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잉글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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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잉글리시의 수상 이력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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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잉글리시
헌액 연도
1997년



덴버 너기츠 No. 2
알렉산더 잉글리시
Alexander English

출생
1954년 1월 5일 (70세)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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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신장
203cm (6' 8")
체중
86kg (190 lbs)
포지션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76 NBA 드래프트 2라운드 23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소속 팀
밀워키 벅스 (1976~1978)
인디애나 페이서스 (1978~1980)
덴버 너기츠 (1980~1990)
댈러스 매버릭스 (1990~1991)
바스케트 나폴리 (1991~1992)
지도자
애틀랜타 호크스 코치 (2002~2003)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코치 (2003~2004)
토론토 랩터스 코치 (2004~2011)
새크라멘토 킹스 코치 (2012~2013)
등번호
22번 - 밀워키 / 인디애나
2번 - 덴버 / 댈러스

1. 개요
2. 일생
2.1. 데뷔 이전
2.2. 선수 시절
2.3. 은퇴 이후
3. 수상 내역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1980년대 NBA를 풍미한 공격농구의 귀재. 별명은 The Blade. 카멜로 앤서니의 학창시절 우상이었던 선수였다.

덴버 너기츠가 NBA에 들어온 후 배출한 두 번째 슈퍼스타급 선수.[1]

80년대매직 존슨래리 버드가 리그를 양분하던 시대라 당시의 득점왕들은 지금도 인지도가 높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닉스의 버나드 킹과 함께 잉글리쉬가 대표적인 피해자다.


2. 일생[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1954년 1월 5일사우스캐롤라이나컬럼비아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어린 시절은 여느 흑인들처럼 그의 어린 시절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가 어렸을 당시에는 흑인 인권 운동이 미국 전역에 퍼지고 있었고 흑인들, 특히 미국 중남부 지역의 흑인들은 그 때문에 피해를 입어야 했고, 알렉스도 어린 시절 백인들에게 집 부근에서 린치를 당하는 등 여려 안 좋은 일을 겪었지만 그는 콜럼비아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고락을 같이 한 흑인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서였다고 했고, 하다 못해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면서도 고향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잉글리쉬의 인생을 바꾼 것은 농구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신체가 보통 이상이었던 잉글리쉬는 중학교 때부터 농구에 전념하였고, 고교 시절에 평균 38점 14리바운드를 기록하는 괴물이 되어 지역구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여러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농구에 전념하게 해준 부모님과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던 1972년에 고향에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에서 명장으로 이름난 프랭크 맥과이어 감독에게 4년간 농구수업을 받으며 1973년에 팀을 전국대회 16강까지 끌어올린 바 있다. 대학생활 4년 동안 평균 17.8점 9.6리바운드를 기록한 그는 NBA에 드래프트 신청을 하였다.


2.2. 선수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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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이후 1976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23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하여 데뷔, 별 활약 없이 2년만에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거쳐 1980년에 덴버 너기츠로 이적하여 1980/81 시즌 도중에 취임한 덕 모(Doug Moe) 감독은 자신이 구상한 런 앤 건 농구에는 알렉스가 적격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주전으로 선발되어 댄 이젤, 키키 반더웨이 3인이 어우러져 1981/82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시작해 덴버를 플옵 컨텐더로 격상시키는 데 공헌했고, 특히 1983년 12월 13일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대결에서 NBA 역사상 최다 타이 기록인 180점대로 끌어올리기도 했다.[2]

1985년에 댄 이젤이 은퇴한 뒤에도 알렉스가 리더 노릇을 하여 서부의 강호 노릇을 해왔으나,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쇼타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기세로 번번이 플옵에서 조기 탈락하여 우승 한 번 못해보고 1989/90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 형식으로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 이후 이탈리아 리그에서 활동하다 1992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덴버 너기츠에서 뛴 1980-1990 10시즌 동안 첫 시즌인 80-81시즌을 제외한 9시즌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잉글리쉬가 트레이드된 후, 덴버는 플레이오프에 다시 가기까지 4년이 걸렸다. 구단이 자신을 트레이드한 것에 서운함을 드러냈던 잉글리쉬였지만, 너기츠 구단이 그를 영구결번하여 현재 사이는 원만해진 듯 하다. 80년대 공격농구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라 현재도 구단 행사에 많이 초청받고 있다.


2.3. 은퇴 이후[편집]


1997년에 네이스미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2~2004년까지 애틀랜타 호크스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어시스턴트 코치를 거쳐 2004년부터 7년간 토론토 랩터스 어시스턴트 코치 겸 선수육성부장으로 재직하다 2012년부터 1시즌간 새크라멘토 킹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지냈다.

2014년부터 SEC 컨퍼런스 중계 전문방송 SEC Network의 해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18년부터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덴버 너기츠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받는만큼 구단 행사에 빠짐없이 초청되며 여러 기념상품도 빠짐없이 받기 때문에 볼만한 사진이 많은 편. 2018-19시즌 시티 에디션 유니폼을 입고 인증사진을 찍기도 했다.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8× NBA All-Star (1982–1989)
3× All-NBA Second Team (1982, 1983, 1986)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 (1988)
NBA scoring champion (1983)
No. 22 retired by the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4. 관련 문서[편집]



[1] 첫 번째 선수는 너기츠 구단의 영구결번이기도 한 데이비드 톰슨(33번)으로, 마이클 조던이 어린 시절 동경했던 선수다.[2] 결과는 184대 186으로 덴버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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