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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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어빙의 수상 이력












파일:줄리어스 어빙 뉴욕 네츠 시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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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r_j.0.jpg
브루클린 네츠 영구결번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영구결번
롱아일랜드 네츠 영구결번
No. 32
No. 6
No. 32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www.hoophall.com/230600f835565c4b1347f76e3c5b3a32_f255.jpg
줄리어스 어빙
헌액 연도
1993년



파일:줄리어스어빙.jpg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No. 6
브루클린 네츠 No. 32
줄리어스 윈필드 어빙 2세
Julius Winfield Erving II

출생
1950년 2월 22일 (74세)
뉴욕주 루스벨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학교
매사추세츠 대학교
신장
201cm (6' 7")
체중
95kg (210 Ibs)
포지션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7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2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소속 팀
버지니아 스콰이어스 (1971~1973)[1]
뉴욕 네츠 (1973~1976)[2]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76~1987)
등번호
32번 - 버지니아 / 뉴욕
6번 - 필라델피아

1. 개요
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
2.2. ABA 시절
2.3. NBA 시절
3. 수상 내역
4. 플레이 스타일
5. 기타
5.1. 어빙의 인기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프로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날에도 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Being a professional player is doing the things you love to do, on the days you don't feel like doing them.)


"전설이 되고 싶다면 자신의 목표에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파일:external/i210.photobucket.com/potrait.jpg


미국의 농구인으로, 별명은 'Dr.J'.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모제스 말론과 함께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떨어지는 편인데, 이는 어빙과 말론의 시대인 1970년대~80년대 초는 NBA의 암흑기이자 파이널 녹화 방송의 흑역사 시기였기 때문. 그 후배들인 매직 존슨래리 버드가 NBA의 흥행과 세계화를 이끌면서 인기를 회복하지만 그때는 이미 어빙과 말론의 시대가 지나가버렸다. 또한 모제스 말론과 함께 어빙은 NBA 뿐 아니라 ABA에서도 활약했기 때문에, 동시대 NBA의 라이벌 오스카 로버트슨, 카림 압둘자바같은 선수에 비하면 통산기록이나 리그에 남긴 족적들이 부족한 부분도 있다.

그래도 은퇴 후 어빙은 NBA TV에서 제작한 OPEN COURT, INSIDE THE NBA에도 종종 출연하고 슬램덩크 콘테스트 심사위원이나 기타 이벤트에도 자주 참여했다. 어빙과 활동시기가 비슷한 빌 월튼은 미국내 인기가 상당한 반면 한국에선 어빙 이상으로 인지도가 없다.[3] 모제스 말론이나 다른 아메리칸 농구 협회 스타들에 비하면 어빙이 가장 꾸준하게 대외활동을 해온 편. 특히나 그 덩크와 공중을 날아다니는 스타일 등으로는 꽤나 알려져 있는 편이다.


2. 커리어[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1950년 2월 22일 뉴욕 주의 루즈벨트라는 곳에서 출생했다. 이미 중학생 때부터 한 손 덩크가 가능했으며 루스벨트 고등학교 진학 후 농구부에 들어가 레이 윌슨 감독 밑에서 가르침을 받아 팀을 이끌었고. 길거리 농구의 전설 러커 파크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Dr.J'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고교를 졸업한 어빙은 1968년 매사추세츠 대학교에 입학해[4] 잭 리먼(1920~2004)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평균 26.3점-20.2리바운드를 기록했고, 2학년 때인 1969-70 시즌부터 주전 선발 후 2년간 양키 컨퍼런스[5] 2연패에 NIT 진출 2회 등을 기록하는 등 탁월한 실력으로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았다.(관련 자료)


