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카디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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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어 Dulkadiroğulları Beyliği
영어 Beylik of Dulkadir

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룸 셀주크의 쇠퇴 후에 자립한 베이국들 중 동남쪽 끝에 위치한 국가. 1300년 무렵 몽골 제국을 피해 서진한 둘카디르 튀르크멘이 건립한 왕조로, 중심지는 엘비스탄마라쉬 (카라만마라슈)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앙카라 동남쪽 크르셰히르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모술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다만 14세기 말엽 오스만 술탄국의 동진으로 영토 대부분을 잃고 라마잔 왕조와 함께 오스만 조와 맘루크 왕조 사이의 완충지대로 전락하였다. 다만 앙카라 전투로 오스만 조가 일시적으로 쇠퇴한 후에는 맘루크 조에 더욱 복속되었다.

2. 역사[편집]


중립 외교의 일환으로 둘카디르 왕가는 오스만 왕조와 여러 정략 결혼을 하였다. 5대 군주 나스렛딘 메흐메트 베이의 딸 에미네 하툰은 메흐메트 1세의 3번째 왕비가 되었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무라트 2세가 술탄에 오르며 양국 간의 동맹이 강화되었다. 무라트 2세 이후 모든 오스만 군주들은 둘카디르 혈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도 6대 군주 쉴레이만 베이의 딸 뮈크리메 하툰은 메흐메트 2세의 3번째 왕비가 되었다. 메흐메트의 3번째 부인 공식 다만 그로써 오스만 조와 동맹하던 백양 왕조우준 하산과 대립하게 되었고, 그에 의해 엘비스탄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당시 군주 멜리크 아르슬란 베이는 카이로로 망명했으나 친맘루크파인 동생 샤 부다크를 지원하던 맘루크 조에 의해 암살되었다. (1465년)

그후 친오스만파인 다른 형제 샤 수바르와 2년 간의 내전이 이어졌고, 패배한 샤 부다크는 이집트로 도주하였다.[1] 1472년 맘루크 술탄 카이트베이의 개입으로 샤 수바르가 사로잡혀 처형되자 샤 부다크가 베이에 올랐다. 하지만 그 역시 1480년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다른 동생 보즈쿠르트에게 패하였다. 보즈쿠르트는 오스만 조의 지원으로 보위에 올랐지만 바예지트 2세 치세 초반 젬과의 내전에 맘루크 조가 개입하며 촉발된 킬리키아 (추코로바) 전쟁에서 맘루크 조가 승기를 잡자 후자의 편에 참전, 1486년 오스만 군을 격파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보즈쿠르트는 백양 조를 공격하여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신생 정복군주 이스마일 1세에게는 대패하고 수도 엘비스탄을 약탈당하였다.

이후 그는 서쪽의 마라쉬로 천도하고, 딸 귈바하르 하툰[2]바예지트 2세에게 시집을 보내며 오스만 조와의 동맹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찰디란 전투 수행을 위해 이동하던 오스만 군의 진군을 방해했고 이에 분노한 셀림 1세는 1515년 하듬 시난 파샤를 파견해 보즈쿠르트를 응징하고자 했다. 시난 파샤는 투르나다으 전투에서 둘카디르 군을 격파하였고, 사로잡힌 보즈쿠르트와 그의 아들들은 처형되었다. 이렇게 후방을 안정시킨 후에야 셀림 1세는 이집트 원정에 나섰고, 보즈쿠르트의 수급을 카이로로 보내 맘루크를 협박하는데 써먹었다. 이후 보즈쿠르트의 조카 알리 베이가 총독으로 봉해졌다. 그는 1520년 셀림 1세가 사망한 틈에 이스마일 1세의 선동으로 일어난 샤 벨리 반란의 진압에 앞장서는 등 오스만 조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알리 베이 역시 1522년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총독에서 해임되었고, 둘카디르 왕가의 지배는 종식되었다. 그후 일대에서는 1526년 바바 쥔눈, 1527년 칼렌데르 첼레비 반란 등의 소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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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 부다크는 주민들에게 '형제 살해자'로서 명망이 낮았다고 한다. 주민들의 여론에 편승하여 그의 경쟁자들을 도운 오스만 제국의 황실이 형제 살해 관습을 지닌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2] 혹은 아이셰 하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