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유격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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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전개


1. 개요[편집]


독수리 유격대 공식 홈페이지

6.25 전쟁 중반기인 1950년 말에서 1951년 초 사이 제2보병사단에 소속된 제17보병연대 1대대와 제32보병연대 3대대[1] 사이의 다툼이 유격대즉결처분[2]으로 이어진 사건.

2. 사건 전개[편집]


독수리 유격대는 본디 1950년 10월 포천 신읍에서 최종성과 최종철 형제를 포함한 63명으로 결성된 자경단이었으며 이후 17연대 1대대 부대대장인 김영필 대위의 주선으로 1대대의 비공식 민병대로 편입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17일 서울 성동공업중학교(현 성동공업고등학교, 광희중학교)에서 2사단이 재창설되면서 17연대가 사단으로 예속되었으며 31, 32연대도 창설되었다. 또 이 과정에서 김영필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 후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출가게 되었는데 그동안 정들었던 1대대 예하의 독수리유격대원들을 함께 데리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유격전을 할 정도면 정예 병력이기에 (17연대) 1대대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고 이에 김영필 (32연대) 3대대장은 유격대가 있는 매복지까지 트럭을 몰래 추진해 기어이 빼내는[3] 월권을 저지르고 말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유창훈 1대대장은 김영필 3대대장에게 그들을 원대복귀시키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김영필 3대대장은 "이들은 본디 민간인이기에 특정 부대에 예속될 이유가 없고 유격대원들 또한 3대대에 있기를 희망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군법회의에 소환하겠다'며 위협이 이어지자 김영필 대대장은 마지못해 유격대원들을 종용시켰지만 이에 유격대원들은 "우리가 너희들 장난감인 줄 아느냐? 17연대고, 32연대고 다 필요 없다. 태백산으로 들어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펴겠다."며 반발했다. 그래도 김영필 대대장의 간곡한 설득에 마지못해 트럭에 올라타 원대복귀했다.

하지만 이 앙금은 이후에도 남아 1951년 2월 5일 밤 10시경 충주 목행에 있는 17연대 1대대로 복귀한 유격대원들은 군장을 풀어 놓고 저녁 식사를 위해 집합하려고 했는데 무장 현역들에게 포위당한 뒤 도망병(!)이라는 이유로 창고에 감금되었고 유격대장 최종성을 포함한 5명의 간부가 정보과로 끌려가 탈영의 책임을 지고 대원들에게 "여기서 절대 무너지지 말고, 여기서 받아주지 않으면 김영필에게 가라"는 등 마지막 당부를 남긴 뒤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끝으로 총살되었다. 게다가 남은 대원들조차 부정한 놈들이라며 팬티 차림으로[4] 강 건너 중공군[5]이 있는 적지로 추방당했다. 이후 칼바람을 피해 골짜기에 모인 유격대원들은 연장자인 김익수 소대장이 "이렇게 된 건 김영필의 책임이니 그를 찾아가자"고 주장해 17연대의 감시를 피해 어찌어찌 32연대 3대대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연대 수색중대에 배속돼 경북 지역에 숨어든 북한군 10사단 유격대와 접전을 펼치거나 각종 고지 쟁탈전에 동원되다가 마침내 정전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들은 군번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기에 휴전 후 민간인 부대는 해체하라는 국방부령에 따라 해체 수순을 밟았고 소속 대원들은 유격대 경력을 증명받지 못한 채 날라온 입영통지서를 들고 현지 입대를 하거나 귀향했다. 하지만 적전도주로 국군에게 총살당했다는 오명은 여전히 이들에게 꼬리표로 붙어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그나마 뒤늦게나마 국방부 조사가 들어가 그 꼴을 당하고도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점이 입증돼 명예복구와 더불어 즉결처분과 그 외 전사를 포함한 16명의 위패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봉안되었다. 또 생존 독수리유격대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현재도 32연대 창설기념일이면 32연대와 3대대를 방문해 당시를 되새기며 부대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국방개혁으로 32연대가 2019년 말 해체되면서 관계자들의 모임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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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CTC 전문대항군연대의 모체 부대다.[2] 총살 및 적전추방.[3] 게다가 이는 대다수 유격대원들도 몰라서 단순 이동으로만 알았다.[4] 정확히는 '군에서 보급받은 옷들을 모두 벗고 가라' 여서 속옷까지 벗어야 했다. 그나마 이 와중에 민간 내복을 입고 있었던 대원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5] 당시는 중공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밀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