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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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orie_Miller_-_Restoration,_full.jpg
이름
도리스 밀러(Doris Miller)
출생
1919년 10월 12일
미국 텍사스 주 웨이코
사망
1943년 11월 24일 (향년 24세)
태평양 부타리타리 환초 인근(추정)
직업
군인
최종계급
해군 하사(First Class)
국적
미국

1. 개요
2. 초기의 생애
3. 진주만 공습에서의 활약
4. 해군십자훈장 수훈
4.1. 밀러의 격추 사실 여부 논란
5. 이후의 행적과 전사(戰死)
6. 후일담
7.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미국의 군인.

제2차 세계 대전진주만 공습에서 활약한 미국 흑인 병사로 널리 알려져있다. 미국에서는 흑인으로서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2. 초기의 생애[편집]


도리스 밀러는 1919년 10월 12일 미국 텍사스 주 웨이코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의 임신기간 중 그녀를 도운 조산사가 "아이가 딸일 것이다"라고 확신하는 바람에, 그의 부모는 미리 Doris 라는 여자이름을 지어놓았다고 한다.

당시의 수많은 미국의 농촌 청년처럼, 그도 집안일을 돕고 농장에서 일하며 성장했다. 도리스 밀러는 고등학교 시절 키가 191cm에 체중 91kg의 거구로 성장했으며,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라인맨으로 뛰었다.


3. 진주만 공습에서의 활약[편집]


도리스 밀러는 1939년 9월 미 해군조리 직별(Mess Attendant) 로 입대하였다. 당시 미 해군은 장교는 당연했고 수병으로조차 흑인의 입대를 별로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조리 직별이 흑인들에게 문호가 열려있는 몇 안되는 병과 중 하나였다.[1]

신병 훈련을 마치고 탄약수송함 USS Pyro(AE-1)에 첫 배치를 받았으며, 이어 1940년 2월 전함 웨스트버지니아(BB-48)로 전속되었다. 그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근무하는 동안 함내 복싱 챔피언에 올랐다.[2] 1941년 2월 그는 해군 병장(Second Class)으로 진급하였다.

운명의 1941년 12월 7일 아침, 도리스 밀러는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승조원들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고 세탁물을 수거하고 있던 중이었다. 바로 그때 일본 해군 항공모함 아카기에서 발진한 공격기가 웨스트버지니아에 첫 어뢰를 명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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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어뢰에 명중당하는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 진주만 공습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잠시뒤 전투 배치 경보가 울렸고, 도리스 밀러는 그의 전투배치 위치인 대공포 탄약고로 가려 했으나 해당 지역은 이미 어뢰 폭발로 파괴된 뒤였다. 그는 전함 선미 갑판위의 일명 타임스 스퀘어[3]로 이동해서, 장교들에게 "다른 임무에 투입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곳에 있던 장교는 도리스 밀러의 신체 조건이 좋은 것을 보고[4] 전함 함교로 올라가서 함장 대령을 구조하는 임무를 맡겼다. 함장은 인근에 있던 전함 테네시에서 날라온 폭발 파편으로 '복부가 크게 갈라진'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밀러와 다른 선원들은 함교로 올라갔으나 함장이 너무 큰 부상을 입은 상태라 그곳에서 데리고 나올수는 없었으며, 함교 뒤쪽 그나마 안전한 장소로 그를 필사적으로 옮겼다. 베니온 함장은 그 와중에도 전투위치인 함교를 떠나 후송되기를 거부하고 승조원들에게 전함을 방어하고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다가 대량 출혈로 전사하고 만다.

