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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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영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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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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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닐 영
NEIL YOUNG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5년
후보자격 연도
1995년
후보선정 연도
1995년
















역대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파일:MTV Video Music Awards_Logo.png
올해의 비디오상
제5회
(1988년)


제6회
(1989년)


제7회
(1990년)

Need You Tonight/Mediate
INXS

This Note's for You
닐 영


Nothing Compares 2 U
시네이드 오코너




닐 영
Neil Young
OC[1] OM[2]

파일:59C74A13-32F2-453A-A96C-3C7919E6FF06.jpg
본명
Neil Percival Young
닐 퍼시벌 영
출생
1945년 11월 12일 (78세)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주 토론토
국적
[[캐나다|

캐나다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행정구
]]
|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활동
1963년 – 현재
데뷔
1966년 버팔로 스프링필드 앨범 ‘Buffalo Springfield’
배우자
수잔 아세베도(1968년~1970년)
페기 영(1978년~2014년)
대릴 해나(2018년~현재)
서명
파일:닐 영 서명.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버팔로 스프링필드 시절
2.3. 크레이지 호스, 그리고 CSNY
2.4. 전성기
2.5. 침체기
2.6. 재기
3. 음악 스타일
4. 음반
5. 기타



1. 개요[편집]


캐나다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이다. 포크 록, 컨트리, 블루스, 하드록, 개러지 록, 심지어는 일렉트로니카까지 두루 섭렵한 다재다능한 음악가로 가사의 문학적 가치도 밥 딜런에 비견될 정도이다. 또한 1979년에 발표한 Rust Never Sleeps에 수록된 Hey Hey My My(Into The Black)을 통해 '그런지의 대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저널리스트 스캇 영과 레시 영 사이에서 1945년 11월 12일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토론토였지만 이후 캐나다 여러 곳으로 이사다닌다. 이사를 다니던 중 6세 무렵에 소아마비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였다.

영은 어렸을 적부터 로큰롤, R&B, 컨츄리 음악 등을 들어오면서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하이 스쿨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두었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지만 이후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베이스를 치던 동료 브루스 팔머와 함께 LA밀입국한다.


2.2. 버팔로 스프링필드 시절[편집]


LA에서 영은 팔머, 스티븐 스틸스, 리치 퓨레이, 듀위 마틴과 함께 버팔로 스프링필드를 결성한다. 포크, 컨츄리, 록 음악 장르가 베이스였던 밴드는 잘나가는 듯 했으나 팔머가 밀입국 및 약물 문제로 인해 활동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밴드는 휘청거렸고, 결국 1968년 5월 밴드는 해체된다.[3]


2.3. 크레이지 호스, 그리고 CSNY[편집]


영은 해체직후 리프라이즈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첫 솔로 앨범 'Neil Young'을 발매한다. 그리고 대니 휘튼, 빌리 탈봇, 랄프 몰리나와 함께 앨범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셋은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라 불리면서 이후 영이 이들과 작업할 때는 항상 Neil Young & Crazy Horse로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후 2012년까지 크레이지 호스는 영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실상 네 명이 한 밴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행보를 보인다.

크레이지 호스 결성 직후 1969년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를 발매하는데, 이 앨범에 수록된 Cinnamon Girl, Cowgirl in the Sand, Down by the River가 잇달아 히트를 치면서 영의 주가도 올라간다. 놀라운 건 이 세 곡을 포함해 앨범에 수록된 4곡이 단 하루만에 작사작곡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닐 영은 39.5°C의 고열에 시달리며 연달아 곡들을 썼는데, 훗날 자기도 도대체 어떻게 작곡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앨범은 단 2주만에 제작되었다.

