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호(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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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 추존 존령
秦州史君 | 진주사군

묘호
없음
시호
진주사군(秦州史君)

고(高)

호(湖)

대연(大淵)
부친
고태(高泰)
생몰
? ~ ? (향년 70세)
1. 개요
2. 생애
3. 가족
4. 참고 항목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오호십육국시대 후연, 남북조시대 북위의 관료로 발해군(渤海郡) 수현(蓨縣) 출신이었다. 는 대연(大淵)이었으며, 영서장군(寧西將軍), 양주진도대장(凉州鎭都大將)을 역임했다. 고호는 후연의 관료 고태의 아들로 북제를 세운 문선제 고양의 고조부였다.


2. 생애[편집]


조년 시기부터 재치와 기품이 있고 민첩했으며, 형 고감(高轁)이 유명해 동생인 본인도 최령(崔逞)의 존경을 받았다. 고호는 후연의 요직을 지냈으며 395년, 후연이 출병하여 북위로 진격하는 참합피 전투를 앞두고 황제 모용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와 연 두 나라는 서로 우방국이고, 위에 내란이 발생했으니 우리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위급하면 그들도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간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탁발규에게 말을 달라고 했다가 주지 않았다 해서 그의 동생을 억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양국의 관계를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오늘은 태자(모용보)를 보내 원정을 이끌어야 합니다. 하지만 위군은 모두 정예하여 곤경에 처할 확률이 높습니다. 태자는 젊고 드세며 적을 가벼이 여겨 군사를 통솔하는데 부적합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군대가 불리할 것 같으니 폐하께선 좀 더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황제 모용수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워해 고호를 파직시켰다. 결국 참합피 전투는 후연의 대패로 끝났으며 모용수는 이듬해인 396년 친정해 형세를 반전시키려 했으나 참합피를 지나다가 산처럼 쌓인 후연군의 시체를 보고 화병으로 붕어했다. 이후 태자였던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호를 연군태수(燕郡太守)로 다시 등용했다. 397년 모용보는 수도인 중산(中山)[1]을 버리고 옛 수도인 용성(龍城)[2]으로 도주했으나 그런 상황에도 종실간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고호는 후연의 패망을 직감하고, 3,000호를 거느린 채, 북위에 투항했다.

북위에 투항한 고호는 동아후(東阿侯)에 책봉되었으며, 우장군(右將軍)을 더해 대동제부(大東諸部)를 통괄했다. 제3대 태무제 시기 영서장군, 양주진도대장을 역임했으며 고장진(姑臧鎭)[3]을 떠나 민간에서 덕을 베풀다가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후 진서장군(鎭西將軍), 진주자사(秦州刺史)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敬)이라 했다.

550년, 현손인 문선제 고양이 북제를 건국하자 황조진주사군(皇祖秦州史君)으로 추존되어 칠묘에 위패가 안치되었다.


3. 가족[편집]


  • 부친: 고태 - 황조이부상서(皇祖吏部尙書)로 추존.
  • 아내: 모용씨(慕容氏) - 모용도(慕容度)의 딸이다.
  • 장남: 고진(高眞)
  • 차남: 고각발(高各拔)
  • 3남: 고밀 - 황조태위무정공(皇祖太慰武貞公)으로 추존.
  • 4남: 고치(高稚)


4. 참고 항목[편집]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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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허베이 정주시(定州市).[2]랴오닝 조량시(朝陽市).[3]간쑤 무위시(武威市).