뒤이어 근처에 있던 프레데릭 H. 화이트(Frederic H. White) 중위 등은 밀러 병장에게 50구경 기관총의 설치와 장전을 명령했다. 밀러는 공식적으로 50구경 기관총의 조작과 사격을 훈련받은 적이 없었고, 명령을 내린 장교들 또한 흑인 조리병인 그가 실제 사격을 하리라는 것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령을 내린 장교가 잠시 다른 곳을 살펴보다가 다시 돌아보니, 도리스 밀러는 이미 장전까지 마치고 일본 해군 함재기들에 대해 50구경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밀러는 뒷날 "어렵지 않았습니다. 50구경 기관총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잘 작동합니다. 다른 수병들이 이 총기로 훈련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 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약 15분에 걸쳐 탄약이 떨어질때까지 기관총을 사격하며 일본 해군기들과 격렬하게 교전하였다. 그러나 전함 웨스트버지니아는 총 7발의 어뢰에 피격되었고, 더 이상 버틸수 없다고 판단한 전함의 임시 지휘부는 전원 퇴함 명령을 내렸으며 밀러 역시 이에 따라 퇴함하였다.


4. 해군십자훈장 수훈[편집]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의 전쟁 참여 열기가 고취되고 많은 전쟁영웅들이 조명되면서, 도리스 밀러도 화제의 중심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특히 흑인이었음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기습적이고 비겁한 공격에 맞서 인종과 민족을 떠나 전 미국인이 전쟁수행에 협력하여야 하는 분위기를 고취해야 하는 미국 정부와 군으로서는 "흑인이자 비전투 특기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용감하게 기관총을 잡고 비겁한 일본기와 치열하게 교전한" 밀러의 행적은 그야말로 입에 딱 맞는 스토리였던 것이다.

그 결과, 밀러는 전쟁영웅으로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여러 언론에는 밀러의 활약상이 수없이 보도되었으며, CBS는 밀러의 영웅적 행동을 극화한 에피소드를 방송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미 유색인종 권익증진협회'(NAACP)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밀러에게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심지어 의회에서는 밀러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도 나왔으며,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에게 명예 훈장 수여를 요청하는 서명운동도 벌어지고 있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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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언론에 보도된 밀러의 활약상을 그린 삽화

그러나 프랭크 녹스 해군부 장관은 여러 정황을 검토한 끝에 "명예훈장 수훈대상은 아니다" 라는 권고를 공식적으로 밝혔고,[6] 여러 갈등과 논의 끝에, 결국 1942년 5월 11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밀러에게 해군십자훈장(Navy Cross) 서훈을 승인하는 문서에 결재하였다.

1942년 5월 27일, 밀러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CV-6)에 승선하여, 미합중국 태평양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해군 대장으로부터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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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 병장에게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하는 니미츠 제독


4.1. 밀러의 격추 사실 여부 논란[편집]


밀러의 진주만 공습 당시 활약에서, 조용하지만 꽤나 오랫동안 논란이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밀러가 일본기를 실제로 격추하였는가?" 라는 것이다. 국내 밀리터리 계에서는 밀러가 일본기를 격추하였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꽤 많고[8] 외국의 밀러 관련 웹사이트에는 그의 격추 전공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다수 있다. 무엇보다도, 밀러 본인이 진주만 공습 후의 인터뷰에서 "나는 일본기 중 하나 정도를 잡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도리스 밀러의 해군십자훈장 공식 수훈내역(Citation)[9] 에는 그가 일본기를 격추하였다는 내용은 안타깝게도 나오지 않는다. 공식 수훈 내역은 "탁월한 헌신, 남다른 용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용기로 치명상을 입은 함장을 구호하고,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기 전까지 적기에 대해 기관총을 운영했다" 라는 것이 전부이다. 미군의 훈장 수훈 검증과정은 매우 철저하고 까다로우며, 명예훈장은 물론 각군의 십자훈장 정도면 철저한 교차검증을 거친다. 밀러가 일본기 격추를 명확히 인정받았다면 그게 해군이 공인하는 수훈 내역에 기재되지 않을수는 없다.