2.2. ABA 시절[편집]


이미 대학에서 더 보여줄 것이 없던 이 농구천재를 NBA가 주목하지만, NBA는 대학을 졸업해야 드래프트에 지명될 수 있었고 어빙은 좀더 일찍 농구로 돈을 벌고 싶어했다. 그런 어빙의 눈에 들어온 리그는 당시 NBA의 경쟁 리그였던 ABA. NBA의 후발주자로서, NBA를 따라잡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6]를 해오던 ABA는 과감하게 대학 중퇴선수에게도 문호를 개방했고, 어빙은 대학 3학년을 마친 1971년 ABA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 자유계약 선수로 입단했다[7]. 그리고 루키 시즌 어빙은 평균 27.3점을 기록하고 ALL-ABA 세컨드팀에 선정됐으며 신인상까지 거머쥐고, 스콰이어스는 45승 39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ABA에서 화려한 루키시즌을 마친 어빙은 1972년 NBA 드래프트 지원이 가능하게 되자 NBA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그는 1라운드 12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되지만, 실제로는 그의 에이전트가 어빙과는 상관없이 애틀랜타 호크스와 계약을 맺게 되어 삼중계약자(스콰이어스,벅스,호크스) 신분이 된다. 때문에 가장 먼저 계약했던 스콰이어스가 어빙과 NBA에 소송을 걸고, 승소하면서 어빙은 ABA 스콰이어스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계약난항 끝에 스파이어스에서 1시즌 더 뛴 어빙은 ABA의 최강팀인 뉴욕 네츠로 트레이드된다. 어빙의 몸값을 감당하기에 스콰이어스의 자금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 뉴욕 네츠에서 활약한 어빙은 2차례의 득점왕, 3연속 MVP, 2차례 플레이오프 MVP등 ABA를 씹어먹는 대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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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어빙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1972년 열린 슈퍼게임 2. 올스타전항목에 일부 소개되어 있지만, NBA vs ABA의 대결이었던 이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ABA를 이끄는 차세대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다.

자금난으로 어쩔 수 없이 어빙을 트레이드한 뉴욕 네츠는 이후 드라젠 페트로비치가 나타날 때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어빙의 저주라고 불린다.


2.3. NBA 시절[편집]


ABA시절의 맹활약에도 ABA는 결국 NBA와의 흥행대결에서 패했고 ABA는 도산했다. ABA에 속해있던 팀중 덴버 너기츠, 뉴욕 네츠, 샌안토니오 스퍼스, 인디애나 페이서스 4팀은 NBA에 편입되었다. 어빙의 소속팀 네츠는 NBA에 편입했지만, NBA에서는 이들 ABA팀을 이런 저런 문제로 압박했으며 뉴욕 네츠는 결국 줄리어스 어빙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왜인지는 브루클린 네츠문서를 참조바람.

그렇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소속으로 NBA에 데뷔한 줄리어스 어빙은 팀내 득점 1위(21.6)와 리바운드 2위(8.5)에 오르며 유일하게 82경기를 모두 출전하여 팀을 이끌었고 식서스는 76-77시즌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아쉽게도 빌 월튼이 이끈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패배했지만 어빙이 이끄는 식서스는 동부의 강력한 우승후보팀이었다. 식서스를 지속적으로 강팀으로 이끈 어빙은 80-81시즌 리그 MVP에 올랐다. 이 때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가 2위에 올랐는데, 이는 이후 'The Bird vs Dr.J'라는 향후 10년을 넘게 이어갈 라이벌 시리즈의 시작이었다.[8] 보스턴 셀틱스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우승을 위해 휴스턴 로키츠에서 81-82시즌 MVP 모제스 말론을 영입했고, 결국 82-83시즌 세미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뉴욕 닉스를,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밀워키 벅스[9] 물리치고 올라갔으며, NBA 파이널에서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가 이끌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스윕하며 식서스의 통산 3번째이자 마지막 NBA 타이틀을 얻었다.[10]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ABA 정규시즌 MVP 3회 (1974-1976)
ABA 플레이오프 MVP 2회 (1974,1976)
올-ABA 퍼스트 팀 4회 (1973-1976)

올-ABA 세컨드 팀 (1972)
A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1976)
ABA 올-루키 퍼스트 팀 (1972)
ABA 올스타 5회 (1972-1976)
ABA 올-타임 팀
NBA 챔피언 (1983)
NBA 정규시즌 MVP (1981)
NBA 올스타전 2회 (1977,1983)
올-NBA 퍼스트 팀 5회 (1978,1980-1983)
올-NBA 세컨드 팀 2회 (1977,1984)
NBA 올스타 11회 (1977-1987)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엘진 베일러가 쇼타임 농구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면, 줄리어스 어빙은 이를 완성한 선수이다. 강력한 센터가 중심이었던 농구판에서 스윙맨처럼 가드와 포워드를 넘나들면서 현란한 움직임과 슬램덩크로 팬을 끌어모음과 동시에 팀을 승리로 이끌수 있던 슈퍼스타.