크레이지 호스와의 작업 후에는 스프링필드 시절 동료인 스틸스와 함께 Crosby, Stills, Nash & Young이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처음에 영은 정식 멤버가 아니었지만 이후 정식 멤버가 되면서 1969년 그레미 상에서 Best New Artist 상을 거머쥐고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당시 CSNY는 영이 메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틸스와 영은 갈등을 빚는데, 영이 포크 록을 원했던 반면 스틸스는 "록 밴드에서 무슨 포크를 연주하냐"면서 영을 비판했다. [4][5] 결국 CSNY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영은 1970년을 끝으로 CSNY를 나온다. [6]


2.4. 전성기[편집]


이렇게 갈등이 있긴 했지만 CSNY 시절이었던 1970년에 'After the Gold Rush'를 발매하면서 디스코그래피에서 정점을 찍었고, 1972년에는 'Harvest'를 내놓는다. 빌보드와 UK 차트를 여러 분야에서 석권하면서 닐 영의 디스코그래피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이 앨범에 수록된 Heart of Gold는 닐 영의 수많은 곡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Old Man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Harvest에 성공에 힘입어 추진됐던 투어가 대니 휘튼의 과다 약물 복용으로 인한 사망과 캐리 스노드그래스와 4년만에 파경을 맞이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Time Fades Away', 'On The Beach', 'Tonight's the Night' 의 Ditch 3부작이 잇달아 발매되면서 다시 재기한다.

이후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 'Zuma'를 발매하고, 1979년에는 'Rust Never Sleeps' 라이브 투어 현황을 담은 앨범을 발매한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이 수록되어 있다.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이었던 존 라이든의 로큰롤[7] 부정 행보[8]에 태클 걸면서(Rock 'n' Roll can never die) 엘비스 프레슬리를 추모하는(king is gone but not forgotten - 왕은 갔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가사는 후에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준다.

후에 너바나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이 유언장에서 My My, Hey Hey (Out of the blue)라는 노래[9]에서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타오르는 게 낫다는 것을)라는 구절을 인용했는데, 닐 영은 이 사실을 알고 한동안 의기소침해져 이 노래들을 연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후 코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닐 영은 라이브에서 항상 Hey Hey, My My를 부를 때도 본래의 가사였던 Rust Never Sleeps 대신 이 가사를 넣어 부른다.


2.5. 침체기[편집]


하지만 1980년부터 그가 실험적인 시도를 하게 되면서 그의 음악은 상업적으로 서서히 하락세에 접어든다. 일렉트로니카, 신디사이저의 도입 등을 통해 수많은 도전을 했지만 영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깊게 박힌 나머지 대중의 주목을 받는데에는 실패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이 Reprise 음반사를 떠나 Geffen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와도 맞물려 있는데, 게펜은 영에게 다양한 실험작을 약속하는 바람에 영이 게펜 레코드로 옮기게 된 것. 비록 영은 자신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시도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당시에는 평이 좋지는 않았다.

어찌됐건 명성이 아예 죽은 건 아니라 1985년 에티오피아 기근을 위한 자금 마련의 목적으로 열린 Live Aid 콘서트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1988년에는 This Note's for you를 발매하면서 다시 리바운드의 기회를 마련했는데, 앨범 제목과 동명의 타이틀 곡에서 로큰롤의 상업화를 깠다. 문제는 MV에서는 한술 더 떠서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거물물론 영 앞에서는 꼬맹이들이지만들을 까버린다. 그래서 MTV에서는 처음에 이 MV를 방송하지 않았지만 이에 빡돌은 영은 '니네 MTV의 M은 음악(MUSIC)을 뜻하는 거냐 아니면 돈(MONEY)을 뜻하는 거냐?'고 까면서 나중에는 정상적으로 방송되었고, 89년에는 베스트 MV 후보에 오를 정도로 리바운드에 성공한다.

또 CSNY와도 오랜만에 재결합하여 'American Dream' 등을 발매하는 등 활동은 여전히 왕성했다.


