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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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관음사사적과 심청전
4. 문화재
5. 기타


1. 개요[편집]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이다.

곡성 관음사는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됐다.


2. 역사[편집]


300년(백제 분서왕 3년)에 성덕(聖德)이라는 보살이 낙안포(지금의 벌교)에서 금동관세음보살을 모셔와 이곳에서 창건했다고 전한다.[1] 다만 공식적으로 백제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온 384년(침류왕 원년)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설화대로 300년에 절이 세워졌다면 그보다 84년 전에 백제에 불교가 도래했다는 것이니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일이다.

관음사 창건 설화는 정확도보다는 아래에서 설명할 심청전과 매우 높은 관련성으로 주목도가 높다.

3. 관음사사적과 심청전[편집]


현재 송광사에는 1729년(영조 5년) 관음사에서 간행된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사적'(玉果縣 聖德山 觀音寺事蹟)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책에는 관음사의 장로였던 우한자(優閑子)가 송광사의 백매자(白梅子) 선사에게 들려준 관음사의 창건 설화와 관음사 원통전을 해체 복원하던 중 발견한 상량문 기록 등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다. 이 책에 실려있는 관음연기(觀音緣起)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이라는 고을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살고 있었다. 비록 장님이지만 원량은 양반의 후예로 청렴 강직하고 기개가 있어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원량의 부인은 바느질과 품팔이로 생계를 꾸렸지만 산고 끝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태어난 홍장(洪莊)이라는 딸을 원량은 업고 다니면서 이집 저집 젖동냥을 하며 키웠다. 다행히도 홍장은 성장하면서 수려한 용모를 갖췄고 특히 지극한 효심으로 사람들은 이를 대효(大孝)라 칭송하였는데 백제는 물론이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원량은 길을 걷다 홍법사(弘法寺)의 화주승(化主僧) 성공(性空)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원량에게 대뜸 같이 불사(佛事)를 일으키자면서 큰 시주를 부탁하였다. 원량은 자신은 논밭 한 뙈기 없이 가난하고 게다가 장님인데 어떻게 시주를 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성공은 전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내일 아침 길에서 만나는 장님이 큰 시주를 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말을 하였다. 원량은 잠시 생각하다 자신은 뭣 하나 가진 것 없고 딸린 것이라고 해봐야 효성 지극한 딸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 딸이라도 도움이 된다 하면 시주하겠다고 말한다. 그때 홍장은 열 여섯살이었다.

성공은 원량의 결정에 크게 감사해하였고 원량과 함께 그의 집으로 함께 가 홍장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 원량은 성공에게 약속한 내용을 홍장에게 설명하는데 평생 아버지를 봉양할 생각이었던 홍장은 애통했지만 이윽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홍장이 성공을 따라 길을 나서자 마을 사람들도 모두 슬퍼하였다.

홍장과 성공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몇날 며칠을 걸은 끝에 소랑포(蘇浪浦)에 도착하여 잠시 쉬고 있었다. 그리고 곧 두 척의 붉은 배가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나루터에 당도하였다. 그 배에는 진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타고 있었는데 사신들은 홍장을 보더니 황후마마라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홍장과 성공이 당황해하자 사신들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였다. 자신들은 진나라에서 왔으며 영강 정해년(267년)에 황후가 돌아가셨는데 어느날 황제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새 황후가 이미 동국(東國, 백제)에 태어나 장성하였고 전 황후보다 나은 면도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황제는 날이 밝자마자 각종 예물을 가득 챙겨 관상을 잘 보는 사람과 함께 동국으로 보내 새 황후를 맞이하라는 명을 내렸고 걱정을 안고 왔는데 홍장을 보자마자 황후감임을 직감하게 되어 이제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홍장은 자신은 이미 부처님에게 바쳐진 몸이므로 사신들이 가지고 온 예물을 모두 성공에게 준다면 사신들을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사신들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자 성공은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며 기뻐하면서 자신이 원량을 보살피겠다며 홍법사로 돌아갔다.