한참 TV가 막 보급되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던 그 시절 어빙은 슬램덩크로 많은 어린이들을 설레이게 했다. 그 시절 어빙만큼 멋지게 덩크를 하는 선수는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림을 내리 찍듯이 누르는 덩크는 물론이고, 한 손으로 공을 잡고서 허공에서 스윙하면서 덩크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유투 라인에서 날아올라 덩크를 내리 꽂는 장면을 1976년 ABA 올스타전을 통해 최초로 전국에 소개했다.

마이클 조던은 "제가 어빙의 업적들을 볼 수 없었다면 제가 펼쳐보인 모든 버전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어빙을 칭송했고, 그랜트 힐 역시 "제게 있어서 어빙은 NBA의 전부로 여겨졌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운동장으로 뛰어가서 어빙의 덩크를 시도했지만 흉내조차 낼 수 없었죠"라며 어빙에 대해 말했다. 80~90년대 NBA의 최전성기를 이끈 흑인 스윙맨 슈퍼스타들은 모두 어빙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농구를 시작하고 어빙의 플레이를 배운 선수들이다. 찰스 바클리가 존중했던 선배 중 하나기도 한데, 식서스에서 같이 뛸 당시 많은 조언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5. 기타[편집]


  • 필라델피아나 펜실베이니아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1993년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필라델피아 지역 로펌의 꼴통 높으신 분들이 식서스의 경기를 관람할 때 스위트룸을 찾아 비위를 맞추는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을 했고 오피스에서도 카메오로 나오기도 했다.

  • 상당한 패션센스를 자랑했다. 30줄이 넘기 전에는 특유의 아프로 머리와 70년대 상징인 나팔 바지를 고수했는데 사진을 보면 소싯적에 여자들 꽤나 홀렸을 것 같다.[11] 노년에 들어서도 나이가 들면서 탈모가 진행된 많은 슈퍼스타들과 달리 백발이 무성한 머리와 수염을 고수하는데 정장을 입고 있는 사진을 보면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로 멋있게 늙었다. 백발간지

  • 결혼한 부인 외에도 두번에 걸친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았다. 첫 아이는 1980년 스포츠 기자였던 Samantha Stevenson 으로부터 낳은 Alexandra Stevenson, 둘의 관계는 1999년 딸인 알렉산드라 스티븐슨이 윔블던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두번째 아이는 2003년에 다른 여자로부터 태어났는데 이로 인해 어빙은 본처였던 Turquoise Erving과 이혼하였다.

  • 손이 정말 크다. 마이클 조던이 신인 시절 조던과 공을 같이 잡으며 포즈를 취한 사진이 있는데 손 크기로 유명한 조던보다도 한 마디가 더 크다. 일설에는 27cm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는 조던은 물론이고 216에 달하는 윌트 체임벌린보다도 크다. 동시대에 활약한 데랄 도킨스는 "어빙이 공을 잡으면 무슨 오렌지 잡는듯 했다"고 하며 실제로 큰 손을 이용해 한손으로 리바운드를 잡거나 보통 선수들은 양손으로 잡고 하는 고난도 볼핸들링을[12] 한 손으로 하기도 했다. 또 손이 워낙 커서인지 유독 투핸드 덩크 장면이 적다.

  • TNT의 '오픈 코트'에서 그에 대해 다룬 적이 있는데, 어빙은 팀을 대표하는 정도가 아닌 리그를 대표하는 '대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라 평했다. 오닐, 웨버, 바클리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극찬에 극찬을 거듭하고 어린 시절 '난 닥터 J야' 하며 놀았다고. 선수 시절 닥터 제이와의 악수 한 번에 영광스러워했고, 웨버 같은 경우 어빙이 쓰던 컵을 몰래 가져와 소장하고 있다는 일화를 밝히는 등 후배들에 엄청난 존경심을 받는 선수다. 바클리가 처음 입단하던날 쇼핑을 데려갔다고...[13][14]

  • 본인이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전설이기도 하고 당연한 소리지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보통 젠틀하고 말을 아끼는 이미지이지만 세븐티식서스 에 대한 소식이면 가끔 쓴 소리를 한다. 앤드류 바이넘에 대해서는 "기껏 큰 맘 먹고 트레이드해서 얻은게 이런 망가진 물건(damaged goods) 이라니" 라고 탄식했었고 2014년 NBA 드래프트에서 세븐티식서스가 3rd, 10th picks 를 얻자(대부분 사람들이 더 높은 픽을 얻을거라고 생각했다. 로터리 운이 없었을 뿐...) 뚱한 표정을 지어서 해외 NBA 커뮤니티에 좋은 짤방이 되었다. 그래도 드래프트 결과 자체는 가장 성공적인게 위안. 파일:external/cdn.phillymag.com/dr-j-shocked.jpg

  • 연세 지긋한 노인이 되었음에도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덩크 콘테스트에 나온 선수처럼 원핸드 덩크를 선보였다. 타고난 신체능력도 대단하지만 은퇴후에도 몸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를 알수 있는 부분.

