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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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운광류
4. 왜검 교전
5. 기타
6.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김체건(金體乾)[1]

조선 중기의 무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는 인물로 무협지 같은 삶을 살았으며[2], 숙종 때 군교를 지냈다. 숙종 23년엔 별무사로 재직하던 도중 장길산 일당을 체포 하기도 하였다.

흔히 조선제일검을 뽑으라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며, 그의 아들인 김광택은 검술의 지고한 경지에 올라 붙은 별칭인 검선(劍仙)[3]으로서 검술의 달인으로 전해진다.


2. 생애[편집]


훈련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일본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나라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의 마음이 항상 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신의 아랫사람 중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하였다.[4]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칼을 쓰는 묘리는 왜인들이 최고이다. 왜의 달인인 아이스 히사타다의 검술을 카게류(陰流)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군교(軍校)인 김체건이 일찍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그 방법을 배워 와서 지금까지 유전하니, 이른바 왜검이라는 검술이다.

『병학지남연의』 (1787)


조선은 건국 초기까지는 군사력이 상당히 강했고, 바로 직전 여말선초 때에도 전란을 오래 겪은 만큼, 검술 역시도 딱히 부족하단 기록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전투 환경의 변화와 오랜 태평성대로 군사 훈련 등이 제대로 되지 않아 검술 교습이 상당히 퇴보하여 근접 백병전 능력에 악영향을 끼쳤다.[5]

이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다시금 제대로된 군사 체계를 잡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며,[6] 여기에는 검술 역시 당연히 포함되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장도술, 제독검, 그리고 무비지를 통해 역수입된 조선세법과 이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본국검법 등 여러 검술이 조선 군사 체계에 포함되기도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의 검술에 큰 인상을 받은 조선에서는 당연히 일본의 검술 역시 입수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훈련도감에서는 일본 고류 검술을 익힐 자로서 무예에 상당히 능했던 김체건을 선발해 일본 검술을 익혀오도록 했다.[7] 김체건이 일본 고류 검술을 익힌 방법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출처로 나뉜다.

하나는 조선 내의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동래왜관에서 배웠다는 것이고[8],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낼 때에 사신으로 가서,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배워왔다는 것이다.[9]

김광택전은 유본학[10] 후대의 개인이 쓴 것이라,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더 객관적 사료라고 할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나 실록의 기록으로서 추측해보자면, 김체건은 당시 일본으로 파견된 무리에 자신의 이름이나 정체를 숨기고 파견되었고, 이후 일본에서 수 년 동안 따로 떨어져 나와 시간을 보냈으며, 일본 전토를 돌아다니며 수행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11] 아니면 검보를 얻어 수행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12]

어쨌든 조선으로 돌아온 후 임금의 앞에서 검술을 시연할 때에 워낙에 날래고, 대단하여 임금이 놀랐다고 한다. 재 위에서 검술을 시연하였는데, 그가 한번 기합을 지르자 시범을 보던 이들의 정신이 아득해져 정신이 없었고 마치 춤을 추는 듯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재에 발자국 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날랬다고 한다.

정조 대에 쓰여진 무예도보통지에는 김체건이 만든 대련체계인 교전, 그리고 그가 일본에서 배웠다는 8개의 유파 중 4개 유파의 검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복원, 연구해본 사람에 의하면 일본 검술의 기술들을 담으면서도, 그들이 주로 쓰는 동작의 카운터 격인 기술도 들어가 있어, 검술 수련 시간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병사들이 속성으로 익히고 효과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여러모로 군사들에게 검술을 효율적으로 교습시키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그리고 숙종 8년에 우의정 김석주[13]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자리에 금위병[14] 한명을 데려가 중국의 기예(무예)를 배워 오게 하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이 금위병이 바로 김체건으로 추정된다. 추가적인 기록이 없는 게 아쉽지만 이를 고려하면 김체건은 일본 검술을 배워온 이후 청나라로 건너가 짧게나마 청나라에서도 무술을 수련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당시 조선에서 행해지던 조선세법이나 본국검법, 쌍수도 등 다른 검술들 역시 능했을 가능성도 있다. 짧은 기간에 다양한 유파의 검술들을 익혀서 교습 체계를 만든 것을 고려하면, 기본적으로 검술에 대한 숙련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에 무예에 능통하여 일본 검술을 배워올 인물로 뽑힌 것이니, 일본 검술을 익히기 전에도 기본적으로 검술에 꽤 정통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1697년에는 별무사로 재직하면서 장길산의 도당인 이영창 등의 일당을 체포하기도 했다.

기록은 많지 않지만 여러모로 무협지가 연상되는 흥미로운 삶을 산 인물이다. 그의 아들인 김광택 역시 마찬가지로 검술로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광택의 경우 객관성 있는 사료의 서술이 좀 적은편이다.


