령한 뒤 그곳에 새 수비대와 아내 유디트를 남겨두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니코시아로 향했다. 그러나 처음에 노르만인들을 해방자로 여기고 환대했던 트로이나의 그리스 주민들은 노르만인들이 약탈을 일삼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루지에로가 떠난 사이에 노르만인들을 쓸어버리고 유디트를 인질로 삼기로 마음먹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유디트는 노르만 수비대를 소집한 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저항했고, 루지에로는 즉각 트로이나로 돌아와서 아내를 구했다.

트로이나 주민들은 보복을 두려워해 인근 마을의 아랍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루지에로는 사방에서 아랍인들이 몰려오자 아내와 수비대를 이끌고 도시 성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훨씬 더 많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했다. 그리스인과 아랍인들은 성채를 포위하고 4개월 동안 공격했고, 노르만인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타고 다니던 모든 말을 잡아먹어야 했다. 게다가 따뜻한 옷도, 장작도, 담요도 없었기에, 겨울이 닥치자 얼어죽는 병사가 많았다. 이러다가는 모두가 죽겠다고 판단한 루지에로는 야간 기습을 감행했다. 포도주를 마시며 경계를 게을리하던 아랍인들은 노르만인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모조리 제압되었다. 다음날 아침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한 노르만인들은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그 후 루지에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칼라브리아로 가서 새 군마를 모았고, 유디트는 트로이나의 수비대를 통솔했다. 그녀는 밤에도 요새를 순회하고 병사들의 기강을 몸소 점검해 주민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여지를 주지 않았다.

1063년 루지에로가 군마를 구해 시칠리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곧 심각한 난관에 부딪쳤다. 노르만인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압둘라 이븐 하우칼과 이븐 알 하바스는 힘을 합치기로 했고, 명목상 주군으로 섬기던 지리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지리 왕조 술탄 티민은 아들 아이유브와 알리 왕자가 이끄는 두 군대를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각각 팔레르모와 아그리젠토에 상륙한 아이유브와 알리의 군대는 시칠리아 토후들의 병력과 합세한 뒤 노르만군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루지에로와 조카 셀로는 136명의 기사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에 비례하는 보병을 더하면 대략 500~600명 가량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출진한 아랍군은 기병만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아랍군의 전력이 적어도 4대 1로 우세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양측은 1063년 6월 체라미(Cerami) 마을 인근을 흐르는 강 양쪽의 언덕 꼭대기에 진을 치고 사흘간 대치했다. 그러다가 적군이 진영을 걷고 철수하자, 루지에로는 약 13km 떨어진 트로이나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노르만군이 떠나자, 지리 왕조군은 철수한 지 4일만에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뒤 강을 재빨리 건너 체라미 마을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지에로는 전군에 체라미로 행진하라고 명령했다. 노르만군이 절반 정도를 이동했을 때, 아랍군이 이미 강을 건너 체라미 마을에 대한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체라미가 이대로 함락된다면, 트로이나가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메시나와 트로이나 간의 연락로가 차단당할 위험이 컸다.

이에 루지에로는 조카 셀로에게 36명의 기사와 함께 체라미로 앞서 가라고 명령했다. 셀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3,000명의 기병과 다수의 보병대가 마을을 에워싼 채 숙영지를 세운 광경이 눈에 띄었다. 그는 적군이 인근에 노르만군이 온 줄 모르고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들의 진영을 즉시 공격했다. 셀로가 격노한 사자처럼 진영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자, 아랍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도주했다.

그 후 나머지 군대와 함께 체라미에 도착한 루지에로는 이곳에 남아서 농성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당시 루지에로의 부관이자 훗날 동로마 제국의 용병대장을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될 루셀 드 바이욀이 "적을 쫓지 않고 여기서 겁쟁이처럼 숨어 버린다면 더 이상 당신을 돕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다른 노르만인들 마저 동조하자, 전군을 이끌고 아랍군과 정면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노르만군은 셀로, 루셀 등이 이끄는 선봉대와 루지에로가 직접 지휘하는 후위대로 나뉜 채 출진했다. 한편 아랍군 역시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자 진영에서 출진해 3개 사단으로 이뤄진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접근했을 때, 팔레르모 콰이드(Qaid)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가 이끄는 지리군 선두 부대가 노르만군의 위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선점한 뒤, 셀로의 선봉대를 우회하여 루지에로가 이끄는 노르만 후위대를 급습했다. 루지에로는 즉각 행군을 멈추고 전군에 방향을 틀어 아랍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한 뒤 말을 몰아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라테라에 따르면, 성 게오르기우스가 돌연 출현해 노르만인들보다 앞서 말을 타고 아랍군의 대열이 가장 밀집한 곳에서 아랍인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루지에로의 창 끝에 성자의 깃발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노르만인들이 앞장서서 돌격하는 주군의 뒤를 따라 용맹하게 돌진한 것만은 분명하다.