  • NBA에서 2팀의 영구결번이 된 이후 G리그의 롱아일랜드 네츠에서도 영구결번되었다. 줄리어스 어빙이 네츠 프랜차이즈에서 활약하던 시절(2회 우승) 네츠는 뉴욕주의 롱아일랜드 나소 콜리세움을 홈구장으로 삼고 있었는데 팀이 뉴저지로 떠나고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이후 2군팀(G리그)이 다시 과거의 홈구장 나소 콜리세움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것을 계기로 60~70년대 해당 지역을 가장 빛냈던 농구스타인 줄리어스 어빙을 영구결번한 것이다. [15]



  • 사상 8번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상 최초의 농구게임 원 온 원에서 래리 버드와 함께 주인공으로 나온다. 1983년에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가장 농구 잘하는 두 사람을 꼽았을 때, 닥터.J는 쉽게 선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게임이 히트 친 덕에 현재의 스포츠게임 강자 일렉트로닉 아츠도 있는 것이니 나름 게임 시장에 공헌도 한 셈이다.




  • 그를 위한 헌정곡이 있다. Let It Flow (For "Dr. J") 라는 곡으로,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가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1980년 앨범 Winelight에 수록되었다.


5.1. 어빙의 인기[편집]


결론적으로 말하면, 줄리어스 어빙은 동시대 슈퍼스타들 중 최고의 인기선수이자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농구인들이나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인지도도 엄청나지만, 같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에 비해서는 대중적인 인기나 인지도가 떨어지고, 특히 해외에서 그가 농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실력에 비해서 인지도가 다소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빙이란 선수 개인이 인기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리그 자체가 인기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어빙이 동시대 선수들보다 월등히 높은 인기를 자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모제스 말론, 릭 베리, 데이비드 톰슨, 피트 마라비치, 타이니 아치볼드, 조지 거빈, 카림 압둘자바 등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들 중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높은 인기를 지녔고, "Doctor J"하면 당시 NBA팬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NBA팬들의 수 자체가 적었다는 것이 포인트. 70년대 당시 NBA는 현재처럼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거대리그가 아니었다. 수익기반이 불안정했던 NBA팀들은 연고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옮겨다니기 일쑤였는데, 휴스턴 로키츠는 1971년이 되어서야 현재 연고지에 정착하고, 20년대에 로체스터 시그램스로 시작한 "로체스터 로얄스"는 57년에 "신시내티 로얄스"가 되었다가 1972년에 "캔자스 시티-오마하 킹스"가, 그리고 1985년이 되어서야 새크라멘토 킹스가 되었다. "시카고 패커스"로 시작한 "볼티모어 불리츠"는 1973년에 워싱턴 DC 부근으로 연고를 옮겨 "캐피털 불리츠," 이후 1974년에 "워싱턴 불리츠"가 되었으며(현 워싱턴 위저즈), 뉴올리언즈에서 1974년에 출범한 재즈는 지역 스타인 마라비치 영입에도 흥행 부진에 시달리다가 1979년에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전해 유타 재즈가 되었으며, "버펄로 브레이브스"는 78년에 샌디에이고로, 그리고 84년에 로스엔젤레스로 옮겨 LA 클리퍼스가 되었다.

1950년생인 어빙이 전성기를 보낸 시기인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은 바로 이런 시기였다. 경기 외적으로도 NBA선수들의 마약남용, 늘어난 흑인 선수들의 비중[16] 등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물론 외적으로 규모가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 NBA의 인기가 탄탄하다고 보긴 힘들었고, 이런 현상에는 NBA와 경쟁하던 신생리그 ABA가 최고의 유망주였던 어빙, 모제스 말론, 데이비드 톰슨을 선점하고 NBA에서 이미 슈퍼스타이던 릭 배리까지 데려감으로써 더욱 불을 지폈다.

