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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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톰슨의 수상 이력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데이비드 톰슨 명예의 전당.jpg
데이비드 톰슨
헌액 연도
1996년



파일:데이비드톰슨.jpg

덴버 너기츠 No. 33
데이비드 오닐 톰슨
Davis O'Neal Thompson

출생
1954년 7월 13일 (69세)
노스캐롤라이나주 셸비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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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신장
193cm (6' 4")
체중
88kg (195 lbs)
포지션
슈팅 가드 /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7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애틀랜타 호크스 지명

소속 팀
덴버 너기츠 (1975~1982)
시애틀 슈퍼소닉스 (1982~1984)
등번호
33번 - 덴버 / 시애틀

1. 개요
2. NBA 데뷔 전
3. ABA/NBA 커리어
4. 은퇴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THE SKYWALKER

미국의 농구선수로, the Skywalker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운동능력과 슬램덩크를 자랑하는 스윙맨.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우상이었던 남자였지만, 이런저런 이유, 불운 등으로 프로농구계에서 롱런하지 못하고 단명한 비운의 스타플레이어이기도 하다.


2. NBA 데뷔 전[편집]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톰슨은 크레스트 고등학교를 다녔고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로 진학하여 팀을 1974년 NCAA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엄청난 수직 점프의 높이 때문에 톰슨은 대학 시절 '스카이워커'라고 불렸다.


3. ABA/NBA 커리어[편집]


파일:dthompson-inline.jpg

대학 최대어 중 한 명이었던 톰슨은 1975년 ABANBA의 관심을 동시에 받았는데 톰슨은 어느 리그를 가야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톰슨은 애틀랜타와의 미팅에서 구단이 맥도날드에서 식사를 대접하는 등(?!) 자신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느꼈고 ABA팀이던 덴버 너기츠가 본인의 친구였던 몬테 타워도 함께 계약을 해주겠다고 하자 ABA쪽에서 데뷔하기로 결정한다. [1]

톰슨이 데뷔한 1975-76시즌은 ABA가 존속했던 마지막 시즌이었고 1976년 마지막 ABA 올스타전에서 톰슨은 ABA의 슈퍼스타 줄리어스 어빙과 슬램덩크 컨테스트 결승에서 겨루게 되었다. [2] 톰슨은 1976년 올스타 MVP를 수상하면서 ABA에서의 데뷔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덴버를 포함한 4구단만이 살아남아 NBA에 합류한 1976-77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함께 NBA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는 두 구단 중에 하나가 되는데는 톰슨의 기여가 컸다. [3]

NBA 올스타전에 4번 선정되고 1979년에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으며 1977년과 1978년에는 NBA 퍼스트팀에 선정되는 등 70년대 후반이 톰슨의 전성기였고 1978년 4월 9일 디트로이트전에는 무려 73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8년 덴버 너기츠 역사상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지만 시애틀 슈퍼소닉스에게 패한다. 톰슨에게 덴버 구단은 1978년 5년 400만 달러라는 큰 금액에 재계약했다.

그러나 80년대를 맞이하면서 톰슨은 마약 남용과 부상으로 인하여 기상이 하락세로 들어섰고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84년 톰슨은 뉴욕의 스튜디오 54 나이트클럽에서 무릎을 다쳤고 NBA 커리어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85년 인디애나로 컴백을 시도했으나 결국 NBA로 돌아오진 못했다.

한편 같은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데이비드 톰슨을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오던 한 꼬마아이가 톰슨이 리그를 떠난 후 2년 뒤 1라운드 3픽으로 시카고 불스에서 데뷔했는데 그가 바로 마이클 조던이다.[4]


4. 은퇴 이후[편집]


NBA 은퇴 이후에도 톰슨은 마약과 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면서 이 문제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톰슨은 30년만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으로 돌아가 사회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본인의 대학시절 별명이던 '스카이워커'라는 이름으로 자서전을 출간하고 본인의 삶을 돌아보는 영화를 만드는 등 선수시절 막바지의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으로 돌아갔다. 이후 1996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3년 헌액된 댄 이젤 이후 덴버 출신으로는 2번째로 들어갔다. 덴버 구단도 ABA 후반, NBA 초기 전국구 스타이며 팀을 위해 활약한 그의 번호 33번을 영구결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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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와 포옹하는 Skywalker
2009년 마이클 조던이 농구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자신을 소개해줄 인사로 데이비드 톰슨에게 직접 전화를 건 일도 유명하다. 농구의 전당은 보통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나 은사를 고르기 마련. 선수 시절 감독이던 필 잭슨이나 대학 시절 은사들을 마다하고 자신에게 전화를 건 조던에게 놀라며 데이비드 톰슨은 "자네 정말 나한테 전화한 것 맞나?"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7~80년대의 NBA 스타 플레이어들에 대해 잘 알려져있지 않은 한국에서는 이 일화로 데이비드 톰슨이라는 선수를 안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5. 여담[편집]


스카이워커라는 별명답게 공중을 지배하는 높은 점프력과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줬던 선수. 70년대 전성기의 점프력은 별명처럼 공중을 걸어다니는게 아닐까 착각될 정도다. NBA의 70년대 후반은 닥터J 줄리어스 어빙과 모제스 말론 등이 유명했던 시기이지만 그 당시에도 슈퍼스타였던 선수 중 한 명으로 덴버 너기츠에서 나온 최초의 전국구 인기선수라고 할 수 있다.

마약과 술로 인하여 커리어가 짧았던 것이 아쉬운 선수. 같은 나이인 알렉스 잉글리시가 1990년대 초반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간 것을 생각하면 너무 짧은 선수생활이었다. 조금만 더 몸관리를 잘해 선수생명을 늘렸더라면 마이클 조던과 대결하는 경기도 가능했을 것이다. 톰슨과 조던 모두에게 아까운 일.

덴버의 80년대 황금기를 상징하는 무지개 스카이라인 유니폼은 1982-83년부터 도입되었는데 톰슨은 1981-82년에 팀을 떠나게되는 바람에 이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1976-77시즌, 1977-78시즌 2번의 NBA 퍼스트팀을 수상했고 이는 덴버 선수로 단 둘뿐인 기록이다.[5] 덴버의 그 다음 퍼스트팀 선수는 2018-19시즌의 니콜라 요키치로 40년이 넘게 걸렸다. 톰슨은 2019-20 시즌 덴버의 홈 개막전에 초청받아 직접 요키치를 축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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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워는 1975~1977년 2시즌을 덴버에서 지내고 선수 생활을 은퇴했으며 이후 여러 대학의 코치, 감독을 역임하며 2014년 은퇴했다.[2] 올스타 슬램덩크 컨테스트는 ABA가 먼저 도입했고 그 이후 NBA에서 받아들여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3] 뉴욕 네츠인디애나 페이서스는 NBA 합류 초창기부터 기나긴 암흑기에 시달리게 된다.[4] 해당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조던은 데이비드 톰슨을 동경해 대학도 원래는 NC state에 가고싶어했지만 NC state는 조던 리크루트에 관심이 없었다. 그때문에 조던은 옆동네 UNC 타힐스의 장학금 오퍼를 받아 진학했고,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UNC 대학 박물관에는 조던의 입학당시 서류가 헌액되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어있다.[5] 알렉스 잉글리시 등 80년대 전성기 멤버들과 카멜로 앤서니(날씬하던 시절)도 수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