2.6. 재기[편집]


1989년 Freedom 앨범을 발매하면서 재기한 그는 Rockin' in the Free World에서 홈리스, 환경 파괴 문제 등을 이야기하면서 조지 H. W. 부시를 까버린다.어째 나이 들면서 점점 디스하는 곡이 많아지는 거 같긴 하지만[10]

90년대 들어서는 상업적으로 70년대에 비견될 정도로 상승세를 달리는데, 'Harvest Moon', 'Sleeps with Angels'[11], 'Mirror Ball' 등이 영미에서 10위권에 진입하는 등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90년대 들어서 닐 영이 다시 상승세를 탄 것에는 커트 코베인과 에디 베더 등 당시 록계를 대표하던 그런지 계열 뮤지션들이 닐 영의 영향을 언급하며 존경을 보내서 신세대 음악팬들에게 닐 영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에디 베더의 경우엔 닐 영의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시 소개를 담당했고, Rockin' in the Free World를 자주 커버하는 등 존경을 항상 내비친다.

2000년대에도 8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내면서 지속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영의 영감은 언제쯤 떨어질까가 궁금할 정도이다.

2012년 10월 30일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 'Psychedelic Pill'을 레코딩, 발매했다. 러닝 타임이 87분이며 2 Disc로 나뉘어있다. 롤링 스톤이나 NME에서는 극찬하고 있다.


3. 음악 스타일[편집]


닐 영의 매력은 하드록을 방불케하는 강렬한 기타연주와 흐느끼는 듯한 하이톤의 보컬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어디엔가 숨어버렸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인간의 진실성을 찾으려 했다. 그가 처해있던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고귀한 것은 지고지순한 마음일 것이었다. '도덕성의 붕괴'라는 문제점을 안고있던 그 무렵 닐 영의 이같은 간구의 메시지는 일대 경종을 울렸다.

닐 영은 세련미를 갖춘 스타일리스트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노래가 지성인들의 애청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 의해 닐은 '고독한 음유시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거친 들판을 외롭게 걸으며 타는 목마름으로 진실과 순수를 찾아헤매는 닐 영의 참된 멋이 이 앨범(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에 있다. - 팝 평론가 임진모


비단 위에서 언급된 임진모의 평뿐만 아니라 영은 정말 현대 음악의 모든 것을 시도했던 뮤지션이다. 비록 대중들에게 영의 이미지를 묻는다면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는(마치 Heart of Gold에서의) 방랑시인의 인상을 많이 답하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라는 건 아니라는 것. 여기에 그의 송라이팅 능력을 보면 그가 왜 수많은 후배들에게 추앙받은지 알 수 있다. 영에게 영향을 받은 뮤지션만 봐도 커트 코베인[12], 펄 잼의 에디 베더,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 노엘 갤러거[13] 등 화려하다.


4. 음반[편집]


주요 작들은 볼드체로 표시. 라이브 앨범은 이탤릭체로 표시.

  • Neil Young (1968)
  •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 (1969)
닐 영의 솔로 커리어 첫 성공작이다. 후속작들에서 선보인 잔잔한 어쿠스틱 기반의 노래들과는 달리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한 강렬한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앨범이다.
대부분의 매체에서 닐 영의 최고의 앨범으로 꼽는 앨범.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90위로 선정되었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닐 영의 앨범. 미국의 소프트 록 열풍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앨범이지만, 닐 영은 이 앨범의 과도한 성공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닐 영의 대표곡인 Heart of Gold가 수록되어 있는데, 밥 딜런과 견줄 정도로 음악계의 엄청난 거물인 것에 비해서 빌보드 1위 곡은 지금껏 단 한 곡 뿐인데 그 곡이 바로 이 곡이었음을 감안한다면[14], 그의 이후 행보를 보건대 닐 영이 훗날 발언한 것처럼 '이미 가본 길은 지루하므로 애써 다른 길로 돌아섰다.'는 그의 말이 와닿을 것이다.
  • Times Fades Away (1973)
1973년에 행했던 라이브를 녹음한 앨범. 당시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닐 영의 라이브를 [15] 들을 수 있는 앨범이고 높은 평가를 받지만, 라이브 동안 있었던 힘든 사건 때문이였는지 [16] CD 재발매가 없던 앨범이기도 했다. 인기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라이브 녹음인데도, 신곡만 실었기 때문에 수록곡 전부는 이 앨범 밖에 들을수 없다. 라이브 앨범이지만 정규 앨범에 가깝게 신곡 위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Rust Never Sleeps의 예고편과 같은 앨범. 때문에 부틀렉이 유행했던 앨범인데 [17], 2017년 닐 영이 감수해 리마스터 재발매되었다.
닐 영 본인은 On the Beach와 함께 묻고 싶은 흑역사라는 반응을 보였다가, 최근엔 그나마 포용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중.
  • On the Beach (1974)
당시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기에 [18] 나온 앨범으로, 날카로우면서도 폭력적인 가사가 특징이다. 당시 대중에게 외면받았으며, 닐 영 역시 이 앨범에 담긴 지나치게 생생한 감정을 싫어해서 [19] 2003년이 되어서야 재발매를 허락했다. 그러나 롤링 스톤에서는 당시 이 앨범을 두고 After the Gold Rush 이후로 최고의 앨범이라고 극찬했고, 피치포크 미디어는 After the Gold Rush보다 이 앨범을 더 고평가했다.
1972년 Harvest 발매 이후 크레이지 호스의 멤버인 대니 휘튼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뒤, 그로 인해 우울하고 의기소침해 있던 [20] 영의 심정이 담긴 앨범. 앨범 자체는 1973년에 녹음을 마쳤으나, 더 상업적인 앨범을 만드리라 여긴 레코드사의 반려로 75년이 되어서야 발매되었다.

