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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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구읍성 남문 영남제일관 헤르만 산더 국립민속박물관.jpg

대구읍성

大邱邑城

1. 개요
2. 구조와 모습
3. 철거
4. 현재
5. 관련 지명



1. 개요[편집]


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었던 읍성. 헐리기 직전 행정구역 명칭이 대구부였기 때문에 대구부성(大邱府城)으로 불려지는 경우도 있다.

선조 23년인 1590년, 일본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달성토성으로 건축됐다. 1596년(선조 29) 달성토성에 석축을 더 추가하고, 그 안에 경상감영이 설치됐다. 1736년(영조 12) 토성에서 석성으로 정식으로 5개월 만에 대구읍성을 완성했는데 높이 5m, 두께 8m, 둘레 2,700m였고 영영축성비를 세웠다. 1870년(고종 7) 서구의 침입에 대비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따라 8-9개월 걸쳐 성을 보수하고 수성비를 세웠다. 그러나 1907년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친일반민족주의자 박중양이 불법 철거해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지명은 남아있는 상태로,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성내동, 서문시장, 남문시장, 서문로[1] 등이 대표적인 예다.

2014년 대구광역시는 경상감영 · 대구부 관아 · 대구읍성 복원에 2022년까지 400억원을 투입한다는 경상감영 복원 정비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2. 구조와 모습[편집]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중구 지역 대부분, 그러니까 지금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따라 있었다. 읍성 동서남북으로는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 공북문의 사대문과, 동/서 소문이 있었으며 여첩이 8백 19개, 성 모퉁이에 망루가 4곳 있었다. 읍성 안에는 경상감영, 객사(달성관)가 있었으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의 관청들이 즐비하였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대구 서문시장이다. 읍성 안에서는 대구 약령시도 열렸는데, 중국의 상인들이 찾아와 장사하기도 했다.

대구읍성은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샤를 바라(1842∼1893)가 극찬했던 문화유산이었다. 그는 1888년 가을에 조선을 여행한 후 귀국해 발표한 <조선기행>을 통해 '대구읍성은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라고 감탄했다.

“우리는 그처럼 화려한 행렬을 이루며 도시의 내부를 오랫동안 둘러보았다. 나에게 성벽 위에서 한 번에 조망할 기회를 주기 위해 행렬이 성의 순시로를 돌았는데, 그 길은 베이징 성에 있는 것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평행사변형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각 벽면의 중앙에는 똑같은 규모의 요새화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의 내부는 과거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글귀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가을의 황금빛 들판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샤를 바라 <조선기행> 대구광역시 중구청



3. 철거[편집]


대구에도 많은 일본 상인들이 들어왔는데, 주로 성곽 밖에 살고 있었다. 당시 대구의 상권은 읍성 안은 조선 상인들이, 읍성 밖은 일본인들이 장악했는데, 일본 상인들은 대구 읍성 안까지 진출하길 원했다. 이에 일본 상인들과 당시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의도적으로 읍성의 허술한 부분을 여기저기 무너뜨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구읍성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자, 당시 부임된 경상북도 서리 겸 관찰사 친일파 박중양이 '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 는 명분 아래 조선인과 일본인 인부 60여 명을 부산에서 고용해 대구로 불러들여 대구읍성 철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조정은 박중양의 공문을 검토한 뒤 철거를 원천 불허했으므로 이는 불법 철거였다. 읍성을 한창 헐어내는 와중에도 조정에서 성벽 철거를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박중양은 철거를 밀어붙여 1907년 대구읍성을 파괴했다.##

읍성은 도시의 경계를 구분 짓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시설이다. 이런 시설을 임의로 철거를 시작한 시점에서 박중양은 이미 대한제국의 안위와 백성들의 민생을 외적들에게 열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당연히 조정에서도 이를 문제 삼았지만 사실상 통감부가 실세였으므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 덕분에 박중양은 책임을 면했다. 박중양의 후반생 은거지가 된 대구 침산동의 침산(砧山)[2] 한 덩어리 전체도, 이 때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본인들이 주선하여 선물한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 있다.출처

성의 철거로 대구를 지키던 시설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지금의 대우빌딩 뒤편 작은 삼거리에 있던 동장대도 없어졌고(동성로1가 2-2번지, 동성로 81-1 앞), 약전골목 입구 서쪽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약령서문 자리의 서장대도 없어졌다(남성로 152-2번지, 서성로 32). 중앙파출소 자리에 있던 남장대도 없어졌다(동성로3가 56-3번지, 중앙대로 382).

동문동 30-10번지(경상감영길 155)에 있던 진동문도 없어졌고, 북성로2가 15-1번지(북성로 50) 바로 앞 도로에 있던 공북문도 없어졌다. 서문로1가 52-1번지(경상감영길 1)에 있던 달서문도 없어졌고, 달서문과 북장대 사이의 서내동 1-26번지(서성로 74-10에 있던 서소문도 없어졌다. 동성로3가 105-7(동성로 12)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소문 역시 없어졌다. 전주성에 풍남문이 있듯이, 대구읍성에도 영남제일문이 있었는데 이 철거로 사라졌으며 1980년에 영남제일문이 망우당공원에 복원되긴 했지만 원래의 고증과 맞지 않았고 그 자리가 원위치도 아니었다. 경상감영과 달성관도 이후로 일본 거류민단에 의해 파괴가 진행되어 원모습은 남아있지 않고, 경상감영은 현재 공원으로 변해버렸다.

이 때 철거된 읍성의 석재들은 팔려나가 동산의료원, 약전골목, 선교사주택, 신명고등학교, 계성고등학교 등이 지어지는데 쓰여 여기저기 흩어졌다.


4. 현재[편집]


읍성 자리를 따라 나있는 길과 지명 말고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구광역시에서는 동성로 가로수 뿌리보호대에 옛 대구읍성길이라는 표식을 새겨두거나 서성로와 대구스테이션센터 뒤편으로 조형물을 세워두는 등 대구읍성의 존재를 알렸지만 정작 시민들은 관심이 없다. 완전 복원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성로는 대구에서 가장 큰 번화가로 거듭난 상태다. 거기다가 대구광역시의 행정 조치를 보면 '성벽 모양의 조형물'을 도로변에 설치하고 설명문을 붙이고 있어 복원이라기보다는 안내에 가깝다고 봐야 할 듯. 대구광역시 공식 블로그


5. 관련 지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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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곽병원 일대 교회, 점포 명칭에 관습적으로 쓰이는 지명이다.[2] 일명 박짝때기산, 현 침산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