만약 밀러가 일본기 1기 이상을 격추했음이 명확하게 교차 검증되었다면, 위 문단에 서술한 당시의 미국 사회의 분위기 상 밀러는 명예 훈장을 서훈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녹스 장관이 명예훈장 수여를 공식적으로 반대한 것은 밀러의 '실제 전공'이 애매모호하다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명예훈장 서훈은 사실 그때그때의 사회적 여론이라든지 군 내의 분위기를 타는 면이 없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육해공해병대와 해안경비대를 막론하고 엄청난 전공을 요구한다. 미 해군을 예로 들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 엔터프라이즈 급강하폭격대를 총지휘한 웨이드 맥클러스키 소령이나, 단 하루만에 일본 항공모함 2척(아카기, 히류)을 잡아낸 리처드 베스트 대위조차도 명예훈장을 못받고 해군십자훈장으로 만족해야 했다.[10] 이런 와중에 일본기 1기 격추조차도 애매한 밀러에게 (아무리 흑인 수병의 용감함을 강조하려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다 하더라도) 명예훈장을 서훈한다는 것은 심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밀러의 일본 해군기 격추 여부는, "1기 정도의 격추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훈장 수훈 내역으로 공식 인정받지는 못했으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5. 이후의 행적과 전사(戰死)[편집]


밀러는 1942년 6월 1일 해군 하사(First Class)로 진급하였고, 1942년 말과 1943년 초에 걸쳐 미국 본토로 소환되어 전쟁채권 판매 홍보행사에 동원되었다.[11]

1943년 5월, 밀러는 취역한지 얼마 되지 않은 호위항공모함 리스컴 베이(Liscome Bay, CVE-56)함으로 전속 배치되었다. 하와이 해역에서 훈련을 마친 리스컴 베이는 1943년 11월 '메이킨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태평양으로 나섰다. 11월 24일 새벽, 리스컴 베이는 항진 중에 일본 해군 잠수함 I-175호가 발사한 어뢰 1발에 명중되었는데, 하필이면 안그래도 빈약한 선체의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인데다가 어뢰가 하필이면 탄약고에 정통으로 명중하는 바람에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는 대참사를 겪고 만다.#[12] 이로 인해 리스컴 베이에 승좌하고 있던 TG52.3 전단장 헨리 뮬리닉스 해군 소장과 함장 어빙 윌시 대령을 포함하여 644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리스컴 베이의 참사는 당시까지 미 해군이 전투 중에 군함 1척에서 발생한 전사자 숫자로 최고 기록이었다.[13] 이 기록은 1945년 3월 19 오키나와 전역에서 미 해군 정규항모 프랭클린(CV-13)D4Y 스이세이의 급강하폭격으로 무려 724명의 전사자를 기록함으로써 깨어지게 된다.]

안타깝게도, 밀러는 리스컴 베이의 전사 및 실종자 명단에 포함되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선체 폭발에 휘말린 탓에 아예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1943년 12월 7일, 아들 밀러의 실종 통지를 받게 된다. 그가 명성을 얻은 진주만 공습으로부터 정확히 2년 뒤의 일이었다. 밀러에게는 사후 퍼플하트가 추서되었다.


6. 후일담[편집]


미 해군은 그의 전공을 기려, 2번에 걸쳐 군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73년 6월 취역한 녹스급 호위함 FF-1091이 "USS Miller" 로 명명되었다.[14] 해당 함정은 1991년 10월에 퇴역하였으며 이후 튀르키예로 부품용 함선으로 공여되었다가, 2001년에 튀르키예 해군의 훈련용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 4번함 CVN-81이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USS Doris Miller"로 명명되었다. 해당 클래스의 항공모함은 2022년 현재 현재 건조가 차곡차곡 진행중에 있으며, 도리스 밀러 함은 2026년 기공, 2032년 취역 예정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핵추진 정규 항공모함에 역대 대통령이나 해군 발전에 공이 많은 상원의원 등 유력 인사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수병 그것도 흑인 수병의 이름이 항공모함에 부여된 것은 도리스 밀러가 사상 최초이다. 이는 트럼프가 유색인종 차별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불식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로 보인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1970년작 영화 도라 도라 도라(영화)에서도 등장한다. 배역을 맡은 배우는 엘프 하버드. 영화 진주만과 다르게 적의 공격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용감한 군인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USS 애리조나가 폭발하자, 폭발로 인해 휘청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영화 진주만에서 짧지만 비중있게 등장한다. 배역을 맡은 배우는 쿠바 구딩 주니어.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복싱 시합 중에 상대 백인수병을 KO 시키는 장면, 그리고 진주만 공습 당시 함장을 필사적으로 구조하고, 기관총을 붙잡고 용감히 교전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15]