루지에로는 적진 깊숙이 침투해 아르카디우스를 사살했다. 그러나 아랍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활용해 루지에로와 부하들을 에워쌌다. 노르만인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아랍군은 그들을 포위섬멸하고자 역공을 가했다. 이렇듯 양측이 격투를 벌이고 있을 때, 셀로의 선봉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지리군의 양 측면을 요격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주군이 전사한 데다 노르만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시달렸던 아랍인들은 사기가 꺾여 팔레르모로 달아났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다른 지리군 2개 사단은 전우들이 패주하자 공포에 질려 도주했다. 노르만인들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한 뒤 텅 비어버린 적 진영을 점령했다. 이후 세라미 주빈 지역에서 낙오병들을 사냥하다가 전리품을 싣고 트로이나로 귀환했다.

루지에로는 체라미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시칠리아 북동부의 지배를 확고하게 굳혔지만, 병력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영토 확장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064년 로베르가 시칠리아에 상륙해 동생과 합세하면서 전력이 증강되었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가모 시를 공략한 뒤 팔레르모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팔레르모가 해상 수송 덕분에 굳건히 버티자, 해군이 없어서 항구를 봉쇄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팔레르모 공략은 요원하다고 판단해 메시나로 철수했다. 이후 아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로베르는 시칠리아 문제를 동생에게 일임하고 섬을 떠났다.

루지에로는 1064년부터 1068년까지 아랍인들의 영역에 기병대를 파견해 약탈을 자행했지만, 형이 이탈리아 본토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이 이상의 공세를 벌이지 않고 성을 새로 건조하는 등 지배 영역의 방위를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칠리아의 아랍 세력은 적이 소극적으로 나오는 상황을 이용하기는 커녕 심각한 내분에 휩쓸렸다. 지리 왕조의 간섭이 심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븐 알 하바스가 주민들을 선동해 지리 왕조의 왕자 알리, 아이유브를 공격한 것이다. 이 내전은 1067년이 되어서야 이븐 알 하와스가 패사하고 아이유브가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이유브는 시칠리아 토후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뒤 1068년 미실메리(Misilmeri) 시 인근에서 약탈하던 루지에로의 노르만군을 요격했다. 루지에로의 노르만군은 이번에도 수적으로 훨씬 열세했지만,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해 아랍군을 압도했다. 아이유브와 추종자들은 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시칠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고 튀니지로 도주했다. 그 후 시칠리아의 아랍인들은 자기들을 이끌어줄 지도자 없이 노르만인들의 침략에 개별적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하지만 루지에로 역시 정복 전쟁을 신속하게 완료하거나 점령지를 통제하기에 충분한 인력이 없었다. 게다가 형 로베르로부터 바리 공성전을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그곳으로 가야 했기에, 시칠리아 정복 전쟁은 바리가 함락되는 1071년까지 미뤄졌다.

1071년 4월 바리를 함락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축출한 로베르 기스카르는 루지에로와 함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재개했다. 노르만군은 카타니아를 공략한 뒤 1071년 8월 팔레르모를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했다. 팔레르모 항구에 있던 아랍 함대는 해상 봉쇄를 돌파하려 했지만 하루 종일 이어진 해전에서 패퇴했다. 이후 수비대와 주민들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린 끝에 1072년 1월 노르만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시칠리아 토후국이 다스린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였던 팔레르모가 노르만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로베르와 루지에로는 1072년 1월 6일 팔레르모에 입성한 뒤 팔레르모 내 모스크들을 교회로 개조했다.

