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네 폰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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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감독


파일:250px-Pontoni_newells.jpg

이름
레네 폰토니
René Pontoni
본명
레네 알레한드로 폰토니
René Alejandro Pontoni
출생
1920년 5월 18일 / 아르헨티나 산타페
사망
1983년 4월 14일 (향년 62세)
국적
아르헨티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신체조건
180cm | 72kg
소속
선수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40~1944)
CA 산 로렌소 (1945~1948)
인데펜디엔테 산타페 (1949~1952)
아소시아상 포르투게자 지 데스포르투스 (1953)
CA 산 로렌소 (1954)
감독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56~1957)
CA 산 로렌소 (1962)
국가대표
19경기 19골(아르헨티나 / 1942~1947)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폰토니에게는 5명의 형제자매가 있던 대가족이었다. 그러나 폰토니가 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어린 시절부터 그는 닥치는대로 일을 해야 했다. 폰토니는 12살때 형 후안과 함께 가금류 농장에서 일을 했고 그로 인해 huevo라는 별명이 붙었다.

폰토니는 형 후안의 권유로 1934년부터 힘나시아 에스그리마 데 산타페에 들어갔지만 당시 폰토니는 취미로 축구를 즐겼을 뿐 가정 형편때문에 이 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2.2. 선수 경력[편집]



2.2.1. 클럽[편집]


폰토니는 1937년부터 힘나시아 에스그리마 데 산타페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뛰기 시작했다.

1940년, 폰토니는 CA 보카 주니어스의 스카우트를 받았지만 프로 선수가 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 그러다가 1941년, 폰토니는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로 이적한다. 올드 보이스에서 5시즌을 활약하며 110경기에서 67골을 넣어 주가를 올린 폰토니는 1944년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 CA 산 로렌소로 이적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42년 이시드로 랑가라의 이적 이후 다시 위력적인 공격수를 보유하게 된 산 로렌소는 1946년, 아르헨티나 리그의 양대산맥 CA 리버 플레이트와 보카 주니어스를 밑에 놓으며 10년 만에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3년 후, 폰토니는 부상으로 산 로렌소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보카와의 경기에서 수비수와의 충돌로 다리가 부러지고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부상이 회복된 폰토니는 콜롬비아로 이적해 4년간 뛴 후에 1953년엔 브라질로 진출해 포르투게자에서 1년간 뛰었다. 하지만 이 부상으로 인해 폰토니는 전성기의 기량을 다시는 보여줄 수 없었고 그는 1954년에 다시 산 로렌소로 돌아와 1년간 2경기를 뛴 후 은퇴하게 된다.


2.2.2. 국가대표[편집]


폰토니는 1942년 5월 19일, 국가대표팀에 합류해 우루과이를 상대로 2골을 넣어 아르헨티나의 4대1 승리를 이끌었다.

폰토니는 1945, 1946, 1947의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3연패에 크게 일조했다. 1945년과 1947년 대회에선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1946년엔 아돌포 페데르네라와의 경쟁에서 밀려 후보로 참가했다.

특히 화룡점정은 바로 1947년의 대회로,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역대 최고의 코파 아메리카의 팀으로 불리는데 폰토니를 포함해 모레노, 멘데스, 루스토, 보예로 구성된 당대 최강의 공격라인과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는 훗날 50년대 최고를 넘어 역대 최고 중 하나로 불리게 될 선수까지 스쿼드에 보유한 팀이었다. 폰토니도 파라과이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 4골을 넣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 축구 언론 엘 그라피코에서는 이 1947년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로 대회 MVP였던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6골로 팀내 공동 최다득점자였던 노르베르토 멘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제치고 폰토니를 선정했다.

그는 1948년의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멀어졌고 5년간 19경기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19골을 넣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의심의 여지없는 1940년대 아르헨티나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타겟터보다는 '포처'유형에 가까운 선수였다. 커리어 통산 275경기 179골을 기록할 정도로 준수한 득점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지속적인 훈련으로 양발 슈팅, 드리블, 헤더 능력을 갖춘 덕택이었다. 거기에다 상황을 해석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세련된 기술과 전술적 지능을 바탕으로 한 연계 능력이 좋아 팀원과의 유기적인 팀플레이에 능했고 어느정도 플레이메이킹도 가능한 만능형 공격수였다.

폰토니의 최전성기였던 40년대 중반에 그는 동시대에 아르헨티나를 넘어 남미 축구의 아이콘이었던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비견될 정도였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3연패에 그의 기여도도 상당했으며 1966년에 축구 전문가들을 상대로 아르헨티나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뽑는 투표에서 4위를 차지했다.[2]

폰토니는 소속팀이었던 CA 산 로렌소에서도 레전드로 추앙받으며 팀 역대 최고 레전드 중 한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4. 뒷이야기[편집]


  • 비시즌기의 폰토니는 몸 관리에 거의 신경을 안 써서 시즌 개막무렵엔 살이 쪄 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 폰토니는 마리오 보예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피자 가게 La Guitarrita(작은 기타)를 열었다. 폰토니는 1983년에 먼저 사망했고 보예는 1992년에 사망할 때까지 혼자 피자 가게를 운영했다. 이 가게는 지금도 성업중이다.


5. 수상[편집]



5.1. 선수[편집]



5.1.1. 클럽[편집]




5.1.2. 국가대표[편집]



[1] 당시 보카뿐만 아니라 CA 페냐롤, CA 로사리오 센트랄도 폰토니의 영입전에 뛰어들었지만 폰토니가 전부 거절했다.[2]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뛴 외국인 선수들까지 포함하는 투표였고 폰토니보다 위에 있는 선수들은 1위 호세 마누엘 모레노, 2위 아돌포 페데르네라, 3위 아르세니오 에리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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