사신들을 따라 진나라에 가 황제를 만난 홍장은 곧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정업(淨業)을 닦고 행하여 나라에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고국을 잊지 못하는 마음에 불상과 탑을 만들어 감로사(甘露寺), 금강사(金剛寺), 경천사(敬天寺) 등으로 보내며 공덕을 쌓았다. 그리고 홀로 남은 아버지와 고향을 잊지 못해 정성을 다해 자신의 원불(願佛)로 조성하던 관음상을 석선(石船)에 실어 백제로 보낸다.

그 후 옥과(玉果, 지금의 곡성군 옥과면)에 살던 성덕(聖德)이라는 처녀가 하루는 낙안포(지금의 벌교) 바닷가를 걷다 빛이 가득한 배를 발견하였는데 배 안에는 관음상이 빛나고 있었다. 성덕은 갑자기 경건한 마음이 들었고 이 관음상을 어디로든 좋은 곳에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보았더니 아주 가벼웠다. 성덕은 관음상을 모셔둘 곳을 찾기 위해 관음상을 업고 일단 고향인 옥과로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점점 관음상을 어디에 모실지 고민이 되었다. 화순의 백아산(白亞山), 담양의 추월산(秋月山), 옥과의 설산(雪山)이 후보였는데 심사숙고 끝에 백아산에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백아산을 향해 가다 하늘재(天峙)에 오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가벼웠던 관음상이 갑자기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덕은 이곳이 관음상을 모셔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산의 형상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 터의 크기도 적당하여 그 자리에 관음상을 모시고 절을 지었다.

성덕은 움막을 만들어 그곳에 관음상을 두고 관음사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매일 드렸는데 산 아래에 살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찾아와 같이 예배를 하며 기도를 드렸더니 모두가 성취되는 기적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후대 사람들이 성덕을 관음사의 개산조(開山祖)로 하여 그의 이름을 따 주산(主山)의 이름을 성덕산(聖德山)이라 하였다. 그 후로도 수백년동안 내륙의 관음영지(觀音靈地)로 소문이 나 정유재란 전까지 80여 동의 건물이 있었다. 한편 원량은 딸과의 이별에 슬픔 속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다 어느날 홀연히 눈을 떴고 95세까지 장수하며 편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관음사 사적기에 실린 이 이야기는 디테일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큰 틀에서 홍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황제의 황후가 되고 장님인 아버지가 눈을 뜬다는 내용이 심청전과 매우 유사해 어떤 관련은 분명 있어보인다.

기본적으로 관음사사적은 사찰내에서 구비전승되던 이야기를 1729년에서야 문자로 기록한 것인데 원래도 전승은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내용이 조금씩 바뀔 가능성이 높은데다 이 책을 쓴 백매자 선사가 번잡한 것은 빼고 부족한 것은 더했다고 밝히고 있어 다시 한번 내용이 윤색됐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설화에서 진나라의 사신들은 홍장에게 영강(永康) 정해(丁亥)년에 황후가 돌아가셨다고 하였는데 영강은 서진 혜제의 네 번째 연호로서(300~301년) 이 시기에는 정해년이 없다. 또한 불상을 보냈다는 고국의 절(감로사, 금강사, 경천사)이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이므로 따라서 이 부분도 후대 어느 시점에서 첨가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충청도 대흥현이라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일단 관음사가 창건된 백제 당시에는 충청도나 대흥현이라는 지명 자체가 없었으며 대흥현은 고려 말에서야 생겼는데 그마저도 지금의 예산군 일대이다. 곡성과는 지리적으로도 멀고 상관 관계가 없는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관음사 창건 설화로까지 옮겨온 것인지는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과거 곡성 일대의 어떤 지명의 발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대흥'과 비슷하게 변했고 이것이 대흥으로 확립된 후, 나중에 이야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충청도 대흥현으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는 곡성이나 인근 지역에 지금도 '대흥마을'이 여러 곳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와전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설화에 나오는 홍법사(弘法寺)라는 절인데 홍법사가 현재 몇 곳 있기는 하나 현존 홍법사 중에서는 역사가 깊은 곳이 없어서 설화 속 홍법사가 지금도 존재하거나, 또는 현존 홍법사가 설화 속 홍법사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또한 대흥현을 충청도로 해석한다 해도 충청도에는 홍법사가 없다. 관음사가 창건되던 시기에는 있었다가 현재는 사라진 절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특별한 물증은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후대에 와서 설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곡성군은 이 설화를 바탕으로 곡성과 심청전과의 연관성을 밀고 있다.