그 후 루지에로는 형 로베르가 이탈리아 본토의 지배를 굳히는 동안 시칠리아 원정을 꾸준히 이어갔다. 다만 대규모 원정을 벌이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영지에 소규모 부대를 파견해 약탈을 벌이는 방식을 추구했고, 그렇게 약탈을 해서 모은 자금을 토대로 용병들을 고용한 뒤 성채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1075년 튀니지의 해적들이 마차르(Matzar)에 상륙하여 포위 공격을 가하자, 루지에로는 야밤에 요새에 잠입한 뒤 날이 밝자마자 해적들을 습격해 모조리 몰살했다.

1077년,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서쪽에 남아있는 2개의 사라센 요새 중 하나인 트라파니를 포위 공격했다. 그의 사생아 조르다노는 야밤에 100명의 기사와 함께 초원에 풀어놓은 양떼를 지키고 있던 수비대를 습격해 모조리 몰아내고 가축들을 탈취했다. 이로 인해 식량을 공급할 길이 막막해지자, 트라파니는 곧 항복했다. 1078년, 루지에로는 타오르미나 시를 포위한 뒤 인근에 도시의 연락망을 차단하는 22개의 요새를 건설한 후 아랍 함대가 타오르미나 만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해상 봉쇄를 실시했다. 지원군이 올 가망이 없자, 타오르미나의 에미르는 루지에로에게 항복했고 에트나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이렇듯 시칠리아의 아랍 세력은 서서히 쇠락했지만, 마냥 힘없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말라테라에 따르면, 베나르베트라는 인물이 시라쿠사의 에미르로서 저항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 이름의 실제 이름은 이븐 알 와르디(Ibn al-Wardi)일 가능성이 있지만, 아랍 자료에 명시되지 않아서 불확실하다. 1081년, 베나르베트는 루지에로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한 발칸 원정을 감행한 로베르를 돕기 위해 떠난 틈을 타 카타니아를 공격해 그곳의 유지의 호응에 힘입어 손쉽게 공략했다. 그러나 조르다노와 2명의 사령관 로베르 드 수르빌, 엘리아스 카르토멘시스의 반격으로 카타니아에서 축출되었다.

1085년, 베나르베트가 이끄는 함대는 칼라브리아의 도시 니코테라를 공격해 그곳의 수도원을 파괴하고 수녀들을 생포했다. 루이제로는 이에 보복하고자 함대를 이끌고 시라쿠사 해상을 봉쇄했고, 조르다노는 육상에서 포위했다. 베나르베트는 해상 봉쇄를 풀기 위해 출격했고, 두 함대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베나르베트가 루지에로의 선박에 올라타서 적장을 죽이려 했지만, 노르만 기사들의 반격으로 중상을 입은 뒤 물 속에 떨어져 익사했다. 아랍 함대는 지휘관을 잃자 패주했고, 시라쿠사는 1085년 9월 4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노르만군에 항복했다.

이제 남은 아랍 세력은 시칠리아 남부 지역과 사방이 노르만 영토로 둘러싸인 시칠리아 중부의 엔나 토후국 뿐이었다. 1086년, 루지에로는 엔나 토후국 소유의 아그리젠토를 공략하고 엔나의 에미르인 이븐 하무드의 아내와 자식들을 생포했다. 1087년 초, 루지에로는 엔나 성벽에 도착한 뒤 이븐 하무드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이븐 하무드는 그럴 의사가 있지만 무슬림들의 보복이 두렵다고 밝혔다. 이에 루지에로는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과 맞서는 모양새를 보이다가 군대를 탈영해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권했고, 이븐 하무드는 그 말에 따랐다. 에미르가 그렇게 투항해버리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아랍군 역시 항복했다. 이븐 하무드와 그의 가족은 세례를 받은 후 칼라브리아에서 영지를 수여받았다.

루지에로는 여세를 몰아 시칠리아 남부 지역으로 공세를 펼쳐 1088년 부테라를 공략했고, 1090년 2월 노토를 복종시켰다. 1091년 몰타에서 활동하던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치고 몰타의 주요 도시인 므디나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와 몰타 전역이 노르만인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공작으로서 1101년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아들 루지에로 2세는 1130년 9월 27일 정식으로 시칠리아 국왕에 즉위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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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랍군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설과 병사했다는 설이 제기되나 불확실하다.[2] 말라테라에 따르면, 이날 아랍군의 사상자는 10,000명에 달한 반면 노르만인은 한, 두 명이 부상당한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