  • Zuma (1975)
크레이지 호스와 재결합한 앨범. 불안하고 어두웠던 심정을 그대로 토로한 전작들에 비해 좀 더 대중적으로 변해 호응이 있었다.

  • Long May You Run (1976)
  • American Stars 'N Bars (1977)
  • Comes a Time (1978)
Harvest와 비슷한 노선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앨범.
크레이지 호스와의 공연 실황 앨범. A 사이드는 영의 어쿠스틱 솔로 곡들로 채워진 반면 B 사이드는 크레이지 호스와 함께한 격정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로 채워져있다. 90년대 그런지 열풍 이후 이 앨범과 수록곡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이 재조명 받으며 닐 영은 '그런지의 대부(Godfather of Grunge)'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 Live Rust (1979)
  • Hawks & Doves (1980)
  • Re-ac-tor (1981)
  • Trans (1982)
  • Everybody's Rockin' (1983)
  • Old Ways (1985)
  • Landing on Water (1986)
  • Life (1987)
  • This Note's for You (1988)
  • Freedom (1989)
  • Ragged Glory (1990)
Freedom과 Ragged Glory 두 앨범을 통해 닐 영은 90년대에 재기에 성공한다.
  • Weld (1991)
  • Arc (1991)
소닉 유스나 너바나 같은 그런지 후배들에게 영향을 받은 라이브 편집본. 노이즈 잼 연주를 잘라다 붙인 실험적인 문제작이며 호불호가 갈렸다.
  • Harvest Moon (1992)
  • Unplugged[21] (1993)
  • Sleeps with Angels (1994)
  • Mirror Ball (1995)
  • Dead Man (1996)
  • Broken Arrow (1996)
  • Year of the Horse (1997)
  • Silver & Gold (2000)
  • Are You Passionate? (2002)
  • Greendale (2003)
  • Praire Wind (2005)
  • Living with War (2006)
  • Chrome Dreams II (2007)
  • Fork in the Road (2009)
  • Le Noise (2010)
  • Americana (2012)
  • Psychedelic Pill (2012)
  • A Letter Home (2014)
  • Storytone (2014)
  • The Monsanto Years (2015)
  • Peace Trail (2016)
  • Hitchhiker (2017)
2000년대 이후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앨범. 사실 이 앨범은 1976년 녹음해 발매하려다가 무산된 앨범을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통해 부활시킨 것이다. 수록곡 대다수가 오랫동안 다른 편곡으로 여러 앨범에 실렸다는 점에서 비치 보이스SMiLE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 The Visitor (2017)
  • Paradox (2018)
  • Colorado (2019)
  • Homegrown (2020)
1974-75년에 녹음해둔 미공개 앨범. 시간대로는 On the Beach와 Zuma 사이에 속하는 앨범이다. Neil Young Archives Volume II: 1972–1976에 수록되었다가 단품으로 발매했다.
  • Barn (2021)
  • World Record (2022)
  • All Roads Lead Home (2023)

5. 기타[편집]


  • 캐나다 음악 명예의 전당에는 82년에 일찌감치 들어갔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1995년, 1997년에 입성했다. 전자는 솔로 활동으로, 후자는 버팔로 스프링필드의 일원으로서.