4. 문화재[편집]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52호 곡성 관음사 동종과 광명대(銅鐘과 光明臺)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 곡성 관음사

설화에 언급된 것처럼 관음사는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건물이 80여 동에 달하는 꽤 큰 세력을 유지한 절이었다. 이후 1832년에 큰 홍수가 나 절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6.25 전쟁 당시만 해도 아직 20여 동의 건물이 남아있었고 곡성과 화순, 담양 등에 걸쳐 논밭 16,000마지기를 소유한 대지주이기도 했다. 그런데 1953년, 인근의 백아산이 빨치산의 소굴이라는 이유로 국군이 관음사 전각에 불을 질러 절 전체가 소실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당시 보물 제273호였던 원통전이 전소되고 내부에 있던 보물 제214호 금동관음보살좌상도 불두(佛頭)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2] 다행스러운 점은 일제시대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이었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원통전과 관음보살상의 소실되기 전 모습을 찍어둔 사진이 남아있다는 것.원통전 관음보살상

관음사사적에는 원통전 대들보에 쓰여진 글을 보니 1374년(공민왕 23년)에 다섯 번째로 중창을 했다는 내용과 관련 기록들이 남아있었다고 쓰여있어 만약 원통전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현재 관음사에 있는 원통전은 1954년에 인근 대은암(大隱庵)에 있는 건물을 옮겨온 것인데 원래의 원통전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문화재는 아니지만 관음사에는 특이한 불상이 있는데 국내에 하나뿐인 어람관음(魚籃觀音)불상이 그것이다.[3] 이 불상은 원통전 앞 작은 연못 옆에 있고 또 그 앞에 금랑각(錦浪閣)이라는 이름의 교각이 있다. 보통 관음보살을 모시는 관음도량이나 관음성지는 그 성격상 바다 인근에 있기 마련이어서, 곡성 관음사는 좀 특이한 케이스인데 이렇게 바다를 연상시키는 불상이나 교각이 있다는 것은 이 절이 왜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였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증거이다.


5. 기타[편집]


1911년 일제 내무부 지방국은 지방의 사찰 중에서 사료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들을 모아 <조선사찰사료>라는 두 권의 책을 냈는데 여기에 <성덕산 관음사사적>이 실려있다. 그 후 관음사사적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소개한 사람이 한용운으로 그는 처음 설화를 보고 놀랐는지 1930년 10월, 한 잡지에 심청전의 유래가 관음사사적의 설화인 것 같다는 기고를 하였다. 그리고 이어 김태준은 1933년 발행한 <조선소설사>에 '원홍장 이야기'를 한글로 옮겨 실으면서 이 이야기가 심청전의 근원설화라고 주장하였다. 이 내용은 나중에 KBS역사스페셜이 정리해 방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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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절이 있는 산의 이름도 여기서 따와 성덕산이다.[2] 이 당시 문화재 일련번호는 일제시대에 붙인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며 당시에는 보물만 존재하였다. 해방 후 1955년에 일괄적으로 보물을 국보로 바꾸었다가 1962년에서야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분리하여 새로 일련번호를 붙였다. 관음사의 두 보물은 이보다 더 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국보/보물 제214호와 제273호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공석으로 남겨두지는 않았다.[3] 어람=물고기가 든 바구니, 이 바구니를 들고 있는 관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