이런 상황이니 생활스포츠로서 높은 인기를 누리던 농구와 별개로 프로 농구리그의 인기는 삐걱대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마이클 조던의 어린 시절 우상은 데이비드 톰슨이었는데, 조던은 "그가 본 최초의 NBA 경기는 그가 직접 뛴 경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설마 자신의 우상이 합류한 덴버 너기츠 경기도 안 봤을까"란 점에서 과장이 있겠지만, 포인트는 63년생인 조던은 대학농구 팬이었지, NBA팬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은 당시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드물지도 않았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미국에서 가장 농구 열기가 높은 곳 중 하나지만 이 지역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차지하는 것은 대학농구, 그 중에서도 전통의 라이벌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훗날 조던이 진학하게 되는 학교)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톰슨의 모교)였다.

"대학농구팬이면 NBA도 볼 수 있는게 아니냐"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당시는 현재처럼 쉽게 중계를 찾아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NBA의 독점중계권을 ABC는 60년대에는 일요일 오후 경기만 중계했었고, 우승이 결정되는 경기가 아닌 이상 주중엔 중계를 하지 않았다. 최초로 파이널 시리즈의 모든 경기가 방송된 것이 1970년 결승일 정도. 1979년부터 1982년까지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결승전이 녹화중계로 방송되었고, 결승전이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1982년 이후에도 주중에는 플레이오프 경기들이 녹화중계될 정도였다. NBA인기가 높은 현재는 전국방송을 하는 ABC, ESPN, TNT가 커버하는 경기 외에는 지역방송들이 경기를 중계해주지만, 당시 NBA는 TV에 자주 나올 정도의 인기가 아니었다.

그나마 TV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lifestyle/1979/12/27/tv-in-the-70s/6a3a1ac0-d251-428c-acf7-1e227488474a/) 1979년 당시 TV 구독자 수는 1천5백만명으로, 당시 전체 가구 대비 구독율은 19.3%, 2020년 기준 60%의 3분의1에 불과했다.

위에서부터 쭉 보면 알겠지만 어빙이 전성기를 보낸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은 NBA의 인기가 부진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어빙은 전성기의 절반 정도를 ABA에서 보냈지만, ABA도 76년에 망한 리그니 상황이 나은 건 아니었다. 프로농구 인기 자체가 부진하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인 만큼, 인기가 되살아난 80년대나 이후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들보다 인기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해외인기 역시 마찬가지로, 자국에서 중계도 제대로 안되던 NBA가 해외수출을 노릴 수 있을리가 없었다. 인기가 어느 정도 살아난 1984년만 해도 NBA가 홍보를 위해 드래프트 생중계를 방송국에 (중계료를 받는게 아니라) 돈을 주고 할 정도였다. 현재 확인되는 한국에서 최초 NBA중계는 1975년 NBA결승전 4차전인데, # 이후 주요 경기에 대한 녹화중계를 가끔 하거나 AFKN에서 해주는 수준이었지 정기적으로 중계를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즉,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서는 NBA를 접할 수 있는 루트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물론 위에 언급했다시피 농구인들 사이에서는 어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70년대나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그 제한적인 루트로 경기를 보고, 해외에서 발간되는 NBA잡지를 찾아보는 등 관심을 가졌으며,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든 90년대 이후 NBA잡지들은 당연히 어빙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 물론 미국에서도 어빙의 위치는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 그대로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 측면에서 그가 후발주자들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일단 위에서 보듯 미국 내에서도 NBA의 인기가 현재나 8,90년대보다 역력히 떨어졌고, 해외에서는 더더욱 심했다. 물론 한국에서 70년대를 살아온 "해외농구팬"이라면 어빙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그 시절에는 "해외농구팬" 자체가 현재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70년대에는 재외교포가 아닌 이상 해외문화를 접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즉, "해외에서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적다"는 것은 사실 어빙 뿐 아니라 매직/버드 시절 이전 선수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사실 매직/버드만 해도 이름은 다 알아도 실제 경기를 보거나 이 선수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어빙이 다른 ABA 선수들보다 조금 더 알려진 이유는 아무래도 덩크로 유명해진 선수 중 거의 선발주자이고 (윌킨스, 조던 이전 세대) 식서스가 80년에 한번 우승을 차지했고 은근히 버드와도 신경전이 있었기 때문에 더 알려진듯.

