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사계

덤프버전 :

諾思計

파일:external/www.newscj.com/65578_55760_2249.jpg
고투항수령낙사계(故投降首領諾思計) 낙사계 묘지명 탁본

1. 개요
2. 생애
3. 행적
4. 기타


1. 개요[편집]


? ~ 748년 음력 5월

발해의 인물.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행좌우림군장군, 농우절도사, 경략대사 등을 역임한 장군, 관리. 낙사계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원래 중국의 학자들로서는 부여 운운 때문에 백제인으로 추측했으나 한국의 고대사 연구자 김영관에 의해 2011년 1월, 발해인으로 정정된다. 시기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725년 당에 파견된 발해사신 낙(諾)개몽의 존재도 발해인이라는 가능성을 더해준다.


2. 생애[편집]


734년 8월 당의 유주장사(幽州長史) 설초옥(薛楚玉)과 함께 거란과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748년 5월 장안성(長安城) 자택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행적[편집]


발해에 있을 적에 발해 15부의 하나인 부여부의 대수령을 지냈다.[1]

그리고 자세한 시기는 불명이나, 734년 이전 발해에서 당나라로 투항했다. 734년 8월 당나라의 유주장사 설초옥(薛楚玉)과 함께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봉장군으로 참전했기 때문. 그런데 이 시기 발해와 당나라는 적대관계였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비슷한 시기에 발해에서 의견 차이로 당으로 망명하다시피한 대문예와 같은 계파에 속한 인물이었고, 무왕이나 장문휴 등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당으로 투항했을 수도 있다.

당에 투항하고 황제로부터 노정빈(盧庭賓)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743년 당의 장군으로서 거란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748년 5월에 경조부 만년현 평강방의 마을에서 사망했다.

문원영화(文苑英華) 권647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당에 투항한 후 당 현종에게 받은 노정빈(盧廷賓)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관직은 공봉장군.


4. 기타[편집]


  • 낙사계 묘지명은 1991년 보고되었는데 덮개돌인 개식이 없고, 행적을 기록한 지석만 남았다고 한다.
  • 특이하게도 당에서 고관대작에 올랐음에도 묘지명[2]에는 조상에 대한 언급, 출생지, 자손에 관한 기록이 없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8 07:42:56에 나무위키 낙사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대무신왕 5년조에 부여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사람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투항해, 연나부에 배속되고 낙씨(絡氏) 성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한자가 서로 다르고 시기적으로도 너무 멀어서 단정지을 수는 없다.[2] 묘비에 적혀져 있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