파일:miller gun fire.gif
영화 진주만에서 도리스 밀러 교전장면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3 15:15:55에 나무위키 도리스 밀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진주만에서는 간호사 에블린과의 대화에서 조리병으로 배치 받아도 그나마 음식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매일 설거지를 하거나, 잔심부름 밖에 안한다고 에블린에게 고충을 털어 놓는다.[2] 그가 함상에서 권투시합을 하는 장면은 영화 진주만에 묘사되어 있다.[3] 해당 장소는 전함 선미와 좌현 통로가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4] 전술했다시피 키가 191cm에 체중이 91kg 였다(...) 당시 미군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체구였다.[5] 오죽하면 2010년대 까지도 명예 훈장 추서 요청이 의회에 전달될 정도 였다. # [6] 이 때문에 녹스 장관은 특히 흑인 커뮤니티로부터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다. 사실 명예훈장은 그 수훈요건을 보면 알겠지만 수훈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하술하듯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일본 항모를 격침시킨 조종사들도 못 받았을 정도다.[7] 해군십자훈장은 밀러에게 수여될 당시에는 미 해군에서 명예훈장, 공로훈장에 이어 3번째 서열의 훈장이었다. 밀러의 수훈 조금 뒤에, 미 해군은 훈장 서열을 정리하여 해군십자훈장을 명예훈장 다음의 2번째로 조정하였다. 따라서 현재에는 밀러가 미 해군에서 2번째인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8] 당장 나무위키만 보더라도 과거 밀러 관련 서술에 "일본기 1~2기를 격추했다"라는 서술이 꽤 존재하였다.[9] Citation은 해당 군인의 전공과 훈장을 수훈하게 된 내역을 간략하지만 명확하게 기록하는 '공식 수훈 기록'을 말한다.[10] 아카기는 애초에 미 해군 폭격대의 착오로 공격대상에서조차 벗어나 있었으나 베스트 대위의 순간적인 기민한 판단으로 폭격을 받았으며, 그나마도 실제 명중탄은 베스트 대위의 단 1발이다. 히류 또한 최초의 명중탄은 베스트 대위가 기록했다. 베스트 대위의 이러한 전공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2001년 베스트 대위의 사망 이후에 미 해군을 중심으로 명예 훈장 승격 추서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불발되었다.[11] 2차 세계대전사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채권 홍보는 최소 십자훈장이나 명예훈장 등을 받은 전쟁영웅이라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필수코스였다. 존 바실론 같은 전미에 명성을 떨친 전쟁영웅도 얄짤없이 전쟁채권 홍보에 동원되었다. 미드 더 퍼시픽을 보면 잘 묘사되어 있다. 당시엔 이런 전쟁영웅들은 연예인 버금가는 지위와 역할도 가졌다.[12] 폭발이 얼마나 컸으면 1,400미터 밖에 있던 전함 뉴멕시코 갑판에 파편이 날라오거나, 인근에 있던 구축함 승조원이 리스컴 베이에서 날리온 소화기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리스컴 배이 침몰 이후 미해군에서 모든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의 탄약고를 액체가 들어있는 방호벽으로 설치하는 보수 공사를 실시했다.[13] 순수한 군함 1척의 사망자로는 1941년 진주만 공습에서 전함 애리조나의 전사 및 실종자 1,177명이 더 많지만,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공식적으로 쌍방이 붙은 전투로 인정하지 않았다(...)[14] 취역식에는 밀러의 어머니 헨리에타 밀러 여사가 참석했다.[15] 다만 위에서 서술한것처럼 실제로는 도리스 밀러의 일본기 격추 기록은 공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으나, 영화에서는 일본기 1기를 확실히 격추시키는 장면이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