3. 운광류[편집]




김체건이 배워온 검술 8개 중 4개가 왜검이라는 이름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실렸다.

다른 왜검들에 비해 운광류는 비교적 단순하고 직선적인 것이 특징이다보니, 군영에서 계속 훈련되고 있었다고 추측 된다.

운광류는 원래 운홍류라는 이름으로 카게류의 방계 유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15]


4. 왜검 교전[편집]




김체건이 병사들을 훈련 시키기 위해 만든 체계 중 일부이다.

왜검에 나온 여러 가지 공격기법과 방어기법을, 총체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카타 수련이다.[16]

둘이서 여러 기술[17]들과 이어지는 공방 및 패링 등의 훈련 할 수 있게 구성되어있다.


5. 기타[편집]


야뇌 백동수 의 스토리 작가로도 유명한 이재헌이 다른 작가와 함께 김광택의 일대기를 신작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일부를 공개했다. #

역사 소설가로 유명한 이수광 작가가 역사 무협 소설인 '조선제일검 김체건'을 출간했다. #


6. 대중매체[편집]



6.1. 대박[편집]



2016년 3월 부터 방영됐던 SBS의 대박(드라마)에서 등장. 배우는 안길강.

1화에 잠깐 등장한 후, 6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대길을 도와주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대길이 호랑이에게 막대기 하나로 달려들자 그를 도와준다. 그 후에 아귀에게 잡힌 대길을 도와주러 오고 그 이후로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본래 훈련도감 군관 출신으로 황진기는 그의 부하였다. 그러나 황진기의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그 비리로 인해 출세를 하지 못했고, 이에 회의를 품고 궁을 나왔다. 그 후에 황진기와 붙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황진기를 제압했었다.

18화에서는 이인좌의 호위에 황진기까지 덤벼들려 했으나 황진기와 호위를 제압하고 이인좌는 칼을 뽑기도 전에 제압하는 등 작중 최강의 무력 보유자임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화에서는 새로운 제자로 아들을 가르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6.2. 천일야사[편집]



153화에 등장. 여기서는 왜관에서 일본 검술을 배웠다는 김광택전에 수록된 설을 차용하였다.


6.3. 칼부림[편집]


3부 1화에 첫등장하지만 김서방이라고만 불리는지라 본명을 알 수 없었으나 3부 36화에서 밝혀진다. 김충선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 다만 실존 인물은 작중 배경의 50여년 뒤인 숙종 시기에 군교를 지냈기에 그 실존 인물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은 즉슨 모종의 이유로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을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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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몰년도 미상[2] 한국 역사상 개인 무력으로 가장 유명한건 척준경이지만, 척준경의 경우 체계적인 검술에 관한 기록은 없다.[3] 정조시대 쓰여진 김광택전의 저자 유본학이 劍仙之類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 비롯된 말로, 검선이라 직접 불리운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 김영호가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집필한 이후이다.[4] 유혁연은 숙종에게 일본 군사들과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무예인 ‘왜검(倭劍)’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건의 하였다.[5] 선조실록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오지 않았다며 한탄 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물론 민간, 혹은 지방 등에서 전승되어 중국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세법의 사례도 잇고, 왜란 때도 검술로 활약한 여러 인물들이 있는 만큼 이것은 당시 중앙에서 검술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말일 가능성이 크다. 막상 임진왜란이 터지고 검술을 수소문 했다 하더라도 전근대의 행정력, 심지어 전국이 전쟁의 화마 속에 있던 당시 상황으로는 막상 검술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6] 숙종 역시 일본과 청나라의 우수한 군사기법을 도입해 전투력을 향상하는데 노력했다.[7] 사실 임진왜란 때 항왜(降倭)들에게 배운 검술들이 있었고 무예제보번역속집에도 실렸으나 이것이 실전됐던 것으로 보인다.[8] 김광택전, 숙종 실록에 따른 것[9] 영조 실록, 무예도보통지에 따른 것, 이에 대해서는 한가지 어폐가 있는데, 당시에 사신을 파견한 일이 없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장군직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일이 있다. 이때에 같이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10] 유득공의 맏아들[11] 숙종 8년에 검무의 대가인 오순백이라는 이가 함께 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능성은 낮지만 그가 김체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12] 전자와 후자를 절충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검보를 얻어 수련을 쌓다가, 이후 일본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김체건은 여덞 가지의 다른 종류의 유파를 배웠다고 하며 그 중 네 가지가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다.[13] 북벌론자 였으며 경신환국 이후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되었다.[14] 왕을 호위하는 직속 무사[15] 위 영상에서는 상대의 베기 조차 씹어 버리고 공격하는 방식으로 시연되었다.[16] 다만 일본의 카타 보다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칼을 직접 부딪히며 담력까지 기를 수 있는 실전적으로 구성되어있다.[17] 상대 검을 옆으로 치워 낸뒤 공격, 받아 흘리기, 검을 늘어틀이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