  • 영은 미국의 농업 종사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의 일환으로 Farm Aid를 개최하는데 초대 멤버로서 89년을 제외하고 매번 개근했다. 퀸시 존스가 제작한 '로큰롤의 역사'란 다큐멘터리를 보면 크로스비와 내쉬가 닐 영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항상 쥐를 키우거나 동물을 키웠고, 심지어 지하실에서 닭을 300마리나 키운적이 있는 괴짜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 1970년에 발표한 앨범 After Gold Rush에 실린 곡 'Southern Man'에 관하여 이런 일화가 있다. 미국 남부의 한 술집에서 보수적인 남부인에게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험담을 들어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가사가 저렇다보니 논란이 일어난 건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대해 미국 남부 출신의 록밴드, 즉 서던 록 밴드인 레너드 스키너드가 자신들의 노래 Sweet Home Alabama에 닐 영을 언급함으로써 이에 응한다.[22] 이 때문에 닐 영과 레너드 스키너드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나 싶었는 데 오히려 이러한 음악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 친해졌다고.

  • 한때 The Missing Six라고 CD 미발매 앨범이 있었는데 [23], 그 중 닐 영 최고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On the Beach가 있어서 팬덤을 애태우게 했다. 하지만 2003년 홀연히 American Stars 'N Bars, Hawks & Doves, and Re·ac·tor와 함께 재발매되었다. 다만 다른 수작으로 꼽히는 라이브 앨범 Times Fades Away는 이후로도 소식이 없다가 2017년에야 박스셋 형태로 리마스터 재발매 되었다. 2017년 시점에서 재발매되지 않은 CD는 Journey Through The Past가 유일. 이건 닐 영이 만든 실험 다큐멘터리 사운드트랙이고, 신곡은 딱 한 곡인데다 컴필레이션에서도 들을수 있기에 재발매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평도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고.

  • 무명 시절 결혼 후 이혼했다가, 여러 여자들과 연애 끝에 가수 페기 영과 결혼해 30년 이상을 같이 지냈다. 하지만 2014년 이혼했고, 15살 연하인 배우 대릴 해나랑 사귀다가 2018년 재혼했다. 자식들 전부 뇌성마비뇌전증 환자라고 한다.