종합하자면 어빙은 당연히 인기가 많은 선수이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대 자체가 미국에서건 해외에서건 현재나 90년대에 비해 프로농구 리그 자체의 인기가 매우 떨어지던 시절이었으므로, 그와 비슷한 위상 혹은 비슷한 실력을 지닌 후대의 선수들보다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6. 관련 문서[편집]



[1] ABA 구단[2] ABA 구단[3] 단 빌 월튼은 부상으로 인해 그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다. 그래서 명예의 전당, NBA 가장 위대한 선수 50인 75인의 선정에도 말이 많은 편.[4] 프로 농구선수가 된 후 성인 대상 커리큘럼인 '벽 없는 학교(University Without Walls)' 과정을 거쳐 1986년에 졸업했다.[5] 1946~1997년까지 존속한 NCAA 디비전 1 컨퍼런스.[6] 3점슛, 치어리더, 덩크 콘테스트등 다양한 시도가 많았다.[7] 사실 여기엔 NBA의 레전드 중에서도 레전드로 꼽히는 빌 러셀의 조언도 한몫했다.[8] 이는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경쟁구도와 함께 당시 NBA 최고의 흥행카드였다.[9] 한국에서 의외로 잘 모르는 80년대 강팀 중 하나로 올해의 수비수상을 두번이나 탄 시드니 몽크리프, 83년 당시엔 후보였지만 훗날 팀의 주축이 되며 오리지널 포인트포워드로 불린 폴 프레시, 득점력과 보드장악력을 겸비한 테리 커밍스, 슈팅력과 수비력이 좋은 센터 잭 시크마, 리키 피어스 등 좋은 선수들이 많은 강팀이었다. 이들은 유독 당시 최강팀 중 하나였던 셀틱스에 강했는데, 래리 버드의 셀틱스를 83년에 업셋하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래리버드의 팀을 스윕한 유일한 팀"으로 남는다. 셀틱스나 피스톤즈, 서부에선 레이커스의 위용엔 못 미쳤지만, 강팀으로 위용을 발휘하며 동부를 빡세게 하는데 한 몫했다.[10] 당시 모제스 말론은 "Fo, Fo, Fo!!"라는 발언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4경기만에 경기를 끝내겠다, 즉 스윕을 하겠다는 엄청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는 4경기-5경기-4경기로 동부 파이널에서 밀워키 벅스를 4-1로 꺾었다.[11] 실제로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2번이나 혼외정사로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12] 어빙의 주특기 중 하나이자 후배 마이클 조던이 대학시절부터 특기로 삼았던 rock-the-cradle덩크가 대표적이다. 이는 한 손으로 공을 잡은상태에서 공을 어께 뒤로 약간 뺐다가 앞으로 다시 빼면서 덩크를 하는(윈드밀과 방향이 반대) 고난이도 덩크인데, 조던의 경우 몸 자체를 크게 비트는 유연함과 공중동작이 포인트라면 어빙은 그 큰 손으로 볼을 다시 앞으로 펼 때 동작을 더욱 크게 해 쭉 팔을 뻗어 역동적인 덩크를 했다. 쉽게 말해 조던은 팔을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뺄 때, 어빙은 그 직후에 파워가 실리는 스타일. 플레이 자체의 멋은 막상막하지만 이 메커니즘 덕분에 조던은 이 덩크로 인유어페이스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어빙은 이렇게 해서 마이클 쿠퍼 위로 엄청난 덩크를 찍은 적이 있다. 어빙은 손이 워낙 커 뒤, 앞으로 흔들고 나서도 공을 꽉 잡고 위로 뻗는 게 가능했으므로. 여담이지만 이 덩크는 볼을 앞뒤로 흔드는게 요람 (cradle)을 흔드는 (rock)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13] 이 쇼핑 데려간 것도 큰 의미가 있었는데, 어빙은 바클리가 NBA 선수로써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양복을 사 줬다고 한다.[14] 그밖에도 바클리가 프로로써 성장할 수 있도록 고참으로써 제대로 본을 보였으며, 체중조절을 강권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해, 바클리는 어빙과 역시 팀 선배였던 모제스 말론을 끔찍하게 챙긴다.[15] 나소 콜리세움은 현재 롱아일랜드 네츠와 NHL의 뉴욕 아일랜더스가 사용 중이다.[16] 당연히 전혀 나쁜 현상이 아니지만 인기면에선 직격타였다. 당시 NBA의 주 팬층은 백인이었고, 흑인들이 NBA의 주 구매층이 되기엔 인종차별이 아직 심하던 시절이라 이들의 구매력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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