  • 배우 앰버 탬블린 아버지인 러스 탬블린 (역시 배우다.)과 친한데, 그 때문에 앰버의 대부라고 한다. 다만 앰버 본인이 밝히길 진지하게 한건 아니고 그냥 서로 친하다 보니 대부 관계가 성립된 것에 가깝다고. 영 말고도 딘 스톡웰데니스 호퍼도 앰버의 대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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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l young - Walk On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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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나다 훈장 2등급(Officer)[2] 매니토바 훈장[3] 버팔로 스프링필드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던 시상식에 닐 영은 그 자리에 불참했고, 멤버들도 이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여러 추측은 있으나 그가 같이하기를 거부한 거 자체는 사실인듯.[4] 사실 스틸스랑 영은 버팔로 스프링필드 시절부터 작곡 지분을 두고 아웅다웅하는 사이였다. 오죽했으면 버팔로 스프링필드를 뛰어난 사공이 너무 많아서 망한 밴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 스틸스는 영이 끼어드는걸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크로스비랑 내시가 원하는 바람에 저 구성이 되었다. 정작 2010년대에는 크로스비랑 영이 불화를 일으켰다는게 아이러니.[5] 사실 영은 스틸스와 싸워서 갈라진 뒤 CSN이 등장하자 큰 충겨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스틸스가 같이 해보자 하니 수락했다. [6] 닐 영이 나온 뒤에 이들은 Crosby, Stills & Nash로 계속 활동하며 승승장구한다. 잠깐 휴지기를 가진 뒤 영이 다시 들어와 활동하다가 2016년 크로스비랑 영과의 불화로 정지된 상태. 다만 트럼프 때문에 (...) 재결합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영 뿐만이 아니라 내시, 스틸스, 크로스비 모두 민주당 지지 리버럴로 유명하다.[7] 여기서는 50년대의 록만이 아닌 록 음악 전체를 풀어쓴 것에 가깝다.[8] 존 라이든은 섹피 멤버였을 때 말콤 맥라렌과 시드 비셔스의 막장 행보에 지쳐 섹피를 탈퇴하고 PIL를 창설하면서 안티 로큰롤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이는 21세기에도 유효해서 섹피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 때 로큰롤은 오줌 자국이라는 말까지 섞으며 헌액 거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다만 그의 다른 행보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 지를 감안하면 로큰롤이라는 음악 자체보다는 음악 산업이 돌아가는 행태를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9] Hey Hey, My My는 전기 기타기반으로 밴드 단위로, My My, Hey Hey는 어쿠스틱으로 연주하는 노래이며 가사도 조금씩 다르다.[10] 실제로 80년대 후반부터 사회 비판적인 곡이 많아지기 시작했다[11] 1994년 발매되었는데 이 해 요절한 커트 코베인을 추모하는 느낌이 강한 앨범.[12] 커트 코베인과 영의 관계는 록 씬에서 엄청난 경력의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를 존중하던 관계로 굉장히 좋았다. 영에게 코베인은 Nevermind의 대성공으로 50년대 엘비스, 60년대 비틀즈처럼 록의 아이콘이 되어서 영이 아끼던 로큰롤 씬의 수명을 연장 시켜주었던 유능한 후배 록 음악가이자 영을 존경하는 음악인으로 수시로 언급하며 음악적 전성기인 70년대가 지나고 80년대 고생하던 영이 90년대 부활을 향한 기반이 되준 인지도를 올려준 인물로 영이 코베인이 자살한 이후 자신의 음악 사용된 가사를 인용한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구절이 유서에 적혀있자 자신이 코베인의 자살에 영향을 주었다는 상실감으로 위의 구절이 언급되던 앨범인 This Note's for You를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콘서트에서 부르지 않았다.[13] 노엘 갤러거가 올타임 페이버릿 밴드인 비틀즈를 제외하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 하나이다. 대놓고 현역 최고 뮤지션이라고까지 한 적이 있고, 한국 방송에 출연해서 한 현역 락 가수 순위메기기에서 닐 영이 1위라고 한 적이 있다.[14] 정작 밥 딜런도 빌보드 1위곡이 없다. 그의 빌보드 최고 기록은 Like a Rolling Stone의 빌보드 2위 *[15] 크레이지 호스는 참여하지 않았고 스트레이 게이터The Stray Gators라는 백밴드가 연주했다.[16] 최종 결과물은 좋은 평가를 받지만 라이브 자체는 대니 휘튼의 죽음, 밴드 멤버 간의 불화라던가 엉망인 제반 상태 때문에 재앙이었다고 한다. 막판엔 해이해진 밴드와 온갖 스트레스로 폭발한 닐 영이 데이빗 크로스비와 그레이엄 내시를 데려와야 했을 정도.[17] 재발매 자체는 1995년에 있었지만 갑자기 무산되었다.[18] 녹음 자체는 Tonight's the Night 직후에 했다.[19] 법적인 문제도 있었다고 한다.[20] 이것 뿐만이 아니라 여친하고도 헤어진 상태였다.[21] MTV 언플러그드 라이브 앨범[22] "Well I heard mister Young sing about her/ Well, I heard ole Neil put her down/ Well, I hope Neil Young will remember/ A Southern man don't need him around anyhow" 내용은 대략 닐 영이 뭐라하든 우린 그가 필요 없다.[23] Journey Through The Past, Time Fades Away, On the Beach, American Stars'n'Bars, Hawks